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이선아_바람 따라 구름 따라]봉화 닭실마을
- 이선아
귀밑에서 찬바람이 느껴졌다.
정은 눈을 떴다. 습관처럼 시계를 찾았다. 여섯 시 반이였다. 몸을 일으켜, 출근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온 몸이 욱신거리고 왼손의 어딘가가 쓰렸다. 정은 지난밤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어떻게 집에 들어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휴대전화의 액정화면은 깨져 있었고, 입안에서 딱딱한 무엇과 비릿한 냄새가 혀끝에서 느껴졌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휴대전화가 완전히 망가진 건 아닌 모양이었다. 덜덜 거리며 휴대전화가 떨리더니, 상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제 같이 있었던 후배였다.
"응. 잘 들어갔어?"
"그건 제가 물어 볼 말이지요. 어떻게 들어가셨어요? 집에서 주무셨나요?"
"응.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통 기억이 안 나네."
정은 어젯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입과 왼손의 상처 그리고, 무릎과 정강이에 찍힌 붉은 도장 같은 멍들에 대해서.
"선배, 그런 모습 처음이었어요. 저 오늘부터 출장이예요. 자세한 얘긴 다음에 만나서 해요. 출근하셔야죠?"
"응."
출근이라...구름 사이로 햇살이 가늘게 쪼개져 빌딩숲 뒤로 꽂혔다. 정은 오늘 다니던 회사의 책상을 정리해야 했다. 몇 년 동안 두문불출하며 매달렸던 사법 고시를 포기하고 들어간 회사였다. 회사를 다니는 내내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다. 같은 길을 갔던 누군가의 승전보가 들리면, 그날 밤엔 만약에라는 가정법으로 자장가를 불러 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정은 그런 자장가가 습관이 될까 두려웠다. 잠이 오지 않는 날에는 더 회사에 매달렸고, 정은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 구두를 맞추고, 부장과 같은 차를 샀다. 차는 시원하게 내달렸다. 회사의 '구조조정'이 있기까지는.
필기구 몇 개와 같은 분야에서 성공한 인물들의 스크랩 기사. 회사 생활에 필요한 심리 서적 몇 권, 그리고 오늘의 할 일로 꽉 채워진 열두 달 탁상 달력. 그 외에 메모 꽂이, 두둑한 명함집. 정은 박스를 테이프로 꼼꼼하게 붙였다. 어디로 보낼지 한참을 고민한 끝에 주소를 적어 넣었다. 이제 '가보겠습니다.' 한마디만 남았다.
회사에서 나와 단골 해장국집으로 들어가려다, 이 시간에 왠일이냐고 물어 볼 주인의 물음에 대답할 용기가 없었다. 정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평일이었지만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목적지가 있는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시간마다 집으로 가는 버스가 사람들을 싣고 떠났다. 정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가락이 짧고, 손톱이 넓은 것이 당신을 닮았다고 좋아하시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나는 일만 해서, 손이 거칠고 툭툭한데, 너는 연필만 잡아서 보들보들 하구나. 손도 주인을 잘 만나야지.' 왼손의 상처가 쓰렸다. 정은 버스 정류장에서 오래 떨었다.
"일어났냐?"
아버지의 목소리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눈꺼풀이 무겁다. 아버지는 안에서 정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먼저 방문을 여는 법이 없었다.
'건넌방에 불 넣은 지가 오래 돼서, 밤새 장작을 많이 넣었는데, 따뜻하냐? 샘에 얼음 얼었던데, 세수는 안에서 해야것다."
문풍지를 바른 방문에 아버지의 허연 입김이 비친다. 정이 대답하지 않으면 아버지는 그렇게 방문 밖에서 오래 뒷짐을 지고 서 계실 것이다.
"얘야...밥 먹어야지."
"예." 정이 방문을 열었다.
맵고 찬 공기가 얼굴에 달라붙었다. 방문 곁에 서 있는 아버지의 두 볼이 발갛게 얼어 있었고, 한 손에는 두부가 들려 있었다. 두부 봉지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버지의 두부찌개는 얼큰하고 시원해, 속을 푸는데 그만이였다.
"각중에 솜씨 발휘를 하려니...너 오늘, 바쁘냐? 좋은 데가 있는데, 너랑은 못 가봐서 말이다." 밥을 먹는 정을 두고, 아버지는 뒤꼍에서 운동화를 꺼내 왔다.
"구두 신고는 못 간다. 네가 고등학교 때 신던 건데, 빨아두길 잘 했지.'
