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임은혜_연극으로 만나는 세상]연극을 살찌우는 공동체의 힘
- 임은혜
연극을 살찌우는 공동체의 힘
초현실로의 진입
동물들이 이동한다. 도심을 가로질러 서울 여의나루 한강을 옆에 끼고 활보한다. 땅속 깊이 잠들어있던 거대 지네가 깨어나 온몸을 꿈틀거리며 포효한다. 펭귄들이 지구를 들고 걷는다. 물고기들과 새들도 함께 간다. 그 뒤로 죽은 소를 등에 짊어 메고 가는 농부들과 한 무리 소들이 보이고 서울 구로(九老)의 마을지킴이 아홉 노인과 대지의 여신이 이들을 바라보며 뒤따라간다.
전쟁과 폭력, 인간의 탐욕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지구를 치유하고자 성스러운 물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 순례자들… 슬프고도 엄숙한 발걸음, 때로는 경쾌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얼굴들, 갖가지 색깔의 순진무구한 인형들이 거리에 서있는 구경꾼들을 순례 행렬에 동참시킨다.
그들과 함께 도착한 곳은 성스러운 물이 있는 곳이다. 펭귄들이 탈난 지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병에 걸린 소들이 일제히 쓰러지고 농부들도 죽은 소들 곁에 쓰러져 죽어간다. 검게 그을린 대장장이들이 불 칼과 불 포이로 정화의 춤을 춘다. 지구를 뜨겁게 달구고 있던 탐욕, 전쟁, 오만, 구제역 등의 역병들이 타들어간다. 이들의 불은 현대문명의 생활 속에서 상실한 순수하고 순결했던 마음을 원초적인 상태로 정제하려는 연금술사의 의지를 연상시킨다.
물의 정령들이 죽어가는 생명들에게 성스러운 물을 뿌린다. 대지의 여신이 다가와 죽어있는 소들과 농부들, 그리고 앓고 있는 지구를 보듬어준다. 죽었던 소가 꿈틀거리며 일어서기 시작한다. 쓰러져있던 지구도 세워진다. 구름 가득한 서울 하늘에 세워진 지구 꼭대기에 유토피아를 부르는 솟대가 서 있고, 그 밑으로 지구의 치맛자락 같은 오색 끈이 펼쳐진다. 풍물패의 연주와 함께 푸르른 옷을 입은 소년 소녀들의 길쌈놀이가 시작된다. 지구를 식혀야한다는 열망들이 오색 끈에 엮여져 지구를 더욱더 견고하게 세워낸다.
이 거리공연은 2011 하이 서울(Hi Seoul) 페스티벌의 공식 초청작 「지구를 식혀라」이다. 동물들과 마을 지킴이, 대지의 여신을 나타내는 거대인형과 탈들은 인간의 탐욕과 오염으로 뒤범벅된 현실의 땅 위에 성스러운 물이 있는 곳, 영성으로 충만한 초현실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도시의 일상은 멈추어지고, 새롭게 창조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연극은 죽음과 씻김이라는 제의를 진행한다.
등장하는 날짐승과 물고기, 땅속의 벌레들과 가축들은 모두 영성이 깃든 존재들이다. 지구라는 거대한 유기체 안에 노니는 모든 생명들은 각자의 영혼으로 노래한다. 지구는 오로지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고, 사람에게 영혼이 있듯이 소와 물고기와 새들에게는 물론 나무와 돌에도 순결한 영혼이 있다고 속삭이는 것 같다. 죽은 농부가 소가 되어 다시 일어선다. 탈과 거대 인형 안에서 이들을 정성스럽게 움직이는 공연자들 모두가 대자연의 소중한 자식들이며 지구의 주민이라는 일체감으로 초현실의 세계를 노니는 듯 했다.
공동체 없이 축제는 없다.
나무닭움직임연구소(이하 나무닭)가 200여 명 가량의 시민 참여자들과 진행한 이 환경연극(Environmental theater) 퍼레이드 공연은 서울 구로지역과 청송 지역의 주민들이 함께 일궈온 공동체 문화예술 활동의 성과물이다. 약 5년 동안 꾸준히 장다리(Stilt)와 저글링 등의 공연예술놀이를 익혀왔던 청소년들과 그들의 어머니들이 이번 공연에 대한 연습과 책임을 함께 맡으면서 공동체의 자유, 기쁨, 우애로 충만한 축제의 원형을 실현하려고자 했다.
