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황구하_시로 거니는 상주]두 발로 읽는 북천
- 컬처라인(cultureline@naver.com)
시로 거니는 상주
북천 징검다리
“갈 날이 많지 않아.”
“이제 밥은 좀 굶어도 꽃이 좋아.”
북천 산책길, 벚꽃 그늘 나무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할매들 말씀이 따라옵니다. 하르르 날리는 꽃잎처럼 귀에 붙어 떨어지지 않습니다. 북천은 집 가까이 있어서 사시사철 틈날 때마다 설렁설렁 걷는 곳입니다. 특히 올봄 자주 걸었습니다. 일상이 한가해진 덕에 초봄부터 두어 달 동안 외부 일정이 있는 열흘 정도를 빼고는 날마다 나가보았습니다.
올해는 벚꽃이 여느 해보다 조금 늦은 3월 말에 만개했습니다. 해마다 개화 시기가 빨라진다고 걱정이었는데 이 또한 이상 기후로 흐리고 쌀쌀한 날이 많았던 탓이지요. 벚꽃이 필 시기가 되자 지인들은 오늘도 북천 순찰하고 왔냐, 벚꽃이 어디만큼 왔느냐고 자주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면 바닥 뿌리줄기에서 첫 꽃이 피고, 몸통에서 브로치처럼 피고, 3부 능선, 5부 능선쯤이라고 답을 하곤 했지요. 하루하루 기온 격차가 심하니 또 언제쯤 만개하겠냐고 점쳐보라고도 했습니다. 벚꽃의 봄날을 그만큼 기다린다는 증거였습니다.
북천을 걸을 땐 나름의 동선과 습관이 있습니다. 큰길 횡단보도를 건너면 왼쪽으로 발걸음을 뗍니다. 먼저 북천교 앞쪽에 있는 상주동학농민혁명기념비를 올려다보며 출발하지요. 산책길로 올라서면 매화나무와 살구나무가 양쪽에 늘어서 있습니다. 그다음부터 벚나무 행렬입니다. 후천교를 지나 상산교, 철도다리와 계룡교를 지나 걷다 보면 길 너머 저쪽 제일장례식장이 보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지금 여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저절로 묵상을 하게 되지요. 그러다 보면 북천 끝에 다다릅니다. 거기 복룡빗물펌프장 앞에서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북천과 남천의 합수를 향해 한껏 기지개를 켭니다.
돌아올 때는 징검다리를 건너 왕버들이 있는 반대편 길을 택하기도 하지만 주로 천변으로 내려섭니다. 냉이, 별꽃, 꽃다지, 제비꽃, 괭이밥, 꽃마리, 씀바귀, 봄까치꽃, 주름잎풀, 광대나물, 긴병풀꽃, 봄맞이꽃, 뽀리뱅이, 애기똥풀, 조개나물꽃 등 풀꽃들과 눈을 맞추며 걷습니다. 어제는 이제껏 볼 수 없던 자주광대나물 무리와 자주괴불주머니꽃이 처음 찾아온 걸 알았지요. 하나의 꽃대에 두 송이가 핀 흰민들레를 만난 것도 이채로웠고요. 몇 년 사이 두루미와 가마우지는 엄청 늘었습니다. 다리 밑에 집을 짓고 사는 참새, 박새, 멧비둘기는 문명에 깃들어 고생이 참 많습니다. 하천부지 축대 돌 사이에 둥지 틀고 알을 품는 꼬마물떼새는 기특하기까지 합니다.
자주괴불주머니, 꽃대 하나에두 송이 민들레, 자주광대나물
어느 날인가 문득 궁금했습니다. 4킬로미터 정도 되는 길에 몇 그루의 벚나무가 있을까 하는 것이었지요. 그러다 천변과 산책로 아랫길 목련, 박태기, 감나무, 라일락, 산수유, 소나무, 꽃사과, 단풍나무, 느티나무, 버드나무, 조팝나무, 오동나무, 은행나무 등은 다음 순서로 남겨두고 오로지 산책로에 있는 나무를 세어보기로 했습니다. 그 바람에 오랜 시간 그냥 스쳐 지나가던 나무를 한 그루 한 그루 이름을 부르며 어루만지게 되었지요. 벚나무도 인사하듯 꽃잎 한 줌씩 뿌려 주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친구한테 전화가 와서 “지금 벚나무 세고 있는데 헷갈린다.” 했더니 친구는 “아이고, 참 엉뚱하기는.” 하며 껄껄 웃었습니다. 친구 말처럼 이 엉뚱한 일은 며칠 동안 반복되었는데 마음이 은은하고 아늑했습니다.
