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임은혜_연극으로 만나는 세상]거리연극에서 축제로
- 임은혜
연극이 시작되는 거리
길을 걷는다. ‘집’이라는 사적인 공간을 벗어나는 순간 마주하게 되는 길... 그곳에서 우리는 잘 아는 이웃을 만나 안부를 주고받기도 하고 때로는 낯선 이와 마주치면서 호기심을 갖기도 한다. 청송 같은 시골의 거리야 늘 한적하고 고요하여 사람보다 자연과 더 많이 마주하게 되지만, 시끌벅적한 도시의 거리는 차이고 치이는 갈등의 연속이다. 일터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 순간, 시간에 쫓기는 이들의 분주한 발걸음들, 빽빽이 들어찬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지하철들, 불쾌한 부딪힘, 화장품 냄새와 지난밤에 마신 술 냄새까지... 도시의 거리는 온갖 인간 군상과 기계들로 꽉 들어차있다.
올해 초, 그 복잡한 거리에서 나는 어떤 청소부 아주머니를 보았다. 지하철 화장실로 들어가는 입구 의자에 앉아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망연자실’이라는 말을 떠오르게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녀 혹은 그녀의 가족 중에 누군가가 큰 병이라도 난 것일까? 아니면 죽었던가, 아님 방금 해고통지라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고무장갑을 끼고 빗자루를 든 채로 앉아있는 그녀의 망연자실 앞에서 희망이 사그라지는 시대를 본다. 청송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 아주머니의 모습이 지워지질 않았다. 점점 사는 게 힘들다, 희망이 보이질 않는다고 말하던 도시친구들의 지친 얼굴도 함께 떠오른다.
나는 생기를 잃어버린 거리에 활력을 불어넣는 연극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몽상에 잠기기 시작했다. 파란 원피스에 흰색 앞치마와 머릿수건을 두른 열 댓 명의 청소부 아줌마들이 전철역 광장에 모였다. 그들은 계단을 올라 역사를 지나 승강장까지 이동하면서 춤을 춘다.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하늘을 휘저으며 빗자루로 바닥을 쓸어내는 ‘정화의 춤’을 춘다. 그녀들의 역동적인 춤이 지나가는 관객들을 웃게 하고 호기심을 끌어낸다. 청소부들의 아픔과 고단함 그러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노동하는 이들의 유머와 사랑이 녹아있는 드라마가 역사에서 승강장까지 이동하며 펼쳐진다. 공연을 하던 청소부 아줌마들이 관객들에게 손을 흔들며 전철을 태워 보낸다.
이 춤극은 별도의 무대장치가 없다. 전철역 광장에서 승강장에 이르는 모든 장치들이 그들의 몸짓과 함께 한다. 나는 이 작품에 ‘망연자실 프로젝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희망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생기를 불어넣고자 열망하는 배우들이 모여서 풀어내는 거리춤극... 그러나 거리에서 시작된 이 연극적 상상은 아쉽게도 실현되지 못했다. 함께 할 배우들을 얼마나 모을 수 있겠느냐는 회의와 함께 아직도 아이디어로만 머물러 있다.
거리는 개인만의 울타리를 벗어나 타인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한다. 나와 타인을 둘러싼 현실을 직면하게 하는 거리는 시대를 말해준다. 말해야 할 것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현실을 넘어선 세계와 소통을 꿈꾸게 하고 그것을 지금 이 거리에 펼쳐보려는 노력, 거기로부터 연극이 시작된다. 연극은 거리에서 태어났다. 먼 옛날, 노래와 춤과 제의와 신화가 한 몸이었던 제례의식, 거리에서의 퍼레이드와 마임, 중세기 광장에서의 이동수레연극 등이 거리연극의 기원이다.
특히, 우리네 전통으로 오면 “거리는 부정거리, 가망거리와 같이 굿의 한 과정을 이르는 말이 되는데, 이는 굿이 거리에서 이루어졌음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풍물에서의 굿거리 또한 거리가 굿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장소였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탈춤에서 한 과정을 마당이라고 이르는 경우와 마을굿에서 장승과 당산나무가 있는 곳, 당집과 서낭당 등에서 이루어지는 마을굿까지... 거리는 자연에 깃들어있는 천지신명과 내 안의 신명이 만나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생태계와 교감이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그렇게 얻어진 에너지는 집집마다 가신의 이름을 빌어 다시 나누어지고 마을의 큰 마당에 모인 공동체는 퍼포먼스를 통한 너와 나의 소통을 도모하는 난장을 형성함으로써 서로에게 나누어진 그 새로운 에너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거리야말로 새로운 소통의 장이요, 굿의 공간임을 보여준다.”1)
거리연극에서 축제로
오늘날의 거리연극들은 정형화된 실내극장 무대, 극장의 제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에서 출발한다. 거리연극은 공간적인 자유 뿐 아니라 공연의 형식과 미학적 특성에 있어서도 기존의 연극의 관습과 관행을 의도적으로 전복하는 자유를 추구한다.
