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이종암_책, 그 속으로 들다]고봉으로 퍼 담은 밥 같은 시
- 이종암
고봉으로 퍼 담은 밥 같은 시
-서숙희 시집『손이 작은 그 여자』(천년의시작,2010)-
서숙희 시인이 첫 시집 『그대가 아니라도 꽃은 피어』(혜화당,2000)를 펴낸 지 10년 만에 2시집『손이 작은 그 여자』(동학사, 2010)를 상재했다. 서숙희 시인이 과작(寡作)의 시인이라 하더라도 10년이라는 숫자에는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가 이번에 펴낸 시집 『손이 작은 그 여자』에는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곰삭혀 놓은 빼어난 시편들이 수두룩하다.
나는 몇 해 전, 서숙희 시인이 『시조시학』2008년 겨울호에 발표한 「여름 우포를 읽다」라는 시를 읽다가 너무 좋아서 지역 일간지에 그 시와 짧은 평설을 곁들여 소개한 적이 있다. 그것은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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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뭇 생명들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앉아서 누워서
칠십 만평이나 되는 거대한 젖가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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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우포늪을 아는가? 그곳에 가보기는 했는지. 경남 창녕군에 있는 우포늪은 약 1억 4000만 년 전에 생긴 70만 평 크기의 자연적인 늪이라고 한다. 자연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시인들이 우포늪을 찾아간 숫자는 아마도 수백 명에 이를 것이다. 나도 여러 번 찾아 가기는 했건만 시는 한 편도 얻지 못했다. 그를 보는 내 눈이 밝지 않았거나, 내 삶의 꼴이 곱지 않아서 그가 제 모습을 다 열어주지 않았음인가. 소설과 시조를 함께 쓰고 있는 포항의 서숙희 시인이 우포늪을 다녀가고 시조 한 편을 얻었다. 세 편의 연시조로 묶여진 「여름 우포를 읽다」가 그것이다. 서숙희 시인은 우포늪을 단박에 “깊고 너른 자궁”의 “저여자”라고 명명(命名)한다. 여자는 남자와는 다르다. 남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생명을 낳는 우주의 근원적 모습을 여자는 지니고 있다. 시인은 우포늪을 “세상에서 가장 편한 저 서식의 몸짓들”로 “세상의 뭇 생명들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여인이라고 진술한다. 그리고 “일억 사천만년 동안 마른 적 없었다”는 “칠십 만평이나 되는 거대한 젖가슴” 의 우포늪을 끝내 “도무지 읽어내지 못하겠네”라고 푸념한다. 아니다. 어찌 깊고 거대한 우포늪의 “저 서사”를 다 말하랴. 그것이 바로 시인이 ‘여름 우포를 읽다’는 표제에서 전하는 말씀의 참 뜻이리라. “지구의 자궁”으로서 우리 생명의 모태인 늪을 소중히 여기고 잘 간직해야 한다. 여름이 다가온다. 거대한 젖가슴, 깊은 자궁의 우포늪에 빠져보자. 여름 우포늪에서 나는 무엇을 읽어낼지?
서숙희의 새 시집 『손이 작은 그 여자』에는 앞서 인용한 「여름 우포를 읽다」를 비롯하여 표제시 「손이 작은 그 여자」 「그, 곰팡이」 「회룡포」 「남강」등과 같이 여성 특유의 섬세하면서도 “깊고도 둥글게 품는” “깊숙이 몸을 열”고 “살이 찢겨”야 볼 수 있는 여성성 혹은 모성의 시선으로 빚어진 시편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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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비워 두었다 돌아온 빈 식탁 위에 무심코 내버리려다
시간이 사위어 가는 텅 빈 공간과 맞서
무너지는 제 몸을 딛고 피워 낸 저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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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에 썩어 가고 있는 사과 한쪽에서 “존재에서 소멸로 가는” 삶의 진리를 묘파하고 있는 시인의 시선이 놀랍다. 시적 화자는 첫째 수에서 썩은 사과에서 곰팡이를 발견하고, 둘째 수에서는 그 곰팡이의 의미를 읽어내고 이어서 마지막 셋째 수에서 그것이 갖는 의미 즉 삶과 죽음의 존재론적 진리를 노래하고 있다. “깊숙이 몸을 열었다” “아름다운 경계다”라는 시구에는 죽음의 자리, 소멸의 자리를 기꺼이 끌어안고 있는 시인의 큰마음이 자리해 있다.
