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이선아_바람 따라 구름 따라]청송 참소슬 마을
- 이선아
G열 6번
G, F, E, D열을 지나 크게 한숨, C, B, A. 다시 한숨. A열 까지는 아니더라도, C열. 변수를 두고, 중간에 게을러질 때도 있을 테니, 조금 여유를 부린다고 치고, E열.
‘앉을 수 있을까?’ E열은 창문이 곁에 있어, 가끔 사무실 밖을 훔쳐 볼 수도 있다. 쓰레기통도 가깝고, 복사기와 멀리 떨어져 시끄럽지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얼마 전 퇴사한 직원의 책상을 치우고 큰 금전수 화분을 놓아둔 데다, 파티션도 상큼하고 발랄한 파랑색이다.
“좋네.” 파티션을 손으로 쓸어보던 진이 말했다. 진은 일찍 출근했다.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무실에 들어오면 바로 눈 앞, 일렬횡대로 따박따박 박혀 있는 42개의 자리 중에, 통로를 사이에 둔, 우측 첫 번째 자리, 즉 G열 6번. 에 앉고 부터는 늘 일찍 출근했다.
그곳은 여름에는 등골의 땀이 마를 날이 없었고, 땀으로 의자에 붙은 엉덩이가 녹이 쓸 것 같이 더웠으며, 겨울에는 코가 시리고, 구두를 벗고 무릎 아래나 허벅지 쪽에 발가락을 대, 동상을 막아야 할 정도로 추웠다. 냉난방이 야박하기는 물론이요, 모든 사람들이 출퇴근길에 한번 씩 등을 두드려 주며, 위로를 가장한 위선을 양껏 뽐낼 수 있는 자리였으며, 든 것과 난 것이 단박에 눈에 들어오는, 시작이며 끝인 자리이다. 안쪽의 1번부터 바로 옆 5번까지 들락거릴 때마다, 허리를 펴고 앉아야 하며, 근무시간에 한눈을 팔았다간 어느 누구에게라도 틀림없이 걸려 메신저 창에서 하루 종일 놀잇감이 되는, 간부 행차 때 가장 먼저 일어서야하고 가장 늦게 앉아야 하는 곳이 진의 자리였다.
진은 이니셜이 박힌 티슈 통 마다 티슈를 채웠고, 새하얀 용지를 프린터에 채웠다. 가끔씩 B와 C열의 1,2,3번들이 군기잡기용으로 손수 사용하는 컬러프린터에 잉크를 확인하고, 이면지를 분리했다. 녹차와 커피를 챙겨두고, 커피도 아이스와 믹스로 분리했다. 휴지통을 들고 책상마다 다 쓰고 내놓은 펜과 종이를 수거 했으며, 주인의 출근을 기다리는 새 펜들을 챙겨놓았다. 종이컵과 머그잔을 손님용과 직원용으로 나눴다. 띵딩. ‘저녁 7시 반. 거기.’ 박 팀장이 보낸 문자 메시지였다. 마지막으로 박 팀장의 책상을 닦고, 걸레를 빨았다. 가방도 벗지 않은 채, 기지개를 켜고, 박 팀장의 문자 메시지를 지웠다.
오늘도 덥겠구먼. 매미가 ‘매암매암’ 울었다.
정글의 법칙
“팀장님!” 쾅쾅쾅. “팀장님!” 쾅쾅쾅.
“팀장님. 문 좀 열어 주세요.” 진이 계속 불렀지만,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진은 문 앞에 주저앉았다. 같은 부서 박 팀장은 희망퇴직이라는 인사 발령 이후로 회사에서도 볼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는 각본대로였는데, 문제는 그제부터 박 팀장에게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은 박 팀장과 같이 갔던 사우나와 골프장, 수영장까지 뒤졌었다. 어제는 퇴근하고, 박 팀장과 술을 마셨던 고급클럽도 찾아갔다. 그러나 모두 허사였다.
