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황구하_시로 거니는 상주]참말로 좋은 날
- 황구하(cultureline@naver.com)
참말로 좋은 날
황구하
하늘이 회색빛으로 찌뿌둥합니다. 날씨만큼이나 시절도 뒤숭숭합니다. 벌써 며칠째 앓는 두통이 심해져 잠시 바람을 쐬러 나섰습니다. 집 뒤편 북천 산책길을 걸었지요. 냇물에 모여든 청둥오리떼가 연방 물구나무서기를 하며 먹이를 찾느라 동심원을 그리고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거나 거니는 사람들, 북천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를 건너는 아이들은 마냥 한가로운데 ‘인빈간다리’ 위 자동차들만 쌩쌩, 바빠 보입니다.
예전에 ‘영빈관다리’ 가까이 관원을 접대하던 ‘영빈관(迎賓館)’이라는 객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영빈관다리’를 상주사람들은 ‘인빈간다리’라고 부르더군요. 성석제 작가의 소설집 『참말로 좋은 날』 「환한 하루의 어느 한때」에는 ‘인빈간다리’라는 꼭지가 맨 앞에 나옵니다. “아버지에게서 한자를 배운 소년 하나는 인빈간다리는 인(人)과 빈(貧) 사이(間)에 있는 다리라고 생각했다. 인이 북쪽, 빈이 남쪽이었다. 6·25 때 인민군이 내려온 방향이 북쪽이고 그 인민군에 쫓겨 피난을 갔다 돌아온 가난한 사람들이 읍내에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한 달 전쯤 상주도서관에서 성석제 작가를 처음 만났습니다. 엷은 웃음이 더없이 소탈하고 맑은 인상이었는데요. 상주도서관에서 ‘작가와의 만남’ 행사로 그를 모시게 된 것입니다. 당대의 작가를 읽지 않으면 당대의 작가가 될 수 없다고 하지요. 그날 제가 맡은 대담 진행 준비를 하면서 우선 읽었던 책을 챙기고 최근작과 초기작을 중심으로 꼼꼼히 짚게 되었지요. 에세이집을 곁들여 주변 이야기들을 풀어 가닥을 잡으며 즐거운 공부가 되었답니다.
성석제 작가의 작품에는 고향, 바로 상주와 연관된 장소 혹은 그와 비슷한 분위기의 농촌이 자주 등장합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이름이 ‘상주’도 있고 동네 이름이 실제 동네 이름인 ‘개운리’, ‘낙양’도 있습니다. 또 「작가의 말」에는 “갑장산 아래에서”라든지 “노음산 왕벚나무 아래에서”라고 밝힌 것도 있더라고요. 그는 상주에서 태어나 중학교 시절까지 고향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작품 절반 가까이 상주를 무대로 한 걸 보면 상주 사랑이 대단합니다. 그는 “특정한 장소에 가서 땅의 분위기를 느껴보고, 냄새를 맡아보고,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고, 그러면서 생겨나는 어떤 확신이 있어야만 문장을 쓸 수 있다.”고 하는데요. 그런 면에서 자신은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작가에게 상주는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 혹은 문학의 안태고향이라고 해도 될 듯합니다.
고향이 문학적 토대라서 그런지 에세이집 『꾸들꾸들 물고기 씨, 어딜 가시나』도 그렇고 음식 이야기 에세이집 『칼과 황홀』에 보면 상주 음식에 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골곰짠지를 씹으면 눈 밟을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한 ‘꼬드득’ 소리가 난다.” 라든가 “내 몸의 어느 한 부분은 오디가 만들었을 수 있고 내 기억의 깊숙한 곳에 있는 회로에는 분명히 뽕과 오디, 누에가 들어 있었다.”라는 구절도 보이는데요. 작가는 유난히 국수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음식 맛지도를 보면 유난히 국숫집이 많더군요. 상주에 사는 사람이면 익히 잘 아는 식당 이름들이 정겹게 등장을 하는데요. 남천식당, 매협묵집, 세천식당, 새지천식당, 일미식당, 진아씨멘집, 장마을, 은척 양조장, 커피가게 등이 그렇습니다.
