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황구하_시로 거니는 상주]가난한 집 살림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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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거니는 상주
가난한 집 살림살이
글. 황구하
이제 정말 푸른 봄입니다.
한반도에도 평화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칭다오도 정말 맑은 날씨였어요.
오늘은 간만에 남편과 러커청이라는 곳에 가서 데이트했네요.
저녁 먹으며 남북공동선언 소식에 같이 신기해하고 기뻐했습니다.
저는 중국 칭다오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타국에서의 생활이다 보니 신혼여행을 또 온 기분이기도 하지만 아직은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답답함과 막막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저는 다시 학생이 되어 중국어를 공부합니다.
중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도시적인 이곳의 모습은 놀랍기도 하고
청도한인교회에서 귀하게 섬기고 주님을 갈망하는 청년들을 만나게 되면서 빛그림공동체 생각도 많이 났습니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펼쳐질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고 두렵기도 하지만 믿음은 인내와 기다림을 통해서
자라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이곳 생활이 늘 좋은 것만 있다고 할 수 없지만 견딜 수 있는 힘과 사람들,
그리고 남편이랑 함께하는 것에 감사하며 살고 있어요.
성실과 인내로 우리 가정이 더욱 견고해지길 소망합니다.
두루 나누고 섬김으로 세상이 줄 수 없는 보물을 가진 가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중국 칭다오에 있는 딸내미가 안부를 전해왔습니다. 딸내미는 결혼하겠다고 소식을 알리면서 “섭섭해 하지 마세요. 엄마, 시집가는 거 아니고 유학 간다 생각하셔요.” 하더니 제 할 일하면서 엄벙덤벙 칭다오 정착 신혼일기를 쓰고 있다고 합니다.
딸내미가 대학 들어가면서 집을 떠나 대학원과 직장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건 9년 만이었지요. 올해 1월 초였습니다. 뜨신 밥 한 끼도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지난 2월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곧이어 중국 칭다오로 훌쩍 날아갔습니다. 사위가 그곳의 학교 교사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엄마에게는 딸이 있어야 한다고 엊저녁 큰시누이가 그러셨지요. 아버님 첫제사를 모신다고 동서울터미널에서 여덟 시간이나 버스를 타고 오셨습니다. 휴일과 어린이날 연휴가 겹친 까닭이지요. 일찍 와서 거들었어야 하는데 큰 고생했다며 걱정을 하셨습니다.
“딸내미 시집보내고 많이 허전하지? 그래도 할 일했다 생각하면 좀 괜찮더라.” 그러면서 당신이 맏딸로서 동생들 건사한 이야기며 부모님과 할머니 잔심부름을 하며 컸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정말 우리 큰 시누이는 집안의 꼿꼿하고 든든한 대들보 역할을 하신 듯합니다. 남편이 돌아가신 부모님 이상으로 누님에게 기대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맏딸은 살림밑천이라 했던가요. 어제 제사 음식 장만을 하면서 엄마 돕겠다고 팔을 걷어 부치던 딸내미 생각이 뭉클 났습니다.
석문사 약사여래부처
지난주 화북 석문사(石門寺)를 다녀왔습니다.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과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에 걸쳐있는 백악산 자락 석문사 찾아가는 길엔 초록이 한창이었는데요. 상주에서도 심산유곡, 가도 가도 첩첩 구불구불 길가엔 어느새 이팝나무 꽃이 고봉으로 피어 하늘거렸습니다. 딸내미는 초등학교 다닐 무렵 이팝나무 하얀 꽃을 보며 “가난한 집 살림살이” 같다고 했지요.
석문사로 걸어 오르는 가파른 길은 트럭과 굴삭기가 위태롭더니 절집은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마당에 공사 중인 극락보전을 비켜두고 오른쪽 다리를 건너 약사전으로 걸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지붕처럼 생긴 거대한 층암 아래 약사여래부처가 모셔져 있습니다. 이 바위 안에 굴이 있는데 보굴암(寶窟庵)이라 합니다. 세조의 딸과 김종서의 손자가 이 바위굴에 거처를 마련해 숨어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지요.
