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백소애_쑤세미의 골방에서 만화읽기]지하철 2호선 풍경 스케치, 최호철의 이야기 그림 <을지로 순환선>
- 쑤세미
▲ 《을지로 순환선》/ 최호철 / 거북이북스
문득 옛날 드라마가 생각난다. 최진실, 박상원, 차인표가 출연한 <그대 그리고 나>라는 드라마에서, 가수가 되고 싶은 그 집 막내딸에게 갓 제대한 오빠의 후임병이 딴에는 환심을 사고 싶어 이렇게 얘기한다.
“제가 지하철 2호선에 있는 학교에 다니잖아요.”
그러자 영덕 촌에서 상경한 막내딸은 잠시 2호선 노선도를 떠올리곤 이렇게 말한다.
“아, 낙성대요?”
사실 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서울의 지하철 노선도나 지하철 문화에 대해 잘 모른다. 공단밀집지역이 있는 몇 호선을 타면 블루칼라들이 많다느니, 또 은행과 증권가, 대학교가 많은 몇 호선은 화이트칼라와 대학생들이 많이 탄다는 것은 물론, 휴가 나온 군바리 친구가 깜빡 잠든 새 3시간을 돌았다는 을지로 순환선이 지하철 2호선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사실조차도 말이다. 자연 지하철 2호선에 위치한 서울대나 연세대, 홍대, 한양대를 모르니, 강감찬 장군의 생가터 낙성대를 외치는 막내의 멘트에 곧바로 웃지 못 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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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의 고단함에 소음은 자장가로 세상은 베개가 된다. |
을지로 순환선은 1984년 완성되어 본격 지하철 순환시대를 열었다. 당시 기본 운임이 110원이었으니 지금의 10분의 1정도 수준이었다. 서울 지하철은 이제 9호선에 경춘선, 경의선, 공항철도까지 복잡한 혈관처럼 촘촘히 엮여있다. 그 가운데 선풍기 날개 돌듯 돌다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갔다 쏟아져 나오는 을지로 순환선은, 이용객이 제일 많은 구간 중 하나이다. <을지로 순환선>은 서울 신촌에 소가 누워 있는 모양의 산이라는 와우산 아랫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 최호철의 생활반경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이야기 그림책이다. 김홍도가 조선의 장터, 대장간, 주막, 서당, 길쌈놀이 등의 풍속화를 통해 조선을 보여준 것처럼, 최호철은 서울 지하철 2호선 주변 사람과 도시 풍경을 세밀히 스케치했다.
‘풍속도’의 사전적 의미가‘그 시대의 세정과 풍습을 그린 그림’이라는데, 최호철은 전철 창밖으로 보이는 빌딩과 달동네, 낡은 지붕과 슈퍼, 장독대 옆에서 빨래 너는 여인과 아이를 업은 새댁, 이발소와 목공소 풍경 등과, 지하철 안 성경책을 들고 떠드는 남자, 후줄근한 작업복을 입은 사내, 벽에 기댄 외국인 노동자, 신문 보는 노인, 지쳐 잠든 사람을 그려낸다. 소음이 가득한 지하철 내부 풍경과 창밖의 평온한 풍경이 합쳐져 그림은 동적인 동시에 정적이다. 안과 밖은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다. 서민들의 대표적 대중교통수단인 지하철은, 수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사연을 안고 각자의 목적지로 향한다.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은 이곳 지하철에서 잠시 긴장을 이완시킨다.