박 팀장의 퇴직 공고가 게시판에 붙던 날,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던 진에게, 사람들이 박 팀장에게 인사는 했냐고 물었다. 진은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점심 먹고도 인사를 해야 하나요? 아침 인사는 드렸는데요.’라고 말했고, 사람들은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가엾다는 듯이 진을 바라보며, 지금 책상을 정리 중이니, 아직 인사를 드리지 못했으면, 얼른 가보라고 했다. 진은 사람들에게 당황한 목소리로 ‘관두신다는 거예요?’라고 되물었다. 목에 힘을 주어 낯빛도 조금 붉게 보였으리라. 사람들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듯한 눈이 검은 이 젊은이에게 박 팀장의 성과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라면만 먹던 그의 어린 시절부터, 작은 회사를 이만큼 끌어올린 열정으로 돌아가신 회장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으며, 그 후에도 명성이 수그러들 때마다 한번 씩 홈런을 쳐서 건재함을 알렸지만, 기러기아빠가 되고 나서 부터는 웃음이 줄었다는 얘기에는 하나같이 입을 모으더니, 박 팀장이 어디로 가는 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거나 회사를 차린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회사를 차릴 만큼의 퇴직금을 준다고 해도 의리 있는 사람이라 다른 직업을 갖거나, 같은 직종이라도 가족들이 있는 외국으로 가서, 시작하지 않겠냐고 했다. 진은 반도 채 마시지 못한 커피를 버리고, 휴게실 문을 열고 황급히 뛰어 나왔다. 그리고 옥상으로 올라가 파라솔 아래 의자를 붙여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떠난다는 말이 이거구나. 오늘 저녁 시간을 비워둘까? 혹시 축하주라도 한잔 하자고 전화가 올지 모를 테니. 아니지, 이럴 때 일수록 조심해야지. 그럼 오늘 퇴근하고 자동차나 보러 갈까?’ 싱싱한 자동차의 상상이 한낮의 햇살을 깨뜨렸다. 부서진 햇살 조각은 달콤했다. 박 팀장의 퇴직은 진도 알고 있었다. 진이 입사할 때부터, 박 팀장의 명성은 대단했었다. 새로운 개척 시장의 일꾼이라며, 언론 보도에 연일 대서특필 됐었다. 끊임없이 그에게 아부를 하는 신문사와 잡지사가 넘쳐났고, 서로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화제의 중심인 박 팀장이 동문모임에 진을 불렀었다. 진은 박 팀장이 다닌 과의 후배가 아니었다. 단지 학교만 같았을 뿐이다. 같이 알고 지낸 선후배도 없었고, 어찌어찌 단대학생회장에서 서로 인맥이 통하는 듯 했으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 후로 박 팀장은 고급 술집으로 진을 불렀다. 술은 꼭 둘이 마셨고, 박 팀장은 화장실을 자주 들락 거렸다. 한번 가면 안 올 때도 많았다. 한번은 술집 주인인 듯한 여자가 박 팀장이 먼저 갔음을 알려주고, 술값은 다 계산 됐으니, 천천히 마시고 가라며 진의 곁에 앉았는데, 진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일어나 방을 나왔었다. 입구를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D열의 3번 자리, 김신유와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박 팀장을 본 적이 있었다.
그 후로 진은 박 팀장이 들어오거나 말거나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기분 좋게 술도 마셨다. 공짜 술은 잘 취하지도 않아서, 가끔은 박 팀장에게 미안했다. 미안한 마음을 전할 방법은 없었다. 박 팀장은 회사 휴게실에서 마주치거나, 복도, 회사 근처 단골 식당에서 마주쳐도 그는 진에게 가벼운 목례로 끝이었다. 술집에서만 살가운 박 팀장이 진을 집으로 부른 건 마른천둥이 치던 날이었다.
“집이 어수선해.”
“넓고 좋은 데요.”
“술 한 잔 할 텐가?”
“아니요.”
“사양하지 말게나, 이것도 공짜 술일세.”
“네?”
“일은 재밌나?”
“팀장님 덕분에 재미있게 하고 있습니다.”
“더 재미있게 해 줄 수도 있지. 도쿄 가본적 있나?”
“일본 도쿄요?”
박 팀장은 왼쪽 입 꼬리를 슬쩍 올리는 듯 하더니, 이번 도쿄 시장을 개척할 조명 디자인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회사가 3년 동안 공을 들인 일이야. 도쿄가 새로운 빛의 세계를 맞이할 수 있게, 자네가 좀 도와줘야겠어.”
