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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구하_시로 거니는 상주]형을 공경하고 동생을 사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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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거니는 상주
형을 공경하고 동생을 사랑하고
글. 황구하
체화당
"누나, 추석 잘 쇘어?애들이 고모 집에 가고 싶다는데 가도 괜찮을까? 누나 힘들까봐."
추석 이튿날 오후, 동생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마침 긴 연휴 덕으로 우리 집에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안 맏이인 우리 집에서 추석 전날엔 시어머님 제사를 모시고 또 추석날엔 차례를 모시는지라 은근히 걱정이 됐나 봅니다.
사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추석 전날 시어머님 제삿날이면 시댁 사촌들까지 다 모여서 정작 추석날보다 더 북적북적하곤 했지요. 그러나 시숙부와 숙모님 거기다가 사촌아주버님 돌아가시고 나니 각자의 집에서 제사를 모시고 차례를 모셔야 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올봄 아버님까지 돌아가시고 두 시동생마저 이런저런 이유로 오지 못해 이번 추석은 쓸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나는 나대로 허전하고 서운한 기색을 애써 감추면서도 우리가 뭐 또 서운하게 한 건 아닌지 되짚어보기도 했지요.
마을 입구 연못
추석 차례를 지내고 나면 친정도 가고 했는데 친정도 없어진지 오래입니다. 종부인 엄마마저 저세상 사람이 되면서 그리 되었는데요. 형제들이 금산 뜬바위골 친정집 자주 들락거리긴 해도 빈집마냥 썰렁해져 몇 해 전 귀촌한 젊은 부부에게 전세를 준 이후 발길을 끊게 되었습니다.
우리 형제 3남 1녀 중 3남은 대전에 삽니다. 또한 사촌들도 주로 대전에 사는 관계로 고향 대신 일 년에 한 번씩 대전에서 사촌모임이 열리는데요. 그때는 작은어머니와 작은아버지 그리고 조카들까지 정말 흥성흥성합니다.
그 모임 이외에 볼 일을 보거나 우리 형제들 모임으로 대전에 종종 가는데요. 그럴 때마다 한 번은 큰오빠, 또 한 번은 작은오빠, 또 동생의 집을 돌아가며 머물곤 하다가 요즘은 주로 동생네 집에 갑니다. 동생네 집 볕드는 창으로 엄마가 마지막으로 머물던 중앙병원을 내려다보면 엄마 가는 숨결과 눈빛이 어른거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동생이라 좀 편하기도 하고 어린 조카들과 노는 재미가 쏠쏠하지요.
명절이면 형제들 생각이 더 간절합니다. 얼마 전 청리 체화당(棣華堂) 갔을 때 월간과 창석 선생 두 형제와 관련된 「형제급난도(兄弟急難圖)」이야기를 접하면서 친정 식구들 얼굴이 자꾸 겹쳐졌습니다.
체화당은 월간 선생의 셋째아들인 이신규(李身圭)가 1632년(인조 10) 9월에 지금의 달내마을에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월간 선생은 집이 다 지어지자 손수 ‘체화(棣華)’라는 편액을 걸고 만년에 늘 이곳에 거처하면서 후학을 가르쳤다고 하는데요. ‘체화’라는 말은 『시경(詩經)』의 「상체(常棣)」편에서 유래한 것으로 월간과 창석 선생의 뭉클하고 무한한 우애를 표현한 말입니다.
常棣之華 활짝 핀 산앵두꽃
鄂不韡韡 꽃받침도 화사하지 않는가
凡今之人 이 세상 누구라 해도
莫如兄弟 형제보다 친한 이는 없다네
체화당을 지을 당시 월간 선생은 75세, 창석 선생은 73세였다고 하니 두 분의 형제애가 얼마나 돈독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두 분의 우애는 「형제급난도」와 「형제상회도(兄弟相會圖)」를 통해서 익히 알려져 있는데요. ‘체화당’ 현판과 「형제급난도」는 지금 상주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섬김과 나눔의 큰집, 종가’ 국립민속박물관과의 공동기획전에서 볼 수 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서울에 있던 창석 선생은 영남지방의 피해가 심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고향으로 와서 의병을 모아 활동을 했습니다. 우복 선생과 고모담에 진지를 꾸리기도 했지만 미약한 군사력으로 크게 패하였습니다. 이때 형제는 포위망에서 탈출하다가 창석 선생이 곽란(급성위장염)으로 쓰러지게 되는데요. “형님, 제가 몸이 아파서 죽을 것 같으니 형님이라도 탈출하십시오.” 하며 형님에게 얼른 피신하기를 간곡히 청했답니다. 그러나 월간 선생은 동생을 업고 백화산에 이르게 되지요.