작가 최호철은 가수 정태춘의‘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들으며, 노래 속 익숙한 공간의 이미지를 그림으로 살려보고 싶어 그리기 시작한 게 <을지로 순환선>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도시 풍속화를 그리는 그답게, 진경산수의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피터 브뤼겔과 반 고흐를 좋아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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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꾸물꾸물 구름이 있으니 기왕 나온거 다음 비를 기다려 보자. |
와우산과 동네 뒷동산, 성남 모란시장, 버스 정류장, 개업 풍경, 도서관, 3월의 초등학교 앞 등 생활 속 풍경을 다룬 제1장 우리 사는 풍경을 시작으로 버스기사 아저씨, 가판대에서 엎드려 잠든 아줌마, 비정규 노동자, 배관 공사 노동자들, 우산 장수, 포장마차 등 도시 노동자들의 모습을 다룬 제2장 일하는 사람들, 수요집회와 대추리 풍경, 고 김선일 씨의 고향과 분쟁의 현장을 다룬 제3장 큰 세상, 작은 목소리 등으로 이어지는 그림은 한편의 다큐를 보는 것처럼 잔잔하고 때로는 덤덤하게 또 때로는 애잔하게 스케치되어 있다. 포장마차 백열등 아래서 소주잔을 기울이는 사람들, 문 안 닫고 버틴 게 어디냐며 서로를 위로하는 영세공장 노동자들의 모습이 담긴 그림책은 불편한 현실을 담백한 펜 터치로 그려내고 있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니 언 겨울 언 땅에 언 엉덩이를 붙이고 복직과 최저임금 준수를 외치는 홍대 청소노동자들이 오버랩되었다. 장애인과 이주 노동자, 비정규직, 아이와 노인, 이 사회의 약자들이 탄 버스가 더 이상 내리막길로 가지 않기를 바라는 작가의 염원은 그림 한 장으로도 충분히 전달된다.
<을지로 순환선>은 인간의 혈관처럼 도심을 순환하는 서민의 지하철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스케치해내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녹아나는 작품이다. 그것은 도심 속에 있지만 변두리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주변인들의 모습이다.
시인 김정환은“시대의 가장 예민한 감성은 역시 도시”이며 “예술과 도시는 어차피 친형제간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역동적인 도시 귀퉁이에서 오늘도 일상과 노동을 순환하는 사람들의 모습은,“작지만 내가 사는 이곳이, 이 터전이 세상의 중심이다.”고 당당히 말하는 작가 최호철의 말처럼,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삶을 일구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순환되는 세상을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잃어버릴 경우를 대비해 돌려달라는 간곡한 부탁과 주소, 연락처를 쓴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는 작가, 그러한 스케치북이 120여권은 쌓여있는 작가. 그래서 시끌벅적한 도시의 변두리와 골목길, 길모퉁이에서 만난 사람들의 남루한 옷차림과 피곤한 노동의 무게와 삶을 그려내며‘본 걸 그린다’는 그의 스케치북 다음 장이 궁금한 까닭이다.
- 글쓴이 : 백소애
- 강원도 태백 출생. 아이큐는 낮지만 머리가 좋다고 굳게 믿고 있음. 변덕이 심하고 우유부단하나 따뜻한 품성을 지니고 있다. 조카들에게 헌신적이며 인간성 또한 좋다.....고 믿고 있다. 학생 때 교무실에서 밀대자루로 바닥 밀면서 은밀히 훔쳐본 생활기록부에는 ‘예의 바르나 산만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한참을 갸우뚱 하다가 담임이 수학선생님이었기에 그냥 이해하기로 함. 다소 후진 취향을 지니고 있으나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고 쓸데없는 걱정과 호기심이 많음. 같은 계획을 몇 년째 하고 있으며 역시나 올해도 다이어트와 앞머리 기르기에 도전할 생각이며 과메기에 없어서는 안 될 다시마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 웹툰도 괜찮지만 만화책은 역시 종이책으로 보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아날로그 건어물녀. 좋아하는 것은 무한도전, 오뎅으로 만든 떡볶이, 삼겹살에 매실소주, 비오는 날, 생활의 달인,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괴짜가족 류의 저질유머. 비 오는 날 무한도전 틀어놓고 배 깔고 누워 만화책 보면서 빈둥거리며 사는 것이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