회사에서는 도쿄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두 개의 디자인 팀을 만들었고, 박 팀장이 속해있는 A팀과 김신유가 속해있는 B팀이었다. 말이 팀이지. 인원 구성도 그렇고, A팀은 박 팀장이 거의 혼자 끌고 가다시피 했다. 박 팀장의 디자인이야 알아주는 것이니. 어차피 회사에서 그의 작품을 도쿄로 내보내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고, 작년부터 퇴사 얘기가 나오는 박 팀장에 대한 그간의 예우 차원이기도 했다. 도쿄 시장은 떠나는 박 팀장에게 마지막 선물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너무 잘 알려진데다, 박 팀장의 색깔이 강해서 식상해졌다는 핑계로 거절당할 수도 있으니, B팀은 박 팀장의 대척점에 서서, 변덕스러운 대중의 입맛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대중적이고 다양한 작품 위주로 디자인을 내놓아 도쿄를 사로잡아보자는 사장의 지시로 꾸려진 팀이었다.
“제가 B팀의 작품이 바다를 건너지 못하도록...”
진의 낮은 목소리가 집안 전체에 울렸다. 박 팀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시선을 아래로 향하더니, 진을 보고 말했다.
“아니. 바다를 잘 건너게 해야지. 내 것과 같이.”
진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순간 너무 넘겨짚은 것은 아닌가, 후회가 밀려들었다.
“이번 주에 도쿄 출장으로 내가 자리를 비우면, 내 전화번호로 누군가 자네에게 전화를 할걸세, 그럼 전화를 받고,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네. 일이 잘 처리 되면, 차와 집. 모두 자네 이름으로 살 수 있을 걸세. 요즘도 출근은 제일 먼저 하지?”
“그럼요.” 진은 술잔을 한 번에 비웠다.
‘박 팀장만 잘 잡으면, 어쩌면, 도쿄에서도 집사고 차 굴리고...’
진은 공기를 얕게 들이켰다.
박 팀장이 도쿄 출장을 가고, 이틀이 지난 후, 퇴근길에 연락이 왔다. 기계음을 닮은 목소리 었다. 내일 아침 진의 책상 아래 상자가 놓여 있을 것이고, 택배 기사가 오면, 주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 날 밤 진은 일찍 퇴근했고, 집으로 가는 길에 달은 보지 못했지만, 창을 조금 열어두자, 어디선가 빛이 들어와 벽 모서리에서 꺾여, 방안에 반쯤 걸쳐졌다. 진은 그 빛이 자신을 타고 올라 올 것만 같아 자꾸 몸을 뒤척였다.
다음 날, 진의 책상 아래, 오른쪽 구석 진 곳, 기계음을 닮은 목소리가 말했던 상자가 있었다. 그렇게 큰 편도 아니었고, 무겁지도 않았다. 발신자와 수신자가 적혀 있지 않았지만 포장은 꼼꼼하게 아주 잘되어 있었다. 바닥에 뒀다가는 먼지가 묻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책상위에 올려두면, 누군가가 상자에 대해 물어볼 것 같았다. 발을 조금 뒤로 빼서, 공간을 만들고, 검정 비닐로 된 빈 서류철을 바닥에 깔고 상자를 올려두었다. 진은 그날, 의자를 조금 빼서, 앉는 바람에 하루 종일 허리를 곧추 세워야 했다.
도쿄 출장을 다녀온 뒤로 박 팀장은 진을 찾는 횟수가 뜸 했고, 회사에서 자주 볼 수도 없었다. 진은 하루에도 열 두 번 씩, 은행 계좌를 확인 했지만, 돈은 입금 되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도 통화가 되지 않았다. 진은 이른 새벽, 박 팀장의 집으로 찾아가, 그의 자동차 옆에서 몇 시간을 기다렸다. 주차장의 차들이 한 대씩 빠져나가고, 도로 사이를 오가는 차들이 줄어들었을 때, 박 팀장을 만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렇지 않아도, 연락 하려 했다네. 혹시 아침 안 먹었으면, 함께 먹겠나?”