장편소설 『투명인간』의 주인공 ‘김만수’처럼 그의 작품에는 조금 어눌하면서도 조금 모자란 듯한 유형의 인물이 자주 등장합니다. 미련스러울 만큼 헌신적으로 가족과 삶을 지켜나가는 ‘김만수’는 자신의 삶과 생각과 달리 가족이나 사회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상징적으로 ‘투명인간’인 셈인데요.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의 ‘황만근’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뚝심으로 살아가며 이웃을 돌보다 사고사를 당하는데요. 그 역시 과격하거나 특별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농사꾼은 빚을 지마 안된다 카이.”라는 낮은 어조가 “농사지봐야 그 빚 갚느라고 정신없다.”는 눈물겨운 울림입니다. 김만수나 황만근의 모습에서 오늘날 혹은 과거의 아버지, 형제자매를 읽을 수 있습니다. 과장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데요. 염무웅 선생의 말씀을 빌자면 ‘실물 크기’로 어우러져서 오히려 더 서늘하면서도 북받치는 뜨거움이 있습니다.
성석제 작가를 거론하면 ‘해학, 익살, 풍자’ 등의 단어와 함께 ‘소설이 즐겁다. 이 시대 이야기꾼이다’라는 말이 따라붙습니다. 1930년대 김유정의 소설 「봄봄」이나 「동백꽃」을 비유로 들기도 하는데요. 김유정의 해학성이 당대 농촌사회의 토속성에 닿아있다면 그의 해학성은 농촌 토속성을 넘어 도회적이고 현대적이기까지 합니다. 교과서에 실린 「오렌지맛 오렌지」의 인물 ‘비읍’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요. 주변을 둘러보면 꼭 ‘비읍’을 닮은 인물이 한둘씩 있지요. 소설 속 인물이나 이야기를 독자들은 작가 자신의 초상화가 아닌가 혹은 독자의 모습으로 대입시키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요즘 ‘웃픈’ 이라 해서 웃긴데 슬프다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지요. 사람에 대한 그의 깊고 그윽한 응시가 해학으로 초월되는 듯한데요. “소설 쓰는 사람으로서 내 관심사의 가장 앞쪽에 있는 것이 바로 사람이 사람으로 사람답게 사는 풍경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데 거기에는 삼라만상 중에 사람이 귀하고 높고 소중하다.”고 고백합니다. 세상을 간절히 살아본 사람의 품새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지요.
그는 사실 1986년 시로 등단을 하고 그 다음 소설을 썼습니다.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서문」을 보면 “무슨 말인지 나도 모를 시를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하면서 “계속 버려나가는 과정이 시를 쓰는 과정이라면 소설은 덧붙여나가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시에서 소설로 건너가기를 잘하셨다고, 돈이 좀 되지 않느냐고 싱거운 소리를 했더니 “아, 그건 맞는 말”이라고 화답하시더군요. “실질적으로는 청탁 때문이고 마감이 있어서이고 원고료도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하지만 정답에 가장 가까운 대답은 ‘소설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소설을 많이 읽고 좋아하고 소설 덕분에 행복했고 소설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다른 사람의 생각과 삶과 가치관과 오른쪽 다리 복합골절 같은 황당한 사고와 다양한 비유, 문장, 민주주의를 만나게 되었고, 무엇보다 지상의 삶이 재미있고 의미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에, 소설에 대한 은혜 갚음으로 소설을 쓰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 유희경 시인이 시집 전문 서점을 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3평 남짓한 공간에 시집 1,200여 권 정도 들여놓은 서점인데요. 이 주인장 시인께서 절판된 시집을 발굴해 조명하는 일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실천하고 있답니다. 그중 성석제 작가의 절판된 시집 『낯선 길에 묻다』랑 『검은 암소의 천국』 두 권을 어느 시인으로부터 기증받았다고 하더군요. ‘비매품입니다’ 문구를 붙여놓고 전시만 하고 있다는 소식에 무척 관심이 쏠렸습니다. 백석 시인의 시집이 칠천만 원에 낙찰돼서 화제가 된 이야기를 했더니 작가는 “제가 얼른 죽어야겠군요.” 해서 한바탕 웃었습니다.
