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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라인_마을이 있는 풍경]내 마음대로 정한 봉화 1번지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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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있는 풍경
내 마음대로 정한 봉화 1번지 (Ⅰ)
글. 김상출
❘ 석천정사
필자는 봉화에 살기 시작한 지 채 10년도 안 되는 풋내기 주민이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말을 어려서부터 많이 들었는데, 풋내기인 내가 봉화에 대해서 어떻게 무얼 쓸까 고민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이치였을 것이다.
급기야 원고 마감을 얼마 앞두고 ‘아는 것만 쓰자.’라고 작정하여 내가 사는 곳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고, 사진작업을 하면서 수없이 많이 다녀온 곳을 소개하기로 한다. 바로 ‘닭실마을’과 ‘청암정’ 그 곁의 ‘석천정사’ 이 세 곳이라면 어느 정도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제목에서 밝혔듯이 산자수려한 봉화군의 여러 명승 중에서 나는 닭실마을과 청암정, 석천정사로 이어지는 이 일대를 봉화의 1번지로 꼽고 싶다. 그 중 500년 넘게 한 자리를 지키며 전통을 이어온 닭실마을을 먼저 소개하고, 청암정과 석천정사는 다음 호에 다시 이어갈까 한다.
지나다가 잠깐 들러보는 단순한 관광이든지, 마음먹고 구석구석 세세하게 음미하는 답사이든지, 아니면 그럴싸한 사진기 들고 와서 멋진 작품하나 남기려는 목적이든지 간에 이곳은 여러분을 충분히 뿌듯하게 해줄 것이다.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닭실마을
‘닭실마을’ 이름이 조금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곰곰이 되새겨보면 참으로 정겹게 다가오는 이름이다.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멋진 이름을 가진 이 마을은 행정구역상으로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다. 닭실이 유곡으로 바뀐 것이다.
우리나라 곳곳에는 이와 같이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마을들이 많이 있었는데, 왜놈들이 턱도 없는 한자식 이름으로 바꾸어놓았다. 이 마을도 예외 없이 ‘닭실마을’이라는 멋진 이름 대신 ‘유곡리’라는 이름을 붙여놓았으니 저들의 행태를 어찌 이해해야할지 도무지 요량이 되지 않는다.
이 마을의 이름이 본디 ‘달실’이었다는 설도 있으나,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는 듯하다. 다만 마을의 모양이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어서 ‘닭실’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는 설이 훨씬 그럴듯한 것은 사실이다.
‘닭실마을’은 현재 약 40여 호의 가구가 생활하고 있는데, 거의 대부분의 집들이 전통 한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500년을 훌쩍 넘겨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영남지방의 기품 있는 반촌의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주시에서 봉화군을 거쳐 울진으로 연결되는 36번 국도를 따라가다 봉화읍에 당도하여 ‘비틀재’라는 자그마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바로 이 마을에 이르게 되는데, 그 ‘비틀재’를 넘어 내려오다가 중간쯤에서 왼쪽을 내려다보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마을의 모습이 보인다.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500년이 넘는 세월을 오롯이 담고 있는 ‘닭실마을’이. 마침 그때 영동선 기차가 마을 앞을 지나간다면 더할 나위 없는 멋들어진 풍경이 될 것이다.
마을로 들어가면 잘 다듬어진 세월들을 만날 수 있다.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집들과 거기에서 묻어나오는 분위기가 적절한 무게를 가지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어느 집이나 어느 골목에서도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조곤조곤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어쩌다가 고요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곳이 있다면 가만히 말을 한번 걸어보기 바란다. 그럼 틀림없이 응답이 있을 것이다. 어서 오라고. 무엇을 만나고 싶으냐고.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으냐고. 그러면 당신은 원하는 것을 마음속에 떠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그 많은 이야기 중에서 이 마을의 담장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가장 좋아한다. 특히 봄이 한창일 때 이곳에 와서, 아무 담장이나 정하고는 그 곁에 슬쩍 주저앉아 그윽이 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정말 많은 이야기들이 묻어나온다.