“아침은 됐습니다. 그보다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아 그거, 일주일 후, 내가 떠나면, 바로 입금 될 걸세. 계좌 번호 다시 확인 할까?”
“아..아닙니다. 좀 답답했습니다. 그럼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진은 허리를 깊이 숙였다. 박 팀장의 길고 관능적인 검은 차는 소리 없이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떠난다고? 아하, 회사 말이구나. 아 맞다. 회사!’
진은 그 날 처음 지각을 했다.
박 팀장이 떠났어도, 진은 여전히 단칸 월세 방에 살고,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때우는 식의 점심과 설탕이 잔뜩 들어간 휴게실 커피를 마셨다. 박 팀장의 집 앞으로 찾아가는 것에 지쳐갈 때쯤, 회사는 도쿄에 자회사를 세우는 일에 실패했다. 여러 가지 추측들이 나왔지만, 그 중에서도 카더라 통신 지지자들의 믿음을 가장 많이 얻은 것은, 박 팀장과 김신유의 합작설이었다. 박 팀장은 김신유와 짜고 자신과 B팀의 조명 디자인을 도쿄로 보내고, 프레젠테이션이 호응이 좋자, 1차 계약을 하고, 보완의 실패인양 꾸며, 자신의 작품을 한국으로 들여오고, 그것을 우리 회사의 경쟁 회사로 거액을 받고 팔았다. 경쟁 회사는 박 팀장의 작품으로 도쿄에 회사를 세우게 되고, 이제 곧, 박 팀장의 브랜드가 탄생하게 될 거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합작설이 결국 크게 붉어지지 못하고 시들어버린 것은 한국으로 들여왔다는 박 팀장의 작품들이 어떻게 경쟁 회사에 들어가게 됐는지, 경로를 모른다는 것과 경쟁 회사는 도쿄에 회사를 세웠지만 그들이 내세운 작품은 박 팀장 것이 아니었다는 이유였다. 어느 것도 사실로 환영받지 못하자, 김신유와 박 팀장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둥, 김신유의 이모가 경영하는 술집에 박 팀장이 VIP이었다는 둥, 박 팀장이 대학 시절 김신유의 과외 선생이었다는 둥, 심심풀이 땅콩 같은 이야기만 계속 이어졌다.
“미스터 김. 박 팀장 하고 친했어?”
앞자리에 앉아 있는 이철오였다.
“네?”
“거 왜 그만 둔 박 팀장 말이야.”
“아니요. 왜요?”
“친했을 거라고 하던데...”
“누가요?”
“이런 얘기에 주인이 어디 있나? ‘왜 내 이름이 흘러나오고 있는 거지?’
진은 혼란스러웠다.
“박 팀장 집 앞에서 봤다던데?”
“누가요?”
“본 사람이.”
“심부...아니 안 친했어요. 잘못 봤겠죠. 제가 좀 평범한 얼굴이잖아요. 집도 모르는 걸요.”
“그래? 하여간. 쓸데없는 말들은. 거 이번에 김신유씨가 팀장으로 발령 난대. 들었어?”
“김신유씨요?”
“그래, 저기 앉아 있는..보이지?”
“예.”
사실은, 잘 보이지 않았다. 아니 잘 볼 수 없었다.
팀장으로 재발견된 김신유는 날카롭고 매서웠다.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기회도 점점 늘어났고, 진은 퇴근이 늦어졌다. 진은 점심을 먹고 나면 책상에 엎드려 자기도 했고, 회사에 큰 수건이나 손톱깎이를 챙겨오기도 했다. 김 팀장은 팀을 나눠 일주일에 한번 씩 회의를 했다. 디자인을 내고, 토너먼트 식으로 더 나은 디자인을 내놓을 때까지 프레젠테이션을 계속 했고 선택된 팀은 가산점과 동시에 인사고과점수에 반영되었다. 진은 단 한 번도 선택된 적이 없었다. 팀원들이 디자인을 내놓으면, “여기가 대학생 콘테스트 하는 곳인 줄 알아! 누구 생각이지?”라고 한 번에 자르거나
“우리 기술력이 가능할거라고 생각하나? 도대체 어느 머리에서 저런 생각이 나오는 거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누구의 생각인지 궁금해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요령은 있는데, 기본이 없네. 김진씨 생각인가?”