성석제 작가는 ‘잡학도사’라는 별칭도 갖고 있는데요. 그의 작품에는 근현대사 및 그림, 음식, 여행, 고전 등 다양하고 방대한 분야가 드러납니다. 그만큼 많은 경험과 독서력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요. 어렸을 때는 주로 무협지를 읽었다는데요. 동네 책방에 자주 드나들던 그를 위해 아버지께서 책방 주인에게 부탁해서 일 년치를 한꺼번에 계산해줄 정도였다는군요. 소설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의 「책」이라는 꼭지에 보면 “책은 무엇인가, 엉뚱한 과학사이다. 책은 지성의 몰락이며 글쓰기의 유혹이다.……책은 천재의 정신병리의 발현이고 인간의 수상(手相)과 지문이자 표지가 떨어진 미학사전이다.……재앙, 짐, 한 사람의 생의 자취, 모험, 여행, 유적이며 폐허 아니면 그저 책, 돈으로 삼억 원, 종이로 팔면 몇 십만 원, 권수로 삼만 권, 이게 다인가.”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작가의 서가 책상 주변에 있는 책이 문득 궁금해졌는데요. 늘 많은 책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얼마 전 이사를 하여 아마도 지금은 『인도철학의 역사』가 책상 위에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는 자전거를 타고 서울에서 상주까지 온 적도 있다는데요. 그에게 여행은 곧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제주도에서는 “일생분의 걷기 여행을 경험했다”고 여길 만큼 한 달 동안 걸어서 다녔다고 합니다. 오름, 한라산 정상에도 오르고요. 마주치는 존재들을 읽어내며 외국에도 많이 다녀오셨더군요. “실크로드는 이미 어린 시절 내게 나 있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린 시절의 꿈길이 뻗어간 곳을 끝까지 가보고 상상하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 확인해보는 게 아닐까. 나는 아직 채 어른이 되지 못했다. 세상에는 가보아야 할 길이 아주 많이 남았으니” 그의 여정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겠지요.
연애소설로는 처음이라고 하는데요. 『단 한 번의 연애』라는 책입니다. 이 소설은 구룡포에 머물면서 집필했다고 합니다. 구룡포에 사는 권선희 시인이 이 책 이야기를 먼저 해주었는데요. 작가께서 권선희 시인이 이 소설에 등장한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난생처음 소설책이라는 걸 들고 한자리에 쭈굴시고 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을 읽었답니다. 발이 저려서 코에 침을 발라가며, 언제 나오나 언제 나오나 했는데 ‘땡땡~ 지나가는 뇨자 1인’ 정도로 나오더라고 깔깔 웃으며 이야기하더군요. 고래잡이의 딸을 사랑하는 한 남자의 운명적 연애를 그린 이야기라고 하는데, 본인의 연애담을 쓴 적이 있느냐고 여쭈었더니 “내 연애 이야길 왜 쓰죠? 아깝잖아요. 쓰게 된다면 쓸 게 없을 때 써야죠.”하며 웃으시더군요.
“우리 집은 그 동네에서 제일 농사를 많이 짓고 식구도 많은 집이었습니다. 가축도 많고 앞마당 뒷마당에 유실수도 많았습니다. 어리고 작은 내게는 엄청나게 광활한 공간이었지만 버려진 곳, 쓸모없는 존재는 없었습니다. 거름더미도 있고 물 잘 나오는 펌프도 있고 늘 그늘이 풍년 드는 뒤란도 있었고 고요하게 햇빛이 내리쬐는 장광도, 고추와 감 껍질이 마르는 지붕도 있었지요. 그런 것들이 제 인생에 다 각인되어 있다”고 하는데요. 그가 앞으로 더 자주 상주에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낙동강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상주사람들의 진솔하고 뜨거운 삶과 사벌, 동학 등의 역사적 이야기로 상주를 새롭게 조명하는 장편소설이 나오기를 소망해봅니다.
반가운 소식이 있는데요. 지금까지 작가의 이름으로 나온 책이 30여 권이 되는데 며칠 사이 책이 또 출간되었습니다. 『믜리도 괴리도 업시』라는 책인데요. 2013년부터 2016년까지 집필한 여덟 편의 단편소설을 묶은 책이랍니다. 첫 소설집을 출간한 이후 꼭 20년만이지요. 『믜리도 괴리도 업시』는 고려가요 「청산별곡」의 한 구절에서 인용한 것으로,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라는 뜻이랍니다.
설렁설렁 거닐던 산책길 한쪽, 돌확에 고인 물에 늦가을 풍경이 그윽히 담기는데요. 무거웠던 머릿속이 한결 가볍습니다. 이제 세상만물에 말을 걸고 이야기를 하게하는 그의 신작소설을 만날 생각을 하며 시절도 날씨도 내일은 맑음, 참말로 좋은 날을 꿈꾸어봅니다.
- 글쓴이 : 황구하
-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다. 영남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2004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 『물에 뜬 달』이 있으며 현재 반년간지 『시에티카』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