아버지는 입 꼬리를 밀어 올리며, 눈이 보이지 않게 웃었다.
음력 정월의 석천계곡은 웅장했지만, 생기가 사라져 다른 계절의 이곳을 그리워하게 했다. 잘생긴 소나무들과 우직한 바위들이 계곡의 양쪽으로 자리 잡고, 녹지 않은 얼음들이 하얗게 계곡을 칠했다. 정은 자갈과 돌들이 가득한 길을 따라 올라가는 것이 힘들었다. 운동화의 바닥이 얇아 발이 땅에 닿아 있는 것만 같았다. 정은 자꾸 미끄러져 신음 소리를 냈다.
"여만 밟아."
아버지는 물에 신발을 적시더니. 돌 위로 자신의 발자국을 찍어 보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정은 아버지의 발자국 위로 발을 포갰다. 계곡은 골이 깊지 않았다. 주변 산세는 나지막했고, 물을 가로 막고 있는 바위들은 평평하고 넓적했다.
"지금은 물이 다 말랐다. 하지만 여기. 물이 흘러넘치는 계절이 오면, 계곡이 신바람 나지. 새도 울고, 꽃도 피고, 저쪽으로 건너가 볼테냐?"
아버지가 정을 돌아보았다. 주름으로 수북해진 아버지의 눈에 정이 고여 있었다. 정은 아버지의 허리를 잡았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다리를 건널 땐, 항상 그랬다. 정의 손 위로 아버지의 손이 덮혔다.
"장갑을 찌울껄," 아버지가 중얼거렸다.
정은 계곡의 중간 평상처럼 넓은 바위에 물이 쏟아지는 광경을 상상했다. 씩씩하고 기운찬 물 흐르는 소리. 얼음을 녹이는 활기찬 그 소리들이 계곡 속에 자글거렸다. 봄을 만날 수 있을까? 정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석천정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공사한다고 잘 안보인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건물하고 두 칸 반, 한 칸의 건물이 서로 이어진 정잔데. 충재 선생 아들이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지었다다카데." 정은 아버지가 이곳에 자주 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아들 없이, 아들과 함께 추억을 쌓고, 홀로 훗날을 기약했을 것이다. 정은 조심스럽게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저기, 마을인가봐요?"
계곡을 따라 더 깊이 들어가 보니, 기와집들이 보였다.
"인물이 나는 마을이지. 가볼테냐?"
마을 이름은 닭실이었다. 산 아래부터 기와집들이 마을 앞에 보이는 논 쪽으로 차곡차곡 나와 있었다. 지형의 변화가 많아 보였는데, 집들은 비교적 좋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서로의 시야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골고루 집을 틀어 놓았다. 마을 인심이 보였다.
"안동 권씨 씨족 마을이다. 한 130여 가구 되나...조선시대 충재 권벌 선생이 입향한 다음에 후손들이 500년 동안 살고 있다던데, 금빛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모습하고 같다고 마을 이름을 그래 했다더라."
앞에 논이 있고, 마을과 논 사이에 물길이 있었다. 구름 사이로 햇볕은 받은 돌담이 반짝 거렸고, 담장 너머로 산수유나무와 오가피나무가 보였다. 붉고, 진한 남빛의 열매들이 부채꼴로 말라 허공에 박혀 있었다. 장작을 패는 가족들의 웃음소리와, 가지를 쳐 내느라 주인에게 제 몸을 맡긴 나무들의 단장 소리가 들렸다. 먹이를 찾아 나온 닭 한 쌍이 종종거리며 우리 앞을 질러갔다.
마을은 넓었고. 기와집들은 풍채가 좋았다. 그렇지만 그 곳, 양반가의 맞배지붕은 높이 솟아 있거나, 위엄이 가득하여 무겁지는 않았다. 집의 크기나 대문과 담벼락 색도 제각각이었고, 그 속의 집들도 나무와 시멘트가 섞여있었지만 집은 묘하게 닮아 어우러져 있었다. 자식들을 낳고 길러, 밖으로 내보내고,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후에 당신들이 떠난 자리를 자식들이 돌아와, 대신해 지켜주길 바라고, 그런 말로 다 못 한 겹겹의 시간들이 세월로 쌓여 자손과 자손을 넘어가고, 대를 이어 나가는 마을은 무심하게 의무를 다하고 있었다.
"여기가 종택이다."
