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송성일_마을 길 걷기, 지역의 삶과 문화]이른 봄날, 운곡천을 걷다
- 송성일
이른 봄날, 운곡천을 걷다
▲ 운곡천
사방에서 우후죽순처럼 초록이 터져 나와 봄빛이 완연하던 날, 비나리마을의 새 주민이 된 와우네, 산이네, 그리고 저희 부부가 함께 운곡천을 걸었습니다. 삼동 가는 국도의 다리 아래 있는 명호정미소 앞에서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나중에 오는 가족들을 기다렸습니다. 약속시간인 오전 10시가 넘어도 오지 않는 사람들에게 확인전화를 하고 운곡천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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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호양어장 연못 |
▲ 운곡천의 비경 |
국도가 지나는 콘크리트 다리를 벗어나자마자 운곡천은 원시의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반깁니다. 두 사람이 겨우 걸을 수 있을 정도의 흙길과 큰물이 나도 다 받아줄 것 같은 넓은 물길이 나란히 흐릅니다. 헤살거리는 물길이 만들었을 모래밭에 갈대가 자라고, 길과 산이 만나는 언덕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오랜 세월동안 흐르는 물굽이를 지켜보았을 굽은 소나무 두어 그루가 서서 강을 내려다봅니다. 강바닥에 누워있는 형형색색의 자갈들이 아침햇살에 잠에서 깨어나고, 밤새 숨죽이고 있었을 강물이 이윽고 소리 내어 흐르기 시작합니다. 물길은 산을 피해 강을 열었지만 미처 제 무거운 몸을 피하지 못한 바위는 오랜 세월 물살에 씻겨 새 얼굴을 얻었습니다.
▲ 뭉크의 절규
무심코 지나던 제 발길을 잡은 것은 동행의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절규다” 물살은 세월과 함께 뭉크의 〈절규〉를 창조했습니다. 아니면 뭉크가 〈절규〉를 그리기 전 이 바위를 지나갔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저의 상상의 나래는 끝없이 펼쳐졌습니다. 세상의 어떤 예술작품보다 훌륭한 것은 자연의 아름다움입니다.
운곡천의 아름다운 매력에 흠뻑 빠져 어느새 그 강에 사는 이름 모를 물새가 되어 세상을 바라봅니다. 문명의 이기라는 세상의 온갖 편리함을 다 누리면서 그것도 모자라 원시의 자연마저 독점하려는 인간의 욕심은 정말 끝이 없습니다. 생태계를 원시상태로 그대로 남겨두면 안 되는지 사람의 손을 대서 ‘생태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도시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만으로 청정한 산하를 온갖 폐기물을 매립하는 장소로 사용합니다.
한 때 강을 따라 사람들이 살았고, 지금은 그 흔적만이 남아 간혹 찾는 사람을 반기고 있지만, 이 아름다운 운곡천에 언제 개발의 삽질이 시작될까 두렵습니다. 물살이 강을 열고 강을 따라 사람들이 살게 되면서 길이 생기고, 그리고 그 길을 걸어 사람들은 문명의 편리함을 쫓아 도시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언제 개발이란 미명 아래 또 다른 우리가 이곳 운곡천을 점령할 지 아무도 모릅니다. 얼마 전 산업폐기물 처리장을 건설하려는 것을 지역주민들이 합심하여 저지했지만, 자본의 힘은 강하고 그 생명은 끈질겨 언제 운곡천에 다시 개발이 시작될지는 알지 못합니다.
길을 걷기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처음 민가를 만났습니다.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남겨놓은 채 외출중인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하고, 그 집 마당을 가로질러 계속 가던 길을 걸어갑니다. 주인 없는 집 마당 한편에 있는 물웅덩이에는 맑은 하늘이 비추고 온갖 모양의 구름들이 장난스런 표정으로 떠다닙니다. 이렇게 운곡천을 따라 걷다보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터전도 마주치지만 오래 전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들도 만나게 됩니다.
▲ 폐가에 뒹굴고 있는 항아리
지금은 사람이 살던 온기가 사라지고 세월의 풍화를 견디지 못해 쓰러져 가는 폐가가 우리를 맞아줍니다. 잡초가 무성한 마당 한구석에 뒹굴고 있는 세간들이 퇴락해가지만 한때는 저 지붕 아래 오순도순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가던 사람들이 있었겠지요. 저 지붕아래에서는 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리고, 어머니가 끓인 된장국 냄새가 해지는 하늘로 피어올랐겠지요. 그리고 온종일 밭을 갈다 돌아온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겠지요.