산책로의 벚나무는 전체 700그루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셀 때마다 달랐습니다. 몇 그루 나무가 도망가기도 하고 업혀서 오기도 했지요. 어느 날은 698그루였다가 어느 날은 705그루가 되기도 했습니다. 재밌는 것은 그 많은 나무 중에 늦둥이 왕벚나무와 겹벚나무가 한 그루씩 있다는 것입니다. 산책로 벚꽃이 모두 떨어져 꽃잎 풍장(風葬)을 치르고 나면 뒤이어 조문하듯 늦둥이 왕벚나무가 오고 애도하듯 겹벚나무가 피어오릅니다.
벚꽃이 피면 비로소 봄이라고 할 만큼 북천 벚꽃 십 리 길에도 상춘객이 붐볐습니다. 온갖 새소리와 벌들의 날갯짓도 분분했습니다. 전국 벚꽃 명소에 북천이 들어 있다고 하는데 다행인 것은 여기저기 획일적으로 치러지는 축제 문화에 휩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벚나무도 있습니다. 제주도 5·16도로변에 자생하는 왕벚나무와 해남 대둔산에 자생하는 왕벚나무가 그것입니다. 또한 충남 금산 신안사에도 보호수로 지정된 왕벚나무가 있고 그 골짜기에 많은 왕벚나무가 자생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일본에서는 자생지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귀한 나무이지요.
북천산책로
금중현 선생(상주향교 전 전교(典校))께 여쭈었더니 2000년도 북천에 처음 벚나무를 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선생의 말씀에 따르면 보통 벚나무의 평균 수명은 70여 년이라고 합니다. 벚나무의 수령 한계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저 100년, 200년 오래오래 산다고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아직은 멀었다고, 오늘은 아니라고 도리질하며 걷고 있는 무명(無明)의 내 삶과도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세계 평균 수명은 몇 년 전 70세를 훨씬 웃돌아 100세 시대를 이야기하는 요즘, ‘어떻게 살 것인가’ 또 ‘어떻게 살지 말 것인가’라는 본질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실천을 뭉클 짚어보게 되었지요.
저 검은 몸속 어디
하늘로 가는 길 은밀히 뚫어놓았나
여의주 문 물고기 한 마리
지금 막 헤엄쳐 나간 게 분명하다
시리디시린 하얀 비늘들
저리 환히 쏟아지는 걸 보면
― 황구하, 「벚꽃 진다」 전문
북천 남천 합수
추운 연말에 벚나무 한 그루 전구를 온몸에 두르고 저물녘이면 불을 밝혔습니다. 그걸 보며 마음의 아토피를 앓았지요. 그러다 봄봄, 온몸을 옥죄었던 전구를 벗고 며칠 잠깐 꽃이 톡톡 터지는가 싶더니 꽃잎이 일제히 떨어져 내렸습니다. 빗물에 꽃잎 떨구고 말끔히 번뇌를 씻는 벚나무가 수도승처럼 보여 문득 한 소절 얻은 시편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일생이 있듯 모든 꽃이 귀하고 아름다운 건 소멸하는 운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벚꽃이 북천에 머문 기간이 그 어느 때보다 길었습니다. 꽃이 피기 전 비가 왔고 피어 있는 동안도 살짝만 내려 보름 동안이나 꽃 천지를 누렸습니다. 허공에서 환했던 벚꽃이 눈송이처럼 날리며 또 한 번 지상은 꽃길이었지요. 지금은 온갖 시름 다 벗어버리고 “여의주 문 물고기 한 마리” “막 헤엄쳐 나”가는 중입니다.
요즘 제 일상은 느리게 걷고 단순하게 생각하며 소소하게 바라보고 고요하게 느끼는 홀로와 홀로,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시절입니다. 홀로는 자신을 치유하는 외로운 통증입니다. 그러나 홀로는 어그러지지 않고 삼갈 줄 아는 수행의 고독이 꽃 피우는 독락(獨樂)입니다. 독락은 또한 동락(同樂)입니다. 자신의 생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자연의 보폭으로 함께하는 삶, 사람의 무늬를 그리는 것이 북망산천을 향해 잘 건너가는 것이겠지요. 시끄럽고 번잡한 현실 속에서도 내면을 들여다보며 홀로 적막한 듯 함께 즐거운 고수들이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어디 사람뿐이겠는지요. 북천은 이미 스스로, 있는 그대로 독락의 풍경입니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물소리, 새소리, 바람 소리에 눈을 맞추고 귀를 기울이며 걷는 사람들 또한 ‘독락’과 ‘여수동락(與樹同樂)’의 경지에 오른 자연의 철학자입니다.
연산홍
먼 길을 걸어와 한 시절 환했던 꽃이 자신의 길을 내며 흘러가듯이 이제는 연두와 초록이 무장무장 흘러옵니다. 저기 붉은 영산홍 무리도 꽃상여처럼 지나가고 있습니다. 나무 벤치에 앉아 있던 선지자(先知者) 할매들의 또 한 말씀이 뎅그렁 울려 옵니다.
“살 날이 많지 않아.”
- 글쓴이 : 황구하
-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다. 영남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2004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 『물에 뜬 달』이 있으며 현재 반년간지 『시에티카』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