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송성일_마을 길 걷기, 지역의 삶과 문화]세상을 등진 마을, 거무실을 걷다
- 송성일
마을 길 걷기
세상을 등진 마을, 거무실을 걷다
모처럼 쉬는 날, 아침부터 집안이 분주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마음이 움직여 아내에게 거무실마을을 걷지 않겠냐고 물었습니다. 아내가 흔쾌히 받아들여준 준 덕분에 강 건너 마을 거무실을 걸으러 가기 위한 준비로 부산한 것입니다. 아내는 과자와 밀감, 그리고 마실 물을 챙깁니다. 저는 햇볕이 따사롭고 전망이 좋은 마을길 어디쯤에선가 배낭을 벗고 우리 부부가 마실 원두커피를 내립니다. 두 사람이 반나절을 걷기위한 위한 준비치고는 배낭이 불룩합니다. 늦은 아침, 살을 에는 추위가 한낮의 햇살에 조금 누그러들자 준비한 배낭을 메고 아내와 둘이서 집을 나섰습니다. 이런저런 핑계로 오랫동안 떠나지 못한 마을길 순례를, 이번에는 사전 계획도 없이 갑자기 나선 것입니다.
▲ 옷갓재에서 내려다 본 비나리마을
거무실은 비나리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 중의 하나입니다. 비나리마을 버스 정류장에서 35번 국도를 따라 안동 쪽으로 오백 미터 쯤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초방산에 가는 오르막길이 나옵니다. 바로 그 반대편 강 건너 보일 듯 말듯 한 골짜기에 숨어있는 마을이 있습니다. 마을이라고 해봤자 국도에서 건너다보이는 집들은 두어 가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나리마을에 터 잡고 살아온 십 수 년 동안 안동과 비나리마을을 오가는 길에 늘 바라보던 마을입니다. 저 마을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까, 어떤 사연을 간직하고 있기에 저 깊은 산 속 마을에 살고 계실까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꼭 한번 가봐야지 생각해왔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오늘에야 오게 된 것입니다.
세상이 다 바뀌어도 변하지 않을 것 같던 거무실에 몇 년 전 전기가 들어갔습니다. 언론은 이제껏 전기 없이 살던 마을이 세상에 있었다고, 그리고 드디어 전기라는 문명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고, 거무실 마을 주민들보다 더 호들갑을 떨며 TV에 방영하고 신문지면에 실었습니다. 언론을 탄 덕분에 외부에 알려지게 된 거무실이지만 직선거리로 따진다면 그렇게 외진 마을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은 낯선 사람의 발길을 가로 막고 있고, 마을 뒤편은 청량산의 한 자락인 문명산에 둘러싸여, 차로는 물론이고 걸어서도 접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덕분에 거무실은 세상으로부터 숨겨진 마을로 남아 있습니다.
집을 나선지 10분 만에 비나리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옷갓재를 넘습니다. 일부러 걷기 위해 나서지 않으면 내가 사는 마을안길조차 내 발길이 닿을 일이 없습니다. 차라는 문명의 이기덕분에 하루에도 서너 번씩 넘을 있는 옷갓재지만, 일 년이 지나도록 단 한 번도 간 적이 없었습니다. 그 옷갓재를 걸어서 넘는 것만으로도 신이 납니다. 옷갓재를 넘어서니 몸은 벌써 걷기에 적응한 듯합니다. 추위에 웅크렸던 몸이 풀리고 등짝에 열기가 느껴집니다. 상쾌한 기분으로 비나리마을을 내려다봅니다. 오른쪽으로는 풍락산 아래 호장골에서 터를 잡아 내려오는 웃마가 한 눈에 들어오고, 왼편으로는 멀리 낙동강과 접해있는 마을의 입구인 비나리거리가 보입니다.
찬바람이 가득한 겨울아침, 비나리마을을 두 눈에 가득 담아 돌아섭니다. 옷갓재를 내려서자 확 트인 시야에 고계리와 낙동강이 들어옵니다. 비나리에서 서쪽방향으로 영양 쪽으로 뻗은 918번 지방도를 따라 형성된 고계리는, 청량산과 황우산이 만나 이루어진 골을 따라 형성된 마을입니다. 1,2리를 다 합쳐 100여 가구에 지나지 않지만, 밭둑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버려진 고인돌은, 고계리가 수천 년 전부터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아온 유서 깊은 마을임을 말해줍니다. 황우산과 문명산, 그리고 그 산들이 만나 형성된 계곡을 흐르는 지류와, 낙동강이 만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마을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 풍광에 취해있다 보니 어느새 옷갓재를 내려서있습니다. 국도를 따라 명호면 소재지 쪽으로 방향을 잡고 다시 오른쪽으로 틀어 고계다리를 건넙니다.
다리 난간에 기대서서 멀리 남쪽을 바라봅니다. 저 멀리 비나리거리 쯤에서 강줄기는 산자락에 묻히고, 강을 따라 달리는 국도도 꼬리를 감춥니다. 얼어붙은 강 풍경에 잠시 마음을 빼앗겼다가 이내 발길을 고계리 마을로 돌립니다. 도로를 벗어나 마을 안길로 들어서 걷다보면 마을을 관통하는 길이 나옵니다. 부락이 끝나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틀어 산길로 접어듭니다. 초입새는 쭉쭉 뻗은 낙엽송이 서있는 산길입니다. 헐벗은 낙엽송을 지나 걷다보니 숨이 가빠지고 허벅지가 뻐근해지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마을을 벗어나 30분쯤 산길을 오르다보면, 정상으로 난 가파른 비포장 길과 오른쪽 강 쪽으로 나있는 오솔길로 갈라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가파른 산길에는 언제 지나갔는지 모를 차바퀴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산이 깊어질수록 그 길마저 사라집니다.