▲ 운곡천 걷기의 난코스
농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운곡천이 지나는 이 좁은 골에서 그분들은 어떻게 살아갔을까 궁금했는데 강에서 멀지않은 곳에 금광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몇몇 폐가만이 이곳이 한때는 금을 쫒아 들어온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제 그 사람들은 떠나고 깨진 항아리만 뒹구는 그 집 마당에도 봄 햇살이 가득했습니다. 몇 사람들에게는 식량을, 또 몇 사람들에게는 부를 가져다주었을 금광의 자취가 남아있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몇 년 전 운곡천이 폐광의 침출수로 인해 중금속오염으로 오염되자 많은 예산을 들여 침출수 방지 처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폐광의 흔적은 다 사라지지 않고 곳곳에 아직 그 흔적이 남아있었습니다. 돌을 갈고 금을 모았을 기계들은 이젠 쓸모없는 무쇠덩어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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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피리요술피리에서 |
▲ 나무염소 |
강을 따라 길을 걷기 시작한지 두어 시간 만에 사미정 계곡 근처에 도착했습니다. 사미정 계곡에 있는 바위 위에서 준비해온 김밥을 먹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난 뒤 자칫하면 발을 헛디뎌 강물에 빠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길을 걸었던 것은 힘들었지만 멋진 경험이었습니다. 강은 사라졌던 길을 이어주고 길을 되찾은 우리의 발걸음은 빨라졌습니다. 그러다 우리는 잠시 그 길에서 벗어나 '나무피리요술피리'농원에 들렀습니다. 갑자기 들이닥친 우리를 주인인 조성용 김연희 부부는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맛있는 차를 마시면서 지역문화인의 삶에 대해, 그리고 이들 부부의 '음악정원 만들기'계획 등을 화제로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음악정원'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시끌벅적해질 그날을 기다려봅니다. 기념사진을 찍고 '나무피리 요술피리' 음악정원을 떠나 다시 걷던 길로 돌아와 계획했던 일정을 마무리했습니다.
▲ 버스정류장
사미정을 지나 사미정계곡 입구에서 버스정류장에 도착해보니 오후 4시 40여분. 농사일로 한창 바쁜 어르신께 버스 시간을 여쭤보니 곧 도착할 버스가 명호로 가는 차인지는 알 수 없답니다. 오늘 함께했던 시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땀이 식어 한기가 느껴졌습니다. 그 무렵 버스가 도착했지만 목적지와 반대방향인 춘양으로 가는 버스였습니다. 결국 농사일에 한창 바쁠 이웃 청년에게 도움을 청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온 버스가 명호로 간다기에 올라탔습니다. 버스에 타고나서 전화했지만 그 청년은 이미 사미정 계곡 근처까지 왔다는군요. 운곡천 강변을 따라 걷는 것으로 보낸 하루는 이웃의 따뜻한 정과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한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산을 비켜 강이 생기고 세월을 겪으며 강줄기를 넓혀왔을 운곡천을 따라, 봄바람 맞으며 이웃과 걸었던 그날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입니다.
** 코스안내
※ 봉화군 명호면 청량산을 등반한 후 청량산이나 명호면 소재지에 있는 민박집에서 하루를 묵은 후, 명호면 도천리 삼동다리 밑에서 운곡천 길 15km(약 3~4시간 소요)를 걷다보면 사미정에 도착한다. 명호에서 출발한 경우 35번 국도를 따라 15km(약 4시간)에 이르는 삼동 고갯길을 지나 출발지로 되돌아온다.
※ 가볍게 걷고 싶은 사람은 사미정 계곡 입구까지 걷고 나서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나 택시를 타거나,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명호로 돌아온다.
※ 차를 이용하지 않고 걷고 싶은 경우, 명호에서 사미정까지 걸은 뒤, 다시 춘양까지 10km(2시간 소요) 걷고 나서 춘양면 소재지를 둘러보고 만산고택이나 민박집에서 하루 묵고, 다음 날 태백으로 이어지는 외씨버선길을 걷는것도 좋다.
- 글쓴이 : 송성일
- 경남 진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십대를 끝낼 무렵 이주하여 서울 인근에서 삼심대 중반까지 살았다. 12년 전 봉화군 명호면 비나리마을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며, 지역 공동체와 문화, 농업과 새로운 가치를 일굴 길을 찾고 있다. 현재 비나리정보화마을, 녹색체험마을의 실무를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