필자는 서숙희 시인이 “손이 작은 그 여자”인지 아닌지, 그가 지금 사랑을 잃고 슬픔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아니면 사랑을 얻어 기쁨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잘 모른다. 다만 시집 3부에 집중적으로 편재되어 있는 연시(戀詩)들을 보면서 지금 그가 도저한 사랑의 화상(火傷)을 입고 있음을 느낀다. “떠난 사람을 온전히 잊는다는 것은” “한 사람이 떠난 집은 사각의 부재다” “한 사람과 이별하고 돌아와 옷을 벗는다” “사랑아/그 창문 아직/굳게 닫혀 있는가” 등의 시적 표현이 별리(別離)의 아픔과 사랑의 상처를 안고 있는 그의 현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인용한 두 편의 시는 시적 표현이 너무 아름다워 독자에게 더더욱 슬픔을 안겨다 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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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쪽편지 오래오래 접은 손
진주라 남강이 저리 깊고 푸른 것은
내 안에 촉석으로 아프게 앉은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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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아름다워 더욱 슬픈 표제시 「손이 작은 그 여자」를 우리는 서숙희 시인 현재의 자화상(自畵像)으로 읽는다. 「손이 작은 그 여자」는 평시조 2수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수에서 중심이 되는 시어는 각 장의 맨 끝자리에 각운으로 놓여진 ‘손’이다. 그 손은 오래오래 접은 사랑의 편지 다 닳도록 건네지 못하고 깃털처럼 파닥이다 끝내 사랑의 날개가 꺾여 버린 것이다. 사랑하는 그대에게 끝내 건너가지 못한 손이다. 둘째 수에서 중심어는 각 장의 첫 음보 ‘그 여자’이다. 이 시를 소리 내어 읽다보니 사랑의 상처에 흘리는 눈물 다 닦지 못하는 ‘그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고 흐르는 눈물이 보이는 듯하다. 이보다 더 가슴 아픈 사랑시가 또 있을까? 그러고 보니 이 시에는 ‘손’이란 단어가 여섯 번이나 또 ‘그’라는 단어가 일곱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 거듭되는 그 반복적 사용이 시상 전개에 어색한 것이 아니라 오리혀 시적 화자의 서정의 물살을 더욱 깊고 푸르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남강」이라는 시 또한 「손이 작은 그 여자」못지않은 비련의 사랑시이다. 우리가 타 지역의 지명이나 사물을 제재로 시를 쓸 경우 여행지의 감상을 늘어놓는 단순 여행시로 머무는 경우가 많은데, 서숙희의 「남강」은 그렇지가 않다. 의기(義妓) 논개와 관련된 진주 남강의 촉석(矗石)의 이미지를 빌려와 시인의 내면적 서정을 돌올하게 그려내고 있다. “촉석에 살이 찢겨/그 흉터 삼키지 못한 채/몸만 퉁퉁 불”은 남강은 시인의 내면 감정이 투사된 객관적 상관물이다. 시조 첫 수와 둘째 수가 선경 후정(先景 後情)의 형식으로 구성된 이 시는 참으로 비극적인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시인은 사랑의 상징인 “이 천형”을 “이쯤서 그만 절명하듯 투신하라”고 한다. “내 안에 촉석으로 아프게 앉은 그대”와 시인 자신을 비유하고 있는 “차마 더 흐르지 못하는 푸른 울음”은 결국 모두를 향한 것이다. 이는 끝내 비극적인 사랑에 생을 놓아버리는 단말마의 비명이다.
서숙희 2시집 『손이 작은 그 여자』에서 필자가 특별히 주목한 것은 1부에 실려 있는「오월, 자전거를 타다」「늦여름 저녁」「천고마비의 시」「눈의 풍경화」같은 단시들이었다. 우리가 ‘시조다움’이라는 말을 할 때 여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 단시조일 것이다. 절제된 언어를 통한 함축적이고 간명한 시적 이미지로 그려내는 단시조에 서숙희 시인의 시적 솜씨가 한껏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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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잎쌈 고봉밥
둥두렷 열사흘 달
그득한 포만의 바다
씻을 것도 없는 파란 하늘 한 잎 따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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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숙희 시인 특유의 활달하고 거대한 상상력으로 만들어진「천고마비의 시」를 필자는 ‘그냥 좋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나도 “저, 잘 익은/가을 한 쌈”을 먹고 싶다. 또 고봉밥과 열사흘 달과 포만의 바다가 둥실둥실 흘러가는 저 늦여름의 풍경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람과(호박잎쌈 고봉밥을 먹은 나) 자연이(열사흘 달과 포만의 바다) 하나로 어우러진 저 풍경에 필자는 자꾸만 둥근 원, 거대한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 넣고 싶다. “달도 둥실 나도 둥실”에서 보듯 그 가락은 참으로 둥글게 굴러간다.
시인 서숙희는 그의 시에서 “그득히 고봉으로 퍼 담은/아, 밥 같은 시!/쓰고 싶다”(「밥 같은 시를 쓰고 싶다」부분)고 말하고 있다. 자신의 시론(詩論)을 대변해주는 시「시작詩作」을 보니 그와 같은 시를 그가 곧 쓸 것임을 우리는 확신하는 바다. 아니다. 그가 세상에 내놓은 새 시집『손이 작은 그 여자』에서 우리는 이미 “그득히 고봉으로 퍼 담은/아, 밥 같은 시!” 여러 그릇을 이미 받아먹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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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탄탄한 상처 쪼아 주춧돌로 놓아두고
무량의 맑은 율 허리 풀고 노니는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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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이종암
- 1965년 경북 청도에서 출생하였고, 영남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를 졸업하였다. 지금은 포항 대동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1993년『포항문학』으로 등단하고, 시집으로는『물이 살다 간 자리』, 『저, 쉼표들』, <몸꽃>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