조선시대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으려고 계략을 꾸몄다. 그런데 대군의 한 딸이 아버지가 하는 일이 옳지 못함을 사뢰고 모의하는 일을 충신들에게 알리는 등 방해를 했다. 이에 수양대군은 “너는 내 딸이 아니다.”며 노여움이 대단했다. 수양대군의 과격한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부인은 딸과 유모를 불러 많은 패물을 챙겨 대궐 밖으로 내보냈다. 대군의 노여움이 풀릴 때까지 종적을 감추게 한 것이다. 딸과 유모는 초라한 행색으로 길을 나서 어찌어찌 보굴에 숨어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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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은 김종서는 수양대군의 욕심을 눈치 채고 단종을 보호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때 대군은 상황으로 보아 백성의 신망이 두텁고 조정에 권세가 당당한 김종서를 그대로 두고는 대망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미리 김종서를 살해할 계략을 꾸민 대군은 무사 두세 명을 대동하고 김종서 집을 방문했다. 그들은 마당에서 지나는 길에 갓끈이 떨어져 들렀으니 갓끈을 하나 줄 것을 청하여 큰아들이 집안으로 들어간 사이 김종서를 살해하고 이어 갓끈을 가지고 나오는 아들과 가족들을 닥치는 대로 역적의 죄를 씌워 멸족하려 하였다. 이 혼란 중에 유모의 도움으로 김종서의 손자가 탈출하여 피란길에 올랐다. 마치 어머니와 아들처럼 위장을 하여 은신처를 찾아 헤매다가 이 보굴에 숨어들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세조의 공주와 단종의 충신 김종서의 손자가 원수의 자손인 줄 서로 모르고 함께 살았다. 서로가 숨어사는 처지인지라 신분을 밝히지도 않았다. 바깥세상과는 담을 쌓은 채 생활은 궁색하고 두 남녀의 장래도 문제였다. 두 유모는 서로 상의하여 두 남녀를 혼인시키기로 하였다. 이로부터 앞굴에는 두 유모가 살고 뒷굴에는 신혼의 내외가 살게 되었다. 결국 원수를 사랑으로 승화시킨 굴이라 보굴암으로 부르게 되었다.
―『상주시사』 제4권 「문화예술 2-제2장 고전문학」(상주시, 2010)
| 약사전
야사에 의하면 세조가 자신의 딸 ‘세희’가 죽지 않고 숨어살았음을 알았지만 모른 척하고 족보에서 이름을 지웠다고 합니다. 더 이상 천륜을 저버리지 않고 딸의 행복을 바라는 아비의 마음이었겠지요.
칭다오에도 천년고찰 석문사라는 절이 있다는 군요. 그곳 역시 화북 석문사 보굴암 석굴처럼 마의암이라는 암자와 석굴이 있다는 겁니다. 같은 이름이야 어디든 많지만 흥미로운 일입니다.
동굴은 막히고 어둡고 은폐된 공간입니다. 그런데 한편 동굴은 빛나는 생성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본질적 근원 속에서 새로운 탄생을 위한 수행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조의 딸과 김종서의 손자 역시 세상의 속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고 그곳에서의 운명적 만남은 그 이후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아들딸 낳고 잘살았다고 방점을 찍어도 될 듯합니다.
약사전 들러 내려오는 길 아래 옥량폭포가 있습니다. 경사진 화강암벽 가운데로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 위에 길이 20미터가량의 평평하고 기다란 바위가 마치 대들보처럼 걸쳐져 있습니다. 이 긴 돌을 다리라고 부르지 않고 옥량(玉樑), 즉 옥(玉)으로 만든 대들보(樑)라고 이름 지은 연유가 거기 있겠지요. 밑에서 올려다보는 것과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사뭇 다른데요. 긴 돌을 받치는 돌 사이로 흐르는 물은 마치 하늘 문 하나를 열어놓은 듯 청청하게 쏟아져 내립니다.
| 아래에서 본 옥량폭포
닫히고 막힌 걸 열어주고 뚫어줄 때가 평화입니다. 얽히고설킨 걸 풀고 서로에게 마음이 흘러야 화목입니다. 진심으로 섬기고 모셔야 사랑입니다. 사람과 사람, 특히 자기 자신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고비를 만나고 많은 시련을 겪습니다. 삶도 결혼도 “가난한 집 살림살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가진 소박함입니다. 당당함입니다. 이치를 거스르지 않는 깨끗함입니다. 이 세상에 가난하게 던져져 터를 잡고 대들보를 세우고 서까래를 얹으며 집 한 채 짓는 사람의 무늬입니다.
