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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창식_마을이 있는 문경시]당포 마을, 도천 천한봉 선생의 화지구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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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있는 풍경
당포 마을
- 도천 천한봉 선생의 화지구곡 -
글. 정창식 사진. 김정미
당포마을 전경
“음식을 먹을 때 느끼는 떫은 맛, 바로 그 맛이 우리 민족의 소박성 아닐까요.”
도천 천한봉 선생, 대한민국 도예명장이다. 한낮의 휴일, 나른함도 잊은 채 여든다섯의 노인은 쩌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펼치고 있다. 끊어지지 않고 막힘없는 말은 유장(悠長)에 가깝다. 그래서, 객인(客人)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명장의 당당함과 식견에 감탄할 뿐이다.
도천 천한봉 선생
2000년도 KBS TV에서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를 ‘조선의 마지막 도공’이라고 불렀다. 세계적인 도예 강국인 일본에서는 그를 “고려다완(高麗茶碗)을 제일 잘 재현해 낸 사람”이라고 극찬하고, 그의 작품에 “반전의 미학과 공예적 가치”,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지를 넘어선 예술”이라는 최상의 헌사를 바치고 있다. 일본의 공영방송인 NHK TV의 Asia's Who's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아시아의 도자기 분야 중 최고의 위치에 있는 인물로 그를 소개하였다.
그는 우리 문경이 고려다완, 즉 조선 민요의 전통을 잇는 도자의 고향으로 자리 잡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차인들에게 다완과 차도구의 옛 가치를 일깨워주었다. 이러한 찬사는 그를 아는데 얼마의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사실, 우리가 정말 궁금한 것은 도자기 그릇을 만드는 그의 마음과 뜻이다. 예술가는 작품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낸다고 하지 않는가.
살펴보면 그의 그릇에는 백자 보다 분청과 칠기(漆器) 류의 도자기가 많이 보인다. 백자는 양반과 선비처럼 식견과 지체 높은 이를 위한 것이지만 분청과 칠기는 서민들의 일상에서 기능을 중시하는 소박함을 특징으로 한다.
성주봉을 배경으로 하는 명장의 집
그가 거주하고 있는 곳은 문경읍 당포마을이다. 그곳에 그가 지은 도천도자미술관 전시장에 유려한 서체의 액자가 걸려있다. ‘계종순업(繼從舜業)’이다.
승려이면서 독립 운동가였던 다솔사의 효범 스님이 그에게 직접 써준 글씨라고 했다. ‘순임금이 질그릇을 만들어 백성의 생활을 이롭게 했듯이 그 전통을 잘 이어 이로운 그릇을 만들라’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말을 한 사람은 또 있다고 한다. 봉암사 주지였던 도범스님이 그에게 “보기 좋은 것보다는 쓰기 좋은 것을 만들어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단 음식보다 익기 전 감의 떫은맛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나라의 민족성인 소박함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믿고 있다. 그의 작품은 이렇듯 보기 좋은 그릇보다 소박함과 서민적인 감성을 드러내는 작품들이 많다.
도천 도자미술관
“물항아리(水指) 중에 가운데가 찌그러진 모양이 있는데 처음부터 도공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에요.”
움푹 들어간 감자를 연상하게 하는 이 물항아리는 조금 부족한 듯 보이는 모습이 매력적이다. 질그릇 같은 느낌의 태토와 유약이 친근미가 있다. 이 물항아리는 도공이 불을 때기 위해 무심히 던진 장작에 맞아 생긴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어긋난 그릇이 예술적 의미에서 하나의 경치(景致)가 되었다. 그 모습에서 사람들은 미적인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연유를 모르는 일부 도공들은 완성된 형태를 일부러 눌러 인위적으로 모양을 내고 있다고 한다.
당포
그의 작품 중에 입이 넓은 화병도 왕족이나 양반의 시야로 보면 파격이며 볼품없는 모양새다. 그러나, 굽과 몸통보다 넓은 입에서 서민들의 거침없는 상상력과 활달함이 느껴지곤 한다. 이렇듯 그가 그릇을 만드는 마음의 중심에는 떫은 감에서 느껴지는 소박함이 있다.
문경읍 당포마을은 옛날 화지동이라 불렀던 마을이다. 화지(花枝)는 ‘꽃가지’의 한자음이다. 봄날 가지에 꽃이 피듯 아름다운 마을이다. 마을을 품은 성주봉은 모양 좋은 한 점의 산수경석(山水景石), 수석을 닮았다. 멀리 산 아래 펼쳐진 마을의 전경은 마치 그림 같다.
마을의 뒤를 아름답게 감싸는 성주봉
그 풍경에 반하여 18세기 우리 지역의 유학자이며 여행가였던 옥소 권섭은 이곳을 화지동천(花枝洞天)으로 이름 지어 신선이 사는 하늘마을에 비유하였다.