아버지는 발걸음을 멈췄다. 반달형 월문이었다. 담장은 길었고, 대문을 지나 안채까지 두 개의 문이 더 보였다. 마당에는 큰 목련나무가 심어져 있었는데, 찬바람에도 꽃을 피울 생각에 동그란 꽃봉오리가 제법 통통했다. 목련이 피면, 하얗고 눈부신 또 다른 세상도 열리겠지... 정은 추위가 잠시 잊혀졌다.
"봄이 올 때가 돼서, 할 일 한다꼬 속에서 바쁠끼다. 이쪽으로 오너라."
아버지는 작은 대문을 넘어갔다. 아버지를 따라 간 정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단정하고, 간결한 목조 건물이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방문을 가지고 있었고, 세 칸짜리 ‘당’으로 맞배지붕 아래 바람을 막는 풍판이 대청마루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초석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고, 목재와 목재들은 못을 친 것이 아니라 홈을 파 서로 끼워 맞춰 넣었다.
"충재라 적혔지?" 아버지는 마루 대들보에 걸린 작은 현판을 가리켰다.
"이 집 주인인데 조선 시대 때, 큰 벼슬을 하다가 사화를 두 번이나 겪었단다. 그 때 내려와 이 서실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더라. 참 난 양반이지. 심사가 복잡했을 긴데, 서실 모양 좀 봐라.
정은 마루 위에 앉아 바닥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손이 나뭇결을 따라 미끄러졌다. 사오백년 전의 시간이 이 속에 있다. 난관을 만난 집 주인이 수백 번을 오르고 디디며 마음을 뉘이던 곳이었다.
정은 충재당을 돌아 반듯하고, 단단하게 놓여 있는 돌다리를 마주 하고 앉았다.
"건너가 보자. 바위 위에 정자도 볼 만 하다."
정자는 사방이 트여 있었다. 기둥을 잡고 서니 저 멀리 넓은 들까지 보였다. 대청마루와 마루방, 앞뒤로 반 칸 정도를 내밀어 난간을 둘러놓았다.
"학자들이 여기까지 선생을 찾아왔었다 하더라. 저기 글씨도 조식 선생이 쓴 거라 하대."
청암정이라 쓰여 있었다. 햇살이 비껴들어와 정자를 어루만졌다.
"좋네요."
"그자? 문도 들어 올릴 수 있게 돼서, 위로 문을 걸어 두면, 여름에 바람이 말도 못하게 시원하지. 저기 글씨도 보이나?"
청암수석이라고 적혀 있었다.
"허목 선생이 마지막으로 쓴 거라던데, 그 양반이 여길 꼭 와보고 싶어 했다대. 그리는 마음에 글을 썼다는데, 글만 써 놓고 자리에 눕게 됐단다. 허목 선생이 왜 좋아했는지 알겠나?"
마음을 훔치는 정자였다. 돌다리를 건너기 전, 정자는 엄격했다. 나무에 가려져 정자의 구석구석, 숨겨둔 공간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앞으로 가까이 오면, 몸을 열어 주었다. 어느 쪽을 향해 앉아 있어도, 정자는 경치와 사람을 함께 품어주었다.
"거북이 볼래?"
"거북이요?”
아버지는 청암정에서 내려가 돌다리를 건너, 정자를 마주하고 충재당에 앉았다.
"저기 꼬리. 여기 머리. 거북이가 보이나?"
"아......"
청암정을 받치고 있던 바위가 거북이 모양이었다.
"거북이가 물이 있어야 헤엄을 치지. 그래서 바위를 가운데 두고, 주위에 연못을 팠다대. 마을 입구에서 봤던 물길에 물이 흐르면, 여기에 물이 찬다. 물이 차면 개구리도 보이고, 꽃도 피고, 생기가 돌지. 요새 워낙 가물어서, 거북이가 힘들끼다..... 하늘이 하는 일을 우야겠노. 시절이 그런걸. 때가 오겠지."
아버지가 깍지 낀 자신의 손을 풀어. 정의 등을 어루만졌다.
"괜찮다. 다 괜찮다."
아버지는 들썩이는 정의 어깨를 오랫동안 두드려 주었다. 마당을 쓸던 바람이 고요해졌다. 눈치 없는 바람을 불러 낸 건, 이른 봄이 숨겨둔 목련 한 송이였다
- 글쓴이 : 이선아
- 1977년생, 숭실대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글 쓰고 책 읽기를 매우 좋아하며, 영화관에 혼자 가는 것을 즐긴다. 글 쓰는 직업을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있다. 현재 안동 MBC에서 구성 작가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