맹자는 “빈곤에서 살아나고 풍요에서 죽어간다(生於憂患, 死於安樂)”고 했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회와 이웃, 그리고 너와 나 역시 가난한 바탕으로 만나고 걱정과 어려움은 살림의 살이(삶)로 소통해야 갈등이 풀어질 것입니다. 염려할 일은 풍요와 안락함 속에서도 빈곤에 허덕이는 삿됨이 아닐는지요. 결혼을 해서 맞닥뜨리는 현실이 어찌 유연하기만 하겠는지요. “두루 나누고 섬김으로 세상이 줄 수 없는 보물을 가진 가정”을 꾸릴 때 생(生)은 더욱 건강하게 피어날 것입니다. 수많은 관계와 관계 속에서 서로를 귀하게 섬기고 모시는 일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근본이 아니겠는지요.
| 위에서 본 옥량폭포
생각해보면 해준 게 없어 늘 짠한 딸입니다. 어릴 적부터 착하기만 해서 동생부터 챙기고 엄마아빠한테 큰 떼도 한번 쓰지 않았습니다. 일한다고 아플 때조차 옆에 있어주지 못할 때 많았습니다. 집 떠나 있을 때도 여느 엄마들처럼 요모조모 챙겨주지도 못했지요. 학교도 직장도 자기가 준비하고 자기가 실행하고, 그저 미덥고 고맙기만 합니다. 그런 딸이 결혼을 한다고 사위를 처음 인사시킬 때는 마음이 참 뒤숭숭했습니다.
그러나 여태껏 그랬듯이 딸내미를 믿고 응원했습니다. 사위 역시 믿음직스럽고 배려와 따뜻함으로 이런저런 일들을 잘 해냈습니다. 정작 둘이서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도 많았겠지만 손전화와 인터넷으로 상의하고 통화하면서 반짝반짝 예쁘게 결혼 준비를 하더군요. 부모로서 별로 할 게 없었습니다. 부탁하는 일 도와주고 의논하는 일에 조금 지혜를 보탰을 뿐이지요. 엉거주춤 어른들이 펼쳐준 대로 따라갔던 내 결혼 때 생각해보면 딸이 엄마 같습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유모와 유모가 왕가의 공주와 선비의 손자 손을 잡아준 건 가장 가난하고 흰 마음의 바탕이라 여겨집니다. 우리 엄마와 아버지는 친구사이였던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께서 중매하여 결혼을 하셨고 우리 부부는 시어머니와 엄마의 주선으로 만났습니다. 딸내미는 시어머니께서 “내 며느리 되면 참 좋겠다.”시며 아들을 만나게 해주었답니다. 인연의 뜨거움을 느낍니다.
딸내미 낳았을 때 울 엄마 그러셨지요. “아이고, 애기가 애기를 낳았네.” 엄마 살아계셨다면 저는 또 그랬겠지요. “아이고, 엄마. 그 애기가 결혼을 했어요.”
오늘 새벽에 열이 차올라 고생을 했습니다. 벌써 며칠 전부터 목이 붓고 열이 나고는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약을 먹고 쉬엄쉬엄 잠을 자며 몸살기를 달랬습니다. 어제 돌아가신 아버님 첫제사를 모시고 일을 치렀다는 안도감이 컸나 봅니다. 다시 목이 따끔거리고 근육통에 열이 오르락내리락 오한이 나다가 땀이 흥건하다가 힘이 듭니다.
올 것은 기어코 온다지요. 그것이 좋은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빛이 있으면 반드시 그늘이 있는 이치를 생각합니다. 약을 먹고 누워서 동굴 어둠 속에서 귀로 보고 눈으로 듣듯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감기몸살을 정중히 모시기로 합니다. 살면서 맘 아프다고 징징거리기만 했지 몸 아파 울어본 게 얼마 만인지요. 스스로를 어루만지고 쓰다듬으며 이젠 딸내미에 대한 그리움도 기꺼이 앓아야겠습니다.
비로소 봄입니다.
- 글쓴이 : 황구하
-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다. 영남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2004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 『물에 뜬 달』이 있으며 현재 반년간지 『시에티카』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