마을에는 수 백 년이 넘을 것 같은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동네 곳곳에 있다. 성주봉과 마을을 흐르는 물은 하늘나라 마을 ‘당포’를 완성하는 그림이다. 성주봉의 첫 봉우리인 수리봉은 비가 오면 낙수(落水)가 폭포가 되는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옥소(玉所) 권섭(權燮)은 이곳에 집을 지어 화지장(花枝莊)이라고 했다. 그리고 들에 가득했던 김매는 소리와 이를 구경하던 아이들의 모습과 바람소리에 섞여 절에서 들려오던 종소리 등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글로 지어 남겼다. 그리고, 이곳을 중심으로 구곡(九曲)을 만들었다. 문경읍 마성면의 마원(馬院)을 일곡(一曲)으로 시작하여 문경향교와 광수원, 고요마을에 차례로 숫자를 붙여나갔다. 성주봉 아래 당포마을, 즉 화지동을 오곡(五曲)으로 정하고 갈평마을과 관음 그리고 하늘재에서 아홉구비, 화지구곡을 완성하였다.
마을 숲으로 가는 길
옥소 권섭은 화지장기(花枝莊記)에서 온 마을이 감나무 숲이라고 했다. 그리고 가을이 되어 감이 붉어지면 마치 무릉도원 같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감나무는 그때처럼 많지 않다. 마을로 들어서는 초입의 솔숲과 마을회관 옆의 숲에서 오랜 세월의 여운을 느낄 수 있다.
감은 서민의 과일이다. 어린 시절 감이 익기 전 배고픔을 참지 못해 먹었던 그 떫은맛은 소박함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가 떠나고 한참이 지난 뒤, 당포마을에 가장 한국적인 소박함의 가치를 아는 도예 명장이 터를 잡았다. 감의 소박함을 잊지 않은 그는 대한민국 도예 명장이 되었고 세계인의 마음을 훔쳐내었다. 그렇다면, 옥소 권섭이 떠난 화지동천, 당포마을을 경영할 이를 굳이 멀리서 찾지 않아도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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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희 작가 |
김종필 도예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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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문요 김종필 도예가의 전시실
그와 작별을 나누었다. 그의 옆에는 자신의 재능과 열정을 닮아가고 있는 후계자, 천경희 작가가 있다. 그 또한 감의 소박함으로 훌륭한 도예가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또 다른 제자가 같은 마을 한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관문요의 김종필 도예가이다. 그 또한 수리봉 왼편이 보이는 산 아래에 요장을 지어 화지동천 한 켠을 경영하고 있다. 그는 몇 년 전 전국찻사발공모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였고, 또 얼마 전에는 한국관광공사에서 주관한 제20회 ‘대한민국관광기념품 공모전’에 ‘전통찻사발 축소형 찻잔’을 출품하여 입선함으로써 도예가로서의 진가를 한창 높이고 있다.
당포마을 솔숲
길을 나섰다. 마을 앞에 새 길이 보였다. 이 길은 문경읍 당포마을과 산북면 석봉마을을 잇는 단산터널의 시작점이다. 언젠가 여기는 당포마을의 화지구곡과 산북 큰 마을의 석문구곡을 연결하는 그래서, 문경읍과 문화산촌 산북 큰 마을이 하나가 되는 신작로가 될 것이다.
그때라면 당포, 화지(花枝)에 더 많은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릴 것이 분명하다. 마을의 초입 당포초등학교 앞 솔숲에 시원한 그늘이 드리워 있다. 그 솔가지에 머리를 가리고 사람들이 쉬고 있었다. 곧 가을이 오고 감이 익어 마을은 붉게 물들 것이다. 이곳은 당포마을, 옛 화지동천이다.
당포마을 솔숲
- 글쓴이 : 정창식
- ▪ 현 문경문화원 이사 ▪ 안동대학교 문화산업전문대학원에서 스토리텔링을 전공하였다. [주간문경]에 문경문화와 관련된 글을 연재하고 있다. 문경의 자연과 마을, 유적과 문화재 그리고 오래된 이야기들을 새롭게 봄으로써 문경문화의 가치를 높이고 싶어한다. ▪ 저서 수필집 "아름다운 선물 101" (2010) 에세이집 『아름다운 선물 101』 은 우리 인생에서 있어서 스치는 인연들과의 소중한 관계, 베풂의 마음 등 일상에서 느낀 감정들을 엮은 책이다. 수필집 "문경도처유상수" (2016) 주간문경에 2010년부터 연재하고 있는 문경문화와 관련된 글 중 57편을 선별해 책으로 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