매서운 추위가 살을 에는 한겨울에도 등에 땀이 흐를 만치 걷다보면, 그 길 끝에서 민가를 만날 수 있습니다. 민가는 옛 농가의 형태를 그대로 살려 황토벽돌로 벽체를 세우고, 지붕을 손본 지 얼마 되지 않은 새집입니다. 누군가 세상이 싫어 이 깊은 산속에 집을 짓고 살고 있는가 싶기도 하고, 어쩌면 옛 고향집을 꾸며 간혹 들러서 쉬어가는 집 같기도 했지만 아무리 불러 봐도 주인은 나오지 않고 빈 마당엔 겨울바람만 가득합니다.
올라갔던 길을 되돌아서 강 쪽으로 갈라진 오솔길을 따라 다시 걷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첩첩산중이지만 그래도 가는 길목마다 지금은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폐가들을 만날 수 있고, 잘 손질된 잔디로 덮인 무덤들이 살아있는 사람을 대신해 낯선 사람을 반깁니다. 주인을 모르는 무덤가에 앉아 멀리 보이는 비나리마을을 바라봅니다. 커피를 마시면서 낯선 사람을 만나 어리둥절한 무덤 속 주인에게 말을 건네 봅니다.
‘어르신요. 당신의 삶은 어떠했니껴? 편안하시고 행복한 삶이었니껴? 험난한 시대에 팍팍한 삶을 사시진 않으셨니껴?’
세상의 무덤들은 거의 비슷한 대답을 들려줍니다.
“뭐 사는 기 별건가? 아등바등하지 말고 비우고, 즐기고, 베풀어라. 더 이상 뭐가 있겠노?”
▲ 고계리에서 바라다 본 비나리 옷갓재 가는 길
무덤가에 퍼질러 앉아 한없이 쉬고 싶은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웁니다. 그리고 다시 풀숲을 더듬어 없는 길을 만들어 걷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30분쯤 더 걷다가 이쯤해서 포기하고 돌아서야지 하는 마음이 들 무렵, 그리도 가보고 싶었던 거무실 아랫마을이 눈에 들어옵니다. 옛날 살던 사람들은 다 떠나고 이제는 두어 집이 남아 동네를 지키지만, 가파른 산 능선에 위태롭게 서있는 대추나무와, 겨울 찬바람에 말라비틀어진 고추대궁이 겨울 햇살을 받으며 서있습니다.
▲ 가파른 산자락 아래 계곡속에 숨어 있다 모습을 드러낸 거무실
폐가 두 채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는 두어 채의 집이 전부인 마을에는 인기척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고, 낯선 사람을 반기는 강아지 한 마리조차 없습니다. 대기조차 얼어붙는 한겨울을 나뭇가지를 분질러 집과 몸을 데우고 나기가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집주인은 겨울을 나러 떠나고 거무실에는 문명산의 신령한 기운만 가득합니다. 문명산 자락이 모은 빗물이 지나는 거무실 계곡은, 도연명이 찾던 무릉도원이 아니었을까 싶을 만치 선계를 닮아있습니다. 큰물에 씻긴 집채만 한 바위가 모여 계곡을 이루고 그 바위를 비켜 고샅길이 나고 집터가 이어집니다. 물은 바위를 비켜 흐르고, 그 물을 비켜 길이 이어집니다. 사람과 자연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거무실 마을은 계곡과 집, 바위와 물과 길로 이루어진 신선의 세계입니다.
골이 깊어 해가 일찍 떨어지는 거무실 계곡에 문명산 그늘이 드리워지자 제 마음은 바빠집니다. 서둘러 계곡을 벗어나 낙동강 근처까지 와서 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간 다음 고계리에서 다리를 건너 비나리마을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쉬운 마음으로 거무실을 한 번 더 바라보고 언젠가 다시 오리라 다짐합니다. 계곡을 이루는 바위 위에 준비해간 소박한 밥상을 차려놓고 오늘은 만나지 못했던 거무실 사람들과 잔을 기울이며 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고 싶기 때문입니다. 거무실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불편함에 기대어 주관적 희망을 투사하는 저 자신의 이기심이 부끄럽지만 그래도 거무실 마을이 지금 모습 그대로 남아있기를 기원합니다.
거무실 계곡을 빠져나오니 얼어붙은 낙동강에 반사되어 비추는 하얀 햇살에 눈이 부십니다. 강은 얼음으로 뒤덮여있지만 강의 중심에 남아있는 물살이 쉽게 도강을 허락하지 않을 듯이 보입니다. 갈대를 헤치고, 강가를 벗어나 관목 숲을 헤쳐 길을 내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우리의 바쁜 걸음을 따라 낙동강과 강 건너의 35번국도도 발을 맞춰주는 것 같습니다.
* 비나리마을에서 거무실까지 왕복 10km정도지만 일부구간은 난코스이다.
* 소요시간은 4~5시간이면 충분하다.
* 거무실마을 도착 후 낙동강을 따라 북상, 고계 다리에서 강을 건널 수 있지만 비나리마을 앞 구간에서 강변을 따라 지나기에는 어려운 코스가 있다.
* 고계리에 차를 세워두고 걷기 시작하면 넉넉잡아 3시간이면 거무실 마을길을 돌아볼 수 있다.
- 글쓴이 : 송성일
- 경남 진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십대를 끝낼 무렵 이주하여 서울 인근에서 삼심대 중반까지 살았다. 12년 전 봉화군 명호면 비나리마을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며, 지역 공동체와 문화, 농업과 새로운 가치를 일굴 길을 찾고 있다. 현재 비나리정보화마을, 녹색체험마을의 실무를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