가는 도중 왜적을 만나자 월간 선생은 “하늘이 만약 지각이 있다면 우리가 죄가 없음을 알 것이다.” 하늘을 향해 소리치고, 또 산을 우러르며 “백화산 신령은 우리를 구해주시오.”라고 빌었답니다. 왜적을 만나면 동생을 잠깐 내려놓고 활을 당겨 꾸짖었는데 그 기세에 눌린 왜적이 주춤거리며 달아났다고 합니다. 그렇게 어려운 고비를 넘기며 가는 도중 정신이 혼미한 동생에게 오줌을 먹여 정신을 잃지 않게 하였다는데요. 산 정상까지 간신히 올라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훗날 창석 선생은 이를 회고하였는데요.
형제급난도
아! 형님은 미약한 몸으로 지치고 주린 가운데서도 동생을 업고 산을 올랐는데,
피곤함을 강건함으로 극복하여 마치 건강한 사람이 가파른 산을 오르는 것 같았다.
결국 적들의 흉악한 칼끝이 겨누는 상황에서 동생을 구해내셨다.
이것은 강인한 정신의 발로이거나 천지가 몰래 도운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 될 수 있었겠는가.
이를 통해 나는 사람의 정신은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창을 휘둘러 해가 물러나게 하고, 활을 당겨 파도가 물러나게 하며, 가슴을 때려 서리가 내리게 하고,
구슬프게 울어 성을 무너뜨렸다는 옛날의 일들이 어찌 참말이 아니겠는가.
적의 위험에서 자신을 구한 형의 큰사랑을 잊지 않고 있던 창석 선생은 연경의 화공에게 부탁하여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습니다. 1604년 이정구(李廷龜. 1564~1635)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갔을 때지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제형제급난도쌍운(題兄弟急難圖雙韻)」, 「구제급난도(求題急難圖)」라는 시를 짓고 「형제급난도」의 서문에 해당하는 「형제급난도서」를 짓기도 했습니다.
형제란 형체는 다르나 같은 기운을 타고 났기에 죽거나 살거나 괴롭거나 즐겁거나 언제나 함께하는 자들이니, 이것은 자연스러운 하늘의 이치이다. 그러나 세교(世敎)가 행해지지 않으면서 백성들은 양심을 잃어 자그마한 이해에 너와 나의 구분이 생기게 되었다. 하물며 큰 환란에 처하고 시퍼런 칼날을 만나 만 번에 한번 살아날까 말까 한 상황에서 서로 구제하는 일을 바랄 수 있겠는가.
“형제란 형체는 다르나 같은 기운을 타고 났기에 죽거나 살거나 괴롭거나 즐겁거나 언제나 함께하는 자들”이라는 창석 선생의 말씀이 가슴을 칩니다.
20여 년도 더 지난 일인데요. 공무원인 남편이 친구의 은행 보증을 선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이 잘못되어 아파트는 물론이고 월급까지 차압을 당하고 그 친구의 빚을 대신 갚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남편은 돈도 돈이지만 친구의 고의적 배신에 분노하고 치를 떨었습니다. 시어른들의 걱정과 안타까워하는 꾸중도 듣지 않고 술로 하루하루를 지탱했습니다. 가족에 대한 미안함으로 자신을 허물고 있다는 걸 왜 모르겠는지요. 크게 분노하고 크게 슬퍼하시라, 그렇게 믿고 기다려주기로 했지요. 그러나 그런 상황이 석 달 넘게 계속 되자 나도 모르게 지쳐만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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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사당과 창석사당 사잇길 |
창석 선생 신도비 |
어느 날 아침, 콩나물국을 끓여 아침밥상을 차렸습니다. 술 냄새를 풍기며 남편이 퀭하니 식탁에 앉았지요. 냉장고에서 소주를 한 병 꺼내 두 개의 유리컵에 나누어 따랐습니다. “한잔합시다.” 했더니 남편은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답을 들을 새도 없이 두 손으로 두 컵을 들어 ‘짠’ 부딪치고는 한 컵은 내려놓고 다른 한 컵의 술을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남편은 더욱 놀라 안 그래도 큰 눈이 더욱 뚱그래졌습니다.
