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정창식_마을이 있는 문경시]굴(窟) 깊은 동화 속 마을 "굴골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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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골마을"
정 창 식
❙굴(窟) 깊은 동화 속 마을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 속 같은 마을이 현실로 나타난다면 어떨까. 문경시 산양면 봉정1리인 굴골마을이 그렇다. 이 마을은 산북면으로 가는 지방도로 좌측에 위치해 있다. 마을의 형상이 마치 굴(窟)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깊은 굴속을 거닐듯 좁은 길을 한참 올라가면 갑자기 밝은 빛과 함께 보이는 마을. 입구에는 수백 년 된 고목이 서 있고 담 너머 대추나무에는 주렁주렁 전설이 열린 듯하고, 꾸불꾸불 산 아래에 이르는 길 끝에는 귀여운 요정들이 숨어 있을 듯하다.
❘굴골마을로 들어가는 길
❘마을 이정표_굴골길을 500m 앞두고 ❘고운 최치원 선생 시비
굴골은 신라 말의 유학자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을 시조로 하는 경주최씨 관가정공파의 후손인 송와공(松蝸公)의 손자가 17세기 경 입향한 이래 지금까지 세거해오고 있는 집성촌이다. 그래서, 이곳은 최치원이 말년에 은거했다는 가야산 홍류동 계곡과 비교될 수 있는 우리 지역의 숨겨진 마을이다.
❙백 년의 약속
❘마을입구 삼 백년 된 느티나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정월에 동네 어귀 소나무와 여기 느티나무 그리고 저 아래 참나무에 굵은
금줄을 매었어요.”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300여 년 느티나무 아래에서 마을 주민 최상조씨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그는 오래 전 고향인 이곳을 떠나 서울에서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2년 전 옛집으로 돌아왔다. 아니, 동화 속 옛 기억으로 되돌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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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와 함께 한 최상조 님(좌)
“정월 열사흘 날에 금줄을 나무에 매어놓으면 보름동안 아무도 동네 출입을 못했어요.”
대보름 전날 밤, 마을의 역사와 함께 한 느티나무 앞에서 동제(洞祭)를 지냈다고 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을제사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의 손길과 많은 음식들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여자와 노인들이 태반인 서른 명 남짓 마을사람들로서는 동제를 지낼 수가 없다. 그래서 6,7년 전 마을 사람들은 동제를 없애기로 하였다. 그리고 백 년 뒤에 다시 지낼 것을 약속했다. 그 약속을 잊지 않기 위해 글로 적어 제대(祭臺)밑에 묻어 두었다고 한다.
쇠락해가는 자연부락들의 문제가 이곳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서로의 약속으로 훗날을 기약함은 애향의 근본이 굳건히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되었든 그 약속이 이루어질 때 까지 이제 동제(洞祭)는 마을사람들의 마음속에 깃든 옛 이야기가 된 셈이다.
❙옛 이야기 1
살펴보면, 동화 속 옛 이야기는 동제만이 아니다. 각자의 삶 속에 깃든 개인적인 일화도 있고 마을 사람들이 함께 공유했던 사건들도 또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서로를 잇는 끈, 애향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1970년대 무렵에는 백오십 여 호(戶), 칠백 여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지금의 스물일곱 호 서른 여 명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일 수밖에 없다. 그때의 사람들이 겪었을 고단한 생활의 어려움을 지금의 우리가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최상조씨 또한 마찬가지이다. 70년대에 시내에 있는 중학교를 어렵게 다녔던 그의 이야기는 같은 세대였던 마을 사람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다. 새벽 일찍 아침밥을 먹고 집을 나서 산 위 잿봉서까지 힘겹게 올라가면 월방산 정상이 지척에 보인다.
여기에서 숨을 돌리고 산 아래 호계마을로 넘어가는데, 간혹 배가고파 산 중턱에서 도시락을 먹거나 졸기도 했단다. 그리고 강을 따라 영강교를 지나 시내에 있는 학교까지 걸어갔다고 한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니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시간개념으로 제 시간에 학교에 도착하는 것이 가능한지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에 그는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
일 년 중에 지각하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어요.