“효율성은? 김진씨 설명해 봐요.”
“그 디자인 유로루체. 2007년 밀라노. 그렇죠? 김진씨.”
하다가 “김진씨는 왜 여기에 입사했나요?” 라고 했다.
발표가 끝날 때 마다 사람들은 진의 어깨나 등을 두드려 줬고, 진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진이 속해 있는 팀은 번번이 탈락되었다. 진은 둘 중에 하나는 제정신으로 살 수 없겠다 싶었고, 이틀 동안 비가 이어져 눅눅해진 금요일 아침,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회의실에 모두 모이자 진은 손을 들었다.
“팀장님. 다음 발표는 저 혼자 해보고 싶습니다.”
“좋아요. 그럼 다음 발표는 A팀, B팀, 김진씨, 이렇게 세 팀으로 나눠서 하죠. 다음 발표는 각 분야의 클라이언트도 모십니다. 신경 써주세요. 그럼 오늘 준비해온 디자인부터 들어볼까요?”
자료를 읽고 있던 김 팀장은 시선을 그대로 박은 채 1초도 망설이지 않았으며, 언제나 그랬듯이 솔음으로 회의를 시작했다.
|
|
|
진은 일찍 일어났다. 출근길에서도 졸리지 않았고, 프레젠테이션 할 때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될 듯 했다. 시간은 익숙했지만 회사는 낯설었다. 뻐근한 뒷목을 좌우로 움직여보았다. 조용히 자리에 앉아, 저장된 파일을 불러와 마우스를 움직여 인쇄를 눌렀고, 차르륵 차르륵 자료가 한 장씩 포개지는 소리를 들으며 스테이플러를 찾았다.
“두고 봐. 오늘이다 너.”
종이를 겹치지 않은 채 스테이플러를 찍어보았다. 입을 다문 철찍개알이 툭 떨어졌다.
“일단, 이곳은 창이 없는 벽면입니다. 천장도 높은 편이구요, 유입되는 빛이 약할뿐더러, 기둥이 원목입니다. 은은한 조명을 사용해 원목의 입체감을 살리고, 그 그림자를 살려 또 다른 장식이 되게 할 겁니다. 장식이 많은 조명이 아니라, 이곳과 이곳에 깔끔한 조명으로 수를 놓을 생각입니다.”
“나쁘지 않네요. 대신 테이블 위에나 중앙에 비정형적인 조명을 배치하는 걸 생각해봐요.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저는 저희 회사 제품을 주로 소비하는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을 분석했습니다. 그것을 토대로 기술력의 변화 보다는 생활 속에 얼마나 자연스럽고 세련되게 각종 소품들과 어울릴 수 있는지 생각해, 만들어 봤습니다.”
“선을 그렇게 불규칙적으로 교차시킨 건 흔한 디자인 아닌가요? 차라리 비비드한 컬러로 포인트를 주고, 교차된 선에 볼륨을 줘서 바리에이션을 시켜보는 건 어때요? 수고했습니다. 다음, 김진씨.”
“저는 화려한 꿈을 나타내 봤습니다. 폴리카보네이트 필름 재질을 사용해서, 어떤 타임의 광원이라도 쉽게 소화가 되며, 여기에 구슬과 깃털로 재미를 더한다거나, 프리즘 타입의 빛들이 부담이 된다면, 골드 빛을 씌워 글래머러스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도 있죠.”
“화려한 꿈이라...불을 한 번 켜 볼까요?”
“네.”
딸깍. 스위치를 눌렀다. 그렇지만, 불은 켜지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눌렀다. 마찬가지였다.
“김진씨. 어떻게 된 거예요?”
“글쎄요. 분명히 어제 제가 끝까지 남아서 확인해 보고, 아침에 출근해서도 확인해 보고, 그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습니다. 연결선이 어떻게 된 건지...”
