문화포커스
- [남효선_동해연안의 문화여행]풋굿, 두레판 노동축제... 칠월의 농경세시
- 남효선
‘풋굿’판 메구장단에 논매기 고된 노동 훌훌 벗어던지고....
여름이 들어선다는 ‘입하(立夏)’무렵부터 농촌의 삶은 눈코 뜰 새 없는 바쁜 날의 연속입니다. 물론 한해의 살림살이를 장만하는 농사일 때문이지요. 여름의 어원쯤으로 여겨지는 ‘녀름짓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입하부터 칠월 백중 무렵까지는 밭매기와 논매기를 하느라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는 농사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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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매기
여섯 살 나던 해부터 실한 농군 감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장씨네 머슴살이를 시작한 헌수아배는, 유월 한 달 내내 서숙 밭과 논바닥에 엎드려 보냈습니다. 논둑을 바르고 못자리를 만들고, 써레질을 하고 모심기를 하는 일은 그래도 일다운 일입니다. 아무래도 힘과 품이 많이 드는 상 농군에 딱 어울리는 농사일이지요. 게다가 가슴팍이 옴팡지게 벌어진 소를 끌며 논 한배미, 한배미 척척 갈아엎고 나면 절로 신이 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 소 써래질하는 모습
그러나 밭매기는 영 우습습니다. 하루 종일 땡볕에 엎디어 쪼그려 앉은 몸새로 호미질을 한다는 게 여간 어렵거니와, 도무지 실없는 웃음은 왜 그리 나오는지, 도대체 신명 없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밭작물을 소홀히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서숙과 수수농사는 이밥보다 훨씬 요긴한 식량이기 때문입니다. 서숙밭은 보통 세벌매기를 하면 끝납니다. 서숙은 6월 초에 파종하지요. 보리를 거둔 자리에다 감자를 묻었던 것을 캐내고 나면 서숙을 파종합니다.
△ 서숙밭매기
씨를 뿌릴 때, 조밀 발아를 억제하기위해 서숙 씨를 흙과 함께 석어 뿌립니다. 파종한 뒤 닷새쯤 지나면, 서숙의 싹이 돋습니다. 그리고 열흘이나 보름쯤 지나면 ‘서숙 밭 아이매기(초벌매기)’가 시작되지요. 이때부터 농가의 아낙네들은 ‘아침상 물리고 서숙 밭으로 나가서 해가 져야 집에 돌아오는’ 생활이 이어집니다. 아이매기가 끝나고 열흘 쯤 뒤에는 두벌매기를 하구요. 백중 무렵에 세벌매기가 끝납니다. 이 때쯤이면 ‘서숙 밭의 고랑에 뿌려놓은 수수밭 매기’도 함께 끝이 납니다.
△ 콩밭 매다 잠시 일손을 놓고 있는 할매
‘풋구먹기’는 바로 서숙밭매기와 논메기가 끝나는 칠월 백중 무렵에 벌어집니다. 풋구먹기는 ‘농구먹이기’, ‘호미씨시미’, ‘써래씨시미’, ‘초연(草宴)’ 따위로 불렸습니다. 울진을 비롯한 동해연안 지방에서는 ‘풋굿’, ‘농구먹이기’, ‘초연’으로 불렀습니다. 풋굿은 일 년 내내 고된 농사일에 매달리는 농군들을 위한 ‘노동축제’입니다. 그 때문에 이날을 ‘머슴날’이라고도 했다고 고문헌은 전합니다. 일꾼들을 데리고 있는 집에서는 풋굿날 일꾼들이 먹고 즐길 수 있는 모든 음식을 장만합니다. 고된 농사일을 마쳤으니 하루쯤 실컷 먹고 마시며 몸에 밴 피로를 털어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노동절인 셈이지요.
헌수아배는 풋굿날이면 괜스레 마음이 설렙니다. 뭐니 뭐니 해도 하얀 이밥과 막걸리를 배불리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먹을거리만 풍성한 게 아닙니다. 걸쭉한 놀이판도 하루 종일 벌어집니다. 사실 헌수아배가 풋굿날을 기다리는 것은, 동네 머슴들끼리, 또 이웃 농군들끼리 한데 어울려 신명나게 두들기는 메구장단이 신명을 돋우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부터 어깨 너머 익힌 메구장단은, 한 여름 폭염을 씻는 데는 그만입니다. 어릴 적부터 익힌 메구장단인지라 헌수아배의 메구솜씨는 인근 마을까지 호가 났던 터입니다.