“이혼합시다.” 한마디하고는 들이부은 술로 타들어가는 속을 참으며 “돈이 문제가 아니다. 함께 견디면서 해결하면 되는데 왜 혼자 죽으라고 죽으라고 자신을 망가뜨리냐. 부모님생각하고 반짝반짝 커가는 아이들을 봐라. 당신이 술 먹고 오면 나도 아침마다 이렇게 술을 먹겠다. 계속 이럴 거면 우리 그만 살자. 정리하자.” 뭐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당신 근 10년 동안 우리 식구 먹여 살리느라 애썼다. 고맙다. 그런데 오늘부터 술 안 먹고 들어오면 앞으로 10년은 내가 먹여 살릴게.” 뻥뻥 큰소리로 선언을 했지요.
남편은 그날 저녁부터 맑은 정신으로 귀가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일주일 후 나에게 일이 들어와 15년 동안이나 밥벌이를 해야 하는 고충(?)을 겪었습니다. 아파트 한 채 값이 되는 남의 빚을 3년 반 정도 걸려 갚을 수 있었는데요. 그 기간 동안 남편도 금주를 하고 어려운 가운데 참 예쁜 생활을 했습니다.
체화당
사실 그때 당시 남편에게 당당하게 큰소리로 선언할 수 있었던 건 두 오빠와 남동생 덕분입니다. 한참 힘들던 그 무렵 큰오빠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삼형제가 돈을 조금 모아 통장으로 넣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한 서방한테 절대 뭐라 하지 말고 그럴수록 니가 잘 챙겨. 시댁도 그렇고 애들도 그렇고. 좀 비싼 수업료 주고 인생 공부 크게 하는 거여. 돈 걱정이 젤 가벼운 걱정이라더라.” 통장엔 반년 동안은 먹고 살 수 있는 생활비가 들어와 있었습니다.
친정엄마 돌아가시고도 이제껏 삼형제와 세 올케에게 신세 참 많이 지고 살았습니다. 해마다 김장을 하면 각각 다른 김치를 한 통씩 챙겨주고 생일이면 얄궂게 엄마 생각 더 나라고 그러는지 꼭 눈물을 빼게 만들곤 했으니까요.
「형제급난도」와 함께 창석 선생 생일에 수연(壽宴)에 모여 즐거워하는 풍경이 담긴 「형제상회도」는 노년에 이르기까지 돈독했던 우애의 상징이 되고 있는데요. 형을 공경하고 동생을 사랑하는 이 형제애가 가족을 넘어 지역의 백성과 나라에까지 확대되었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최초의 사설 의료기관인 ‘존애원’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데 적극적인 참여, 상주 읍지인 『상산지』의 편찬 주관, 상주 문인들의 공동시집 『낙강범월시(洛江泛月詩)』에 나타나듯 ‘낙강시회’의 계승으로 문예부흥을 일으킨 점 등이 그것이지요.
체화당 종부의 가을걷이
명절 끝 허허로운 가운데 동생네가 온다니 마음이 금세 꽉 찼습니다. 연휴가 며칠 더 남았으니 조카들 손잡고 체화당에 가야겠습니다. 늠름한 형제처럼 기품 있는 체화당과 종부께서 일구시는 살림살이를 보면 또 울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월간사당과 창석사당 그 사이 오솔길도 천천히 걸어봐야겠습니다. 동네 입구 느티나무 아래 연못 물소리 깊어지고 한창 넓게 익어가는 달내마을 들녘, 그 가을풍경 속으로 들면 우리 형제 옛이야기 “꽃받침도 화사하”게 도란도란 피어날 것입니다.
- 글쓴이 : 황구하
-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다. 영남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2004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 『물에 뜬 달』이 있으며 현재 반년간지 『시에티카』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