연결선은 가위로 자른 것처럼 깨끗하고 반듯하게 잘려져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건지, 그러니까 괜찮다가, 팀장님이 들어 오시자마자 제가 나갔고, 20분 후에 제가 사람들과 함께 들어왔으니까, 팀장님 혼자 이곳에..?” 진은 땀을 흘렸고, 목소리가 자꾸 떨렸다. 김신유는 말없이 한쪽 눈썹을 추켜 떴다.
“그러니까 팀장님께서 혼자 이곳에 계셨던 시간이 정확하게....” 진은 눈을 심하게 깜박 꺼렸고, 코로 숨을 쉬며, 스위치를 잡은 손을 벌벌 떨며 탁자위로 올렸다. 김신유는 진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철썩. 진의 뺨이 부어올랐다.
모든 것이 겨를 없이 연타
“제 명함입니다. 이상 있으면 연락 주세요.”
진은 계속 머리를 조아려 인사를 했다.
“젊은 사람이 초행길이면 조심을 해야지. 아이고, 머리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일단 이 돈 받고 아무튼 내 무슨 이상만 생기면 바로 전화할 테니 그리 알아. 재수가 없으려니까...”
재수가 없기는 진도 마찬가지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회사에 출근하는 편이 나았다. 새벽부터 김 팀장에게서 이철오씨 대신 출장을 가라는 전화가 왔었다. 부탁이 아닌 지시였다.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회사 차를 쓸 수 있도록 조치해 두겠다고, 그 외의 경비는 영수증을 첨부하라고 하더니, 중요한 고객이니 자료를 메일로 보내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를 찾는 건 어려웠다. 갑자기 쏟아지는 빗속에서 길을 찾는 건 더더욱 힘들었고 사람들도 눈에 띠지 않았다.
‘내비게이션도 없고... 도대체 어디야?’ 빗속에서 몇 시간째 같은 곳을 돌고 있던 진은 와이퍼의 굼뜬 동작도 짜증이 났다. 비는 점점 더 세차게 내렸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코너를 돌다가 트럭과 부딪혔다. 멀쩡하게 서 있는 트럭을 받았으니, 빼도 박도 못했다. 그 때 전화기가 울렸다. 고객이었다. 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트럭 주인을 돌려보내고, 고객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고객은 길길이 뛰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회사는 보나마나 뻔하다는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털어놓았으나,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고객인지 모르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화를 내시는 심정은 알지만 사고를 당했습니다. 이해해주세요.”
“이해고 저해고, 그럼 아까 전화는 왜 안 받은 거요?”
“제가 경황이 없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곧 찾아뵙겠습니다.”
진은 차에 시동을 걸었다.
“됐고, 김신유 팀장과 얘기하겠소.”
고객은 전화를 끊었고, 진은 동시에 차의 시동을 껐다.
비구름이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비가 그친 초록의 들판은 싱그럽고 신선했다. 이끼가 낀 바위를 닮은 산도 있었고, 햇빛을 머금은 산의 음영은 근사했다. 연하고, 진한 초록들이 반짝거렸고, 생명이 들어찬 나무들은 위풍당당했다. 이것을 등으로 만들면 바라보고만 있어도 기운이 솟아날 것 같았다. 고객이 원했던 것처럼.
‘나도 잘해보고 싶다고...’
고객에게 다시 사정을 해보기로 했다. 전화기를 찾았다. 갑자기 건조하고 환청 같은 벨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진의 머리 위에서 춤을 추었다. 김신유 팀장이다.
진은 휴대전화를 오래 바라보다 휴대전화를 뒤집어 차 시트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벨은 계속 울렸다. 멀리서 천둥이 쳤지만, 벨소리를 삼키진 못했다.
은갈치를 닮은 외제차에서 내린 그녀가 진의 앞으로 걸어오는 1분이 1시간 같았다. 언제 봐도 아찔한 그녀의 하이힐에 근심 없이 누워있던 흙바닥 곳곳에 볼우물이 패졌다.
“죄송합니다.”
그녀의 귀걸이와 팔찌가 쩔걱거리는 소리, 이번엔 어느 쪽 뺨일까?
“괜찮네요. 전화도 안돼서 많이 다친 줄 알았어요.”
“죄송합니다.”