▲ 빵과 인형극단의 야외극 (사진 : ’빵과 인형극단‘ 홈페이지에서)
거리연극에 선구자 역할을 해왔던「빵과 인형」극단의 대표 피터슈만은 “가장 훌륭한 연극은 가장 전통적인 형식으로 탄생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정형화된 실내극장을 거부한다. 그것은 있어서 편할 뿐이고 유명할 뿐이며 사람들은 같은 의자에 같은 모습으로 앉아서 감각을 마비시키고 반응을 제약해 버린다는 것이다.「빵과 인형」극단은 길거리, 창고, 언덕, 빈민굴 등 인형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면 어디에서나 공연을 한다. “예술은 부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라고 강조하는 피터슈만은 거대한 인형의 행렬을 거느리고 장다리(Stilt) 춤을 추는 배우들과 함께 거리에서 대중들을 만난다. 전쟁과 폭력, 자본의 문제 등 사회비판적인 테마를 단순한 방식으로 구성하여 공연한다.
그들은 뉴욕과 같은 대도시에서 공연을 할 경우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게릴라 거리연극의 기술을 고안하였다. 이는 정치적인 이슈를 담은 장면을 짧고 즉각적으로 펼쳐 보이는 것으로 경찰이 도착하기 전에 끝내버리는 형태의 공연이라고 한다. 그들이 공연의 중간이나 마지막에 관중에게 빵을 나누어줌은 연극이 빵만큼이나 우리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확인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지난 여름, 나무닭움직임연구소는 지역의 환경을 활용한 연극 작업의 일환으로 ‘퍼레이드와 거리연극’을 진행했다. 청송의 아이들, 영양의 아이들, 가톨릭상지대유아교육과 학생들이 중남미 연극인들과 함께 공연예술캠프를 열었다. 그동안 익혀온 장다리를 심화 훈련하였고, 그것의 결과로 퍼레이드와 거리연극을 구성하여 주왕산 국립공원 입구에서 대전사 앞마당까지 퍼레이드를 벌였다. 아코디언과 꽹과리, 북, 공(중국의 징)을 든 악사 그룹이 앞장서고, 장다리를 타고 거대한 사자탈까지 쓴 아이들이 춤을 추면서 걷는다. 상지대 유아교육과 학생들은 ‘피터팬’에 등장하는 인물들로 의상을 갖추고 1m나 되는 장다리를 타고 걸었다. 영양에서 온 아이들은 일월산을 상징하는 거대인형 해도령과 달아가씨를 들고 싱그러운 초록빛과 어우러진 거리에 웃음을 선사했다. 마침 여름 휴가철이라 주왕산에 관광객들이 많았다. 이들은 뜻하지 않은 퍼레이드 행렬을 보고 놀라움과 호기심으로 열광했다.
▲ 주왕산국립공원 입구에서 퍼레이드를 벌이는
청송·영양의 아이들과 가톨릭 상지대 유아교육과 학생들.
인생의 머나먼 여정이 그러하듯, 퍼레이드와 거리연극은 걷다가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사건 또는 이벤트와 같다. 공연을 하는 배우들은 무엇인 체하는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거리의 환경들을 감각하며 자유분방하게 움직이면서 목적지를 향해 이동한다. 고정되어있지 않는 관객들 역시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가면서 그들이 보고 싶은 부분만 볼 뿐이다. 공연의 행위자와 보는 자 사이의 격식이 없는 것이다. 거리, 시장, 마을 광장, 공원 등 평소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퍼레이드 또는 거리공연은 남사당패의 놀이라든가, 약장수 아저씨의 걸판진 입담, 차력사의 묘기처럼 거리연극은 자유분방함을 분출하고 즉흥적인 에너지들로 충만하다.
지난여름의 퍼레이드와 거리연극은 지역의 환경을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고 실험하는 데 1차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공연의 행위자와 보는 자를 통합하는 ‘주제’가 없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아있다. 어떤 행렬인가, 이 행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저 바라보고 스쳐지나가는 존재로서 관객과 관계를 맺는 공연을에 만족할 것인가? 참여하는 관객, 더 나아가 공연의 일부가 되는 관객과의 만남을 중요한 과제로 삼는 환경연극의 의도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답을 구하기 위해 나는 인도의 축제 중의 하나인 ‘람가르다의 람릴라(라마의 놀이라는 뜻)’를 되새겨 보고 있다.