나무닭은 이 작품에 ‘참여형 열린 구조의 축제극’이라는 이름의 형식을 부여하면서 기존의 구성원 외에도 환경연극 퍼레이드 공연 ‘지구를 식혀라’에 참여를 원하는 서울 시민들을 모집했다. 축제가 진행되는 5일 동안, 70여 명의 개별 신청자들이 퍼레이드 인형 워크숍에 참가하여 인형을 만들고 움직임 연습을 하면서 퍼레이드 공연을 준비했다.
그동안 같이 놀아보지 못했던 할머니와 아이들이 새를 만들어 날리고, 일만 하던 아버지가 아들딸과 함께 바느질을 하면서 커다란 지네 인형을 만든다. 경제력, 학력이라는 괴물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서 오랫동안 갇혀있던 놀이의 에너지가 분출된다. 그리고 축제의 공연자로 거리에 서던 날, 또 다른 공동체의 창조물들과 더불어 살아있는 행위이자 작품으로서의 축제를 온몸으로 누린다. 축제는 놀이와 환상을 위해 시간과 공간을 해방시킨다. 고독한 익명성 가운데 평범하고 보잘 것 없어 보였던 사람들이 축제의 창조자가 되어 침체된 도시의 거리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공동체 없이 축제 없고, 축제 없는 공동체가 없다고 했다. 환경연극 퍼레이드 공연 ‘지구를 식혀라’는 전문 연극집단의 힘만으로는 결코 해낼 수 없는 작업이다. 예술가와 청소년, 지역주민, 문화 활동가들의 협력 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축제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공동체의 힘은 시간과 비례한다.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유대감을 갖고 동질의 문화를 공유해왔는가, 그 공동체의 삶 속에 얼마나 놀이가 살아있고 문화예술에 대한 열망이 넘쳐나고 있느냐가 공동체의 힘을 좌우한다.
5년 전, 서울 구로 지역에서 ‘우둥불 공연예술놀이터’라는 이름의 지역문화예술 사업을 시작하며 만난 아이들이 놀이 공동체를 이루어 지역의 문화일꾼으로 성장하고 있고, 이 아이들이 이번 공연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아이들은 ‘우둥불 공연예술놀이터’를 ‘우둥불 축제’라는 이름으로 바꿔 부르자고 제안한다. 놀이의 일상성을 좀 더 확장시켜서 지역 공동체의 문화예술축제로 승화시켜내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4년 전, 이곳 청송에 내려와서 우둥불 공연예술놀이터의 모델을 청송 지역의 청소년들과 시작한 것이 ‘청송 공연예술놀이터’이다. 매주 토요일마다 장다리를 익히고 저글링과 인형극도 하면서 공연예술 활동을 했다. 한두 번 하고 그만두는 체험활동이 아니라 공연 예술에 대한 기술을 일상적으로 익히고 지역의 문화행사에서 공연도 해왔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머니들도 인형극 작업을 하면서 문화예술 공동체를 만들어냈고, 이들 역시 서울공연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데 있어서 큰 몫을 해냈다.
나는 이들을 ‘놀이 공동체’라고 부른다. 놀이 공동체, 그들의 삶속엔 놀이와 공부가 함께 있고 노동과 예술이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현실과 허구의 세계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언제든지 현실의 세계에서 초현실로 진입할 수 있고, 어디에서든지 놀이와 축제를 조직해낼 수 있으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창조자로 살아간다.
예술과 삶의 일치, 혁명과 축제의 일치를 주장했던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바쿠닌(Mikhail Aleksandrovich Bakunin)은 천재적인 예술가는 민중으로부터 창조적인 힘을 얻을 때 풍요롭다고 했다. 우리의 연극도 공동체에 의해 수혈을 받고 살찌워진다. 공동체 없는 연극, 공동체 없는 축제는 아무리 화려하게 치장하더라도 부서지기 쉬운 모래성일 뿐이다.
- 글쓴이 : 임은혜
- 극작가, '나무닭움직임연구소'는 청송군 청송읍 송생리에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