400여 년 전에 살았던 안방마님의 따뜻했던 마음 씀씀이에 동네에서 굶는 사람이 없었다던 아름다운 이야기도 흘러나오고, 250여 년 전 이 댁의 머슴이었던 칠복이와 옆집의 노비였던 사월이가 열애 끝에 부부의 연을 맺기까지의 온 동네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흥미진진한 연애담도 걸쭉하게 묻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는 담장에 가만히 손을 짚어보면, 대번에 나를 저 깊은 세월 속으로 데려가 담장 안에서 들려오는 어린 도령이 글 읽는 또랑또랑한 소리 속으로 빠져들게 하거나, 나라의 기운이 쇠했던 시절 꼿꼿한 선비께서 을사오적을 처벌하고 국권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쓰는 묵향 속에 빠져들게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은 조선 중기 인문지리학자인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이 그의 저서 『택리지(擇里志)』에서 이 ‘닭실마을’을 경주의 양동마을, 안동의 내앞마을, 하회마을과 함께 ‘영남의 4대 길지’의 하나라고 칭송한 명당이기도 하다.
앞에서 말한 36번 국도에서 건너편을 바라다보면 보면, 이 마을의 맨 왼쪽이 청암정이고, 그 옆에 충재 권벌 선생의 종가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 오른쪽으로 기와집들이 쭉 늘어서서 마을을 이루고 있다.
필자가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마을을 방문한 때가 마침 모내기철이었는데, 마을 앞의 너른 들판에는 예전처럼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세월은 수없이 흘러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가고 없지만, 기름진 땅은 그대로 남아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이곳 사람들에게 결실을 베풀며 면면히 이어질 것을 생각하니 감회가 그윽하다.
또한 ‘닭실마을’을 이야기할 때 조선시대의 유명한 선비인 충재 권벌(權撥, 1478~1548) 선생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이 분이 ‘닭실마을’에 터를 잡고 살면서부터 이 마을이 권씨 일가의 집성촌이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분은 안동 출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 훤정(萱亭) 송정(松亭)이다. 할아버지는 부호조(副護早) 권곤(權琨)이고, 아버지는 성균생원 증영의정 권사빈(權士彬)이며, 어머니는 주부(主簿) 윤당(尹塘)의 따님이셨다.
1496년(연산군 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7년(중종 2)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어서 예문관검열 홍문관수찬 부교리 사간원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13년 사헌부지평으로 재임할 때, 당시 신윤무(辛允武) 박영문(朴永文)의 역모를 알고도 즉시 보고하지 않은 정막개(鄭莫介)의 당상관 품계를 삭탈하도록 청하여 강직한 신하로 이름을 떨쳤다.
1519년 11월 기묘사화로 파직을 당하자, 이곳에 내려와 집을 짓고 살면서 ‘닭실마을’의 터를 닦았다고 한다. 이후 15년간 이곳에서 지내다가 1533년 복직되었는데, 사후에 그 공로와 강직한 성품으로 ‘불천위’의 지위를 받아 지금도 제사가 행해지고 있다. 충재선생에 대해서는 청암정 바로 곁에 새로 지어진 ‘충재박물관’에 가보면 더 소상하게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봉화에서 큰기침하며 살아가시는 어른들에게 내가 여러 번 들은 말이 있다. 그 말이 바로 ‘불천위(不遷位)’다. 어느 고장이 충절의 고장이고, 어느 고장은 선비를 많이 배출했고, 어느 고장은 양반의 도시이고 라는 등의 말을 할라치면, 봉화의 어른들은 이렇게 반문하신다. ‘그 고장에 불천위가 몇 분이나 되는고?’라고.
불천위란 큰 업적이나 공훈을 남기고 죽은 사람의 신주를 오대봉사가 지난 뒤에도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神位)를 말한다. 즉 국가에서 지정하면 국불천위, 유림에서 받들면 유림불천위, 사적으로 인정하면 사불천위가 되는데, 일반적으로 국불천위를 더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한다. 봉화에는 국불천위가 충재선생을 포함하여 여섯 분이나 계시니 가히 큰기침하며 내세울만하지 않겠는가?
이상 봉화의 풋내기 주민인 필자가 내 나름대로 정한 봉화 1번지 중 ‘닭실마을’의 소개를 마친다. 부족하나마 내가 여러 번 다녀본 곳이라서 용기를 내어 소개하니, 널리 혜량하시기를 빈다.
- 글쓴이 : 컬처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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