‘람가르다의 람릴라’는 거대한 축제의 공간 곳곳에서 라마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관객들은 공연의 이동 공간을 ‘여정’하면서 공연에 참여한다. 이 공연은 혼란한 세계에 비슈누-라마가 질서를 회복해준다는 줄거리를 갖고 성스러운 장소로의 이동을 재현하고 이 공연을 따라가면서 바라보는 관객들은 순례자가 되어 공연에 참여한다. 축제의 장면이 바뀔 때마다 람나가르의 도심에는 천계․인간계․동물계․악마계 등 모든 세계가 출현한다. 람나가르는 인도 전역이 되기도 하고, 라마의 고향이나 시타의 고향의 왕국이 되기도 한다. 31일간의 연극적인 서사가 진행되는 동안 배경과 규모가 살아있는 것처럼 변화를 보인다.
다양한 공간을 재현하는 데 극장 세트가 아니라 람나가르의 도시 풍경의 일부인 항시적인 환경이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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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샤하라 행렬이 출발할 때, 바라나스의 마하라자의 궁전인 성채의 안뜰. |
▲ 관중들이 쏘아댄 화살을 맞고 불태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라바나 인형. 이미 전투에서 패배한 라바나를 화장하는 것은 라바나가 라마에게 항복하고 그 악마적 본성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표시이다. |
람릴라에서는 축제의 장으로 나가는 행위, 그리고 집으로 되돌아가는 행위조차도 퍼포먼스의 중요한 차원을 구성한다. 하나의 총체로서 받아들여지는 람릴라의 환경과 행동은 구경꾼들을 둘러싸고 통합한다. 그 순환 과정 전체, 공연 환경과 통합되어 있는 행렬들과 종교적 순행 과정들, 개인적인 신앙 및 소규모의 집단적 제의와 정규 텍스트 및 장대한 펼쳐짐의 혼합은, 람릴라 축제 기간인 한 달 내내 울려 퍼지는 일종의 총체적인 체험 속으로 함께 축적되어 들어간다. 공연은 도처에서 나오고 또 도처에 존재한다.2)
‘람릴라’는 잘 짜여진 하나의 거리연극이 아니라 인도 민중의 신앙과 염원이 담겨있는 거대한 축제이다. 관중을 그저 바라보는 구경꾼이 아니라 축제 속으로 통합시켜내는 매개 고리는 이야기, 즉 신화인 것이다. 신화는 거리연극이 펼쳐질 공간에 깃든 민담이나 전설, 역사적인 사건일 수도 있고, 람릴라처럼 종교적인 서사일 수도 있으며, 연극을 통해 거리에서 창조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동일한 시간과 장소에서 보는 자와 공연자가 하나의 신화를 공유하며 함께 행한다. 하나의 주제에 대한 다양한 형상화가 퍼레이드와 함께 어우러진다. 숨죽여 있던 거리가 생명력을 얻게 되고 자유분방함과 유토피아로 가득 찬다. 그리고 세시풍속처럼 마을 공동체의 삶에 밀착된, 생활의 한 부분으로 뿌리를 내린다면, 이것은 한 편의 거리연극을 넘어선 웅대한 축제가 될 것이다.
▲ 풍물굿패 ‘씨알누리’의 거리공연 (사진 : 씨알누리)
이 땅에도 오랜 전통을 지녀온 거리연극이 있다. 자궁을 상징하는 부포와 정자를 뜻하는 상모꼬리를 휘날리며 길을 지나 문을 넘어 부엌으로, 곳간으로, 뒷간으로, 안방으로, 우물로, 난장을 트는 마당으로 이어지는 풍물은 독특하고도 탁월한 거리연극이다. 풍요와 다산이라는 뚜렷한 주제를 가지고 춤, 음악, 노래, 극이 하나로 통합된 종합예술형식의 풍물은 거리연극의 원형을 보여준다.
우렁찬 풍물소리가 하늘과 땅을 울리며 퍼져나간다. 신화 속 인물들이 마을 사람들의 손을 거쳐 거대인형들로 태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고, 마을공동체의 소망이 깃든 조형물들이 꽃과 열매로 장식된 수레에 실려 가고, 갖가지 형상의 탈을 쓰고 장다리를 탄 아이들이 두 팔을 휘저으며 우주를 활보하듯 행진하는 그런 축제를 만들고 싶다.
- 글쓴이 : 임은혜
- 극작가, '나무닭움직임연구소'는 청송군 청송읍 송생리에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