논매기와 서숙밭 세벌매기를 마치면 농군들은 ‘풀찌기’에 나섭니다. 풀찌기는 산이나 들로 나가 참풀을 베어 소마구(우사)에 넣어 깔아 퇴비를 만드는 일입니다. 농사규모가 큰 집에서는 풀찌기를 위해 10여명의 일꾼을 삽니다. 이를 ‘놉’이라 합니다. 이렇게 풀찌기가 끝나면 풋굿날을 잡습니다. 풋굿날은 일꾼을 데리고 있는 집의 가장들이 모여 정합니다. 풋굿날에 비가 내리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으며, 이날 주인집들은 ‘용떡’을 해서 논매기가 끝난 논에 ‘용기’를 세우고 용떡을 논에 묻은 뒤 풍농을 기원하는 ‘용제’를 지냈습니다.
풋굿은 마을 전체에서 벌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헌수아배 마을에서는 같은 성황당을 모시는 마을사람들끼리 펼칩니다. 풋굿날이 정해지면 일꾼을 둔 집에서 ‘반원공사’를 열고, 풋굿 장소와 음식 분배 따위를 의논합니다. 헌수아배네 마을의 풋굿 장소는, 언제나처럼 마을에서 오리쯤 떨어진 ‘구수골 가마소’입니다. 얼굴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계곡에 허연 거품을 물고 내리쏟아지는 폭포가 일품인 곳입니다. 더구나 가마소에는 풋굿 신명에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는, 꺽지니 퉁가리니, 버들치 따위의 고기가 우글거리는 곳입니다.
가마소 불가 한 켠에 ‘농자지천하대본’이라 쓴 농기를 꽂습니다. 가마소 불가에 앉아마자 막걸리 잔이 한 순배 좌석을 돕니다. 논매기 할 때 '참'으로 마시는 막걸리와는 또 다른 맛입니다. 주인집에서 장만해 온 음식을 아낙들이 좌중에 죽 널어놓습니다. 하얀 백설기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돕니다. 애호박으로 부친 ‘노치’도 입맛을 돋웁니다. 죽변항에서 장만해 온 싱싱한 가자미회는 금방 동이 납니다. 횟감은 풋굿날 아니면 언감생심 생각도 못할 먹거리입니다.
△ 울진 평해 단오제의 풍물놀이
해가 중천에 뜨면 좌중은 이미 거나해져있습니다. 헌수아배가 깽쇠(괭가리)를 치며 불가를 돕니다. 칠용이 아배가 농기를 들자 농군들 모두 일어나 징물(풍물)을 들고 메구판을 만듭니다. 한바탕 신명나는 메구판이 계곡을 뒤흔듭니다. 칠용이 아배가 수건을 말아 등에 넣고 에의 곱사춤을 춥니다. 칠용이 아배 곱사춤은 흥부장터를 ‘울렸다 웃겼다’ 하는 솜씨입니다. 한바탕 메구판이 끝나면 씨름판이 벌어집니다. 주인집에서 광목 1필과 목수건 세장을 상품으로 준비했습니다. 씨름판의 장원은 언제나 헌수아배 몫입니다. 씨름판이 끝나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며 한바탕 소낙비가 쏟아졌습니다. 올 한 해 농사도 대풍이 되겠지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논매기와 세벌밭매기가 끝나는 칠월 중에 농가에서는 백중날 머슴들과 일꾼들에게 얼마간의 돈을 주고 쉬도록 하여 즐겁게 놀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하며 이를 ‘백중놀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백중날이면 머슴들과 일꾼들은 주인집에서 특별히 장만한 아침상, 새옷과 돈을 받는데, 이것을 '백중돈 탄다' 라고 하였습니다. 또 백중돈을 탄 일꾼들은 장터에 나가 물건을 사거나 놀이를 즐기기도 하고, 이 무렵 서는 장을 특별히 '백중장' 이라 하여 "풀물을 울리고 씨름 등을 비롯한 갖가지 흥미 있는 오락과 구경거리가 장판에서 벌어졌다"고 전해집니다.
풋굿을 벌이는 칠월은 ‘어정 7월, 동동 8월’이라는 향언에서 알 수 있듯, 가을 추수를 앞두고 잠시 허리를 펼 수 있는 시기입니다. 칠월과 함께 풋굿이 한바탕 꿈처럼 지나면 다시 농군들은 가을 추수거지가 끝날 때까지 농사일에 종일 매달립니다. 최근 풋굿이 전통문화축제로 되살아났습니다. 광산김씨 집성촌인 안동 와룡면 오천리 군자마을의 ‘풋굿축제’가 그것입니다. 지난 2004년에 처음 복원된 뒤 올해로 벌써 여섯 번째입니다.(♣)
- 글쓴이 : 남효선
-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안동대학교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공부하였다. 1989년 문학사상의 시 부문에서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하였다. 한국작가회의, 경북작가회의, 안동참꽃문학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둘게삼』이 있다. 현재 시민사회신문의 전국본부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