“일은 마무리해야 합니다. 아시죠? 고객을 만나고 올 테니, 램프를 어떻게 만들 건지 정리해서 보고해주세요.”
“네.”
발 아래, 개망초 위에.
과하지 않은 솟을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아래 사랑채와 우측에는 작은 사랑과 그 뒤로 안채가 보였다. 두채의 별당이 보이고, 마당에서 보면, 담장이 꽃밭을 끌어 앉고 있었고, 담장에 가려져 안채의 방문이 반쪽 밖에 보이지 않았다. 담장을 따라 비비추와 물망초가 피었고, 봉선화 꽃이 바람에 흔들렸다. 주황색 빛깔의 원추리와 된장잠자리가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통통거리며 마당을 누비는 참새와, 잎을 편 단풍나무, 소나무가 제 몫의 공간을 더듬고 있노라니 먹구름이 슬슬 물러났다. 비에 씻긴 마을은 선명하고, 말갰다. 담장 곁으로 흐르는 도랑에는 개구리가 놀고 있었고, 분꽃과 능소화, 금잔화에 정신이 팔려 대책 없이 걷다보니, 남의 집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진은 재킷을 벗고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커다란 호박잎 곁에 콩꽃, 노란 키다리꽃과 도라지꽃이 어울려진 집은, 동화책에 나오는 사이좋은 오누이가 살고 있을 것만 같았다. 길을 따라 더 들어가니,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문 사이로 크게 자라난 옥수수가 보였다. 진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 마루에 앉아 보았다. 이곳의 옥수수는 하룻밤사이에 크게 웃자라 자신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기다리는 누군가에게, 그들이 원한 만큼 몸을 키워 자신을 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룻밤 사이에 옥수수가 다 자랐다면, 모두 믿지 않겠지. 현실에서 이뤄지면 끝내줄 텐데. 그런 거짓말 같은 빛이 나한테 한번 쫘악....캬, 그런 걸 삼켜야 되는데, 이번엔 잘못 먹었어.’
큰 새 한 마리가 천천히 그러나 느리지 않게 원을 그리며 날았다.
“들어볼까요?”
“마을에 있는 소품들을 이용하죠. 더덕이나 호박, 가지, 깨, 오이와 열무를 단순하게 형상화해서 만들면 어떨까요?”
“단순하게요?”
“아니면 토마토 모양 안에 불을 켜서 햇살을 담은 토마토의 모습이나, 알록달록한 벼, 보랏빛을 더한 산딸기 모양의 전구가 매달린 샹들리에로 판타지를 자극해서...”
“극적이고 드라마틱하게 표현하자?”
“그렇죠.”
“김진씨. 따라와요.”
김 팀장은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앞서서 걸었다. 그녀의 짧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꺼번에 쥐었다가 한 올 한 올 훑기를 반복했다. 애기똥풀이 자라는 골목을 다시 지나, 보라색 선인장 꽃으로 장식된 돌담을 따라 길이 좁아지는 곳 까지 들어서자 하얀 풍경이 펼쳐졌다.
‘아!’ 진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10m 남짓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눈부셨다. 새하얀 개망초 꽃들이 그득했다. 초록의 산을 배경으로 하얀 빛들이 땅 위에 머물러 있는 듯 했다. 뭉개지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로를 허락해 공간을 내주고, 보는 이가 없어도 계절에 충실해 다른 세상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흔한 들꽃이라고 하기엔 엄청나게 특별하죠. 저 꽃 중에 어느 하나라도 성격이 급하거나 더디거나 해서 먼저 꽃을 열고 닫았다면, 이런 광경은 볼 수 없었겠죠. 자신이 꽃이라는 걸 잘 모르고 있었어도 불가능 했을 거예요. 정직하기만 해도, 참 아름답죠.”
김 팀장은 뭘 알고 있을까, 아니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어디선가 목 밖으로 소리를 뱉지 못하는 산비둘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 글쓴이 : 이선아
- 1977년생, 숭실대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글 쓰고 책 읽기를 매우 좋아하며, 영화관에 혼자 가는 것을 즐긴다. 글 쓰는 직업을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있다. 현재 안동 MBC에서 구성 작가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