”
❙또 다른 옛 이야기들
❘봉정리 관세음보살 입상 (도굴의 흔적이 남아있다)
❘바위에 선각으로 새겨진 약사여래좌상
이 마을은 산 윗마을인 잿봉서 처럼 불교유적이 산재해 있다. 경북도유형문화재 308호인 약사여래좌상과 마애불이 산 중턱에 있다. 십여 년 전이었다고 한다. 문화재 절도범들이 헬리콥터를 이용해 한밤중에 관음보살이 새겨진 마애불을 훔쳐가려고 하였다고 한다. 그때 산으로 달려온 마을 사람들이 굳건하게 서 있는 저 마애불을 지켜냈던 것이다. 지금도 마을 주민들은 그때의 일들을 마치 무용담 늘어놓듯 펼쳐낸다.
“그때 도둑놈들이 마애불 바위에 감았던 밧줄이 지금도 누구네 집에 있다지.”
생각하면, 유서 깊은 이 마을에서 지켜내고자 했던 것이 마애불 만이었을까. 어쩌면 그보다 집성촌 특유의 깊은 애향심, 즉 ‘우리’라는 공통의 정서적 연대감이었는지 모른다.
이 마을에도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침간정(枕澗亭)이라는 정자였다. 바위에는 침간재(枕澗齋)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저 바위 위에서 낮잠을 자다보면 간혹 자기도 모르게 밑으로 굴러 떨어지게 되요. 그런데 중간
부분에 오목하게 파인 부분이 있는데 떨어지다가 그곳에서 멈추게 되요. 다친 사람이 아무도 없
어요. 신기하죠.”
❘가운데가 움푹파인 비석바위
정자가 있던 큰 바위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이 바위를 비석바위라고 했다. 과연 그의 말처럼 바위 중간쯤에 오목한 부분이 보였다. 이와 같은 에피소드는 마을을 떠난 이들에게는 고향을 기억하는 촉매가 되고, 찾아오는 이방인에게는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거리가 된다. 무엇보다 마을사람들에게는 사람과 고향을 잇는 보이지 않는 끈이 된다.
이제 알겠다. 일백 년 뒤에 끊어진 동제를 다시 잇겠다는 저 약속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이렇듯 그들은 마을 구석구석의 풀 한 포기 돌 하나에 깃든 갖가지 이야기들까지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에는 애향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들이 늘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끈들은 마을사람들로 하여금 백 년 뒤의 약속을 가능케 할 것이다.
❙꽃 같은 애향의 마음
시간이 늦어져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마을 출신 중에는 어떤 이들이 있느냐고.
그가 말했다.
“서울에서 약국을 하는 최창묵 조카가 선조인 고운 최치원 선생의 시비를 마을입구에 건립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최종윤 사장이 모교인 산양초등학교와 고향을 위해 좋은 일
을 해오고 있어요. 그 외에도 사업하는 이와 행정고시에 합격해서 공직에 있는 이들이 있어요.”
남향인 그의 집 툇마루에 앉아서 이야기를 듣다가 마당에 있는 감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렸다. 마을을 품은 월방산(月芳山)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꽃 같은 달이 뜨는 월방산은 알고 있을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이 마을에 살았던 그리고 지금도 살고 있는 사람들의 꽃 같은 저 애향(愛鄕)의 마음을.
바람이 마을 입구 느티나무에 머무르고 있었다. 천천히 동화 속 같은 굴골마을을 나왔다.
곧 달이 뜨겠다.
- 글쓴이 : 정창식
- ▪ 현 문경문화원 이사 ▪ 안동대학교 문화산업전문대학원에서 스토리텔링을 전공하였다. [주간문경]에 문경문화와 관련된 글을 연재하고 있다. 문경의 자연과 마을, 유적과 문화재 그리고 오래된 이야기들을 새롭게 봄으로써 문경문화의 가치를 높이고 싶어한다. ▪ 저서 수필집 "아름다운 선물 101" (2010) 에세이집 『아름다운 선물 101』 은 우리 인생에서 있어서 스치는 인연들과의 소중한 관계, 베풂의 마음 등 일상에서 느낀 감정들을 엮은 책이다. 수필집 "문경도처유상수" (2016) 주간문경에 2010년부터 연재하고 있는 문경문화와 관련된 글 중 57편을 선별해 책으로 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