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임은혜_연극으로 만나는 세상]청송 주왕산 전설이 만들어낸 인형극 ‘주왕이야기’
- 임은혜(cultureline@naver.com)
청송 주왕산 전설이 만들어낸 인형극 ‘주왕이야기’
임은혜
ⓒ 박재형
청송에는 주왕산이 유명하다. 그리 험하지도 높지도 않은 주왕산에는 독특한 바위들이 많아서 이국적인 자태를 보여준다. 봄에는 투명한 햇살이 번져나는 연두 잎사귀 사이로 붉은 수달래꽃이 피어나고 가을에는 노랗고 붉은 단풍이 산을 물들이면 무릉도원을 그린 한 폭의 동양화 같다.
주왕산에 내려오는 전설도 독특하다. 먼 옛날, 주도라는 사람이 이 산에 이상국을 건설하려다가 살해되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그가 중국에서 왔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인도에서 왔다고 하지만 정확한 근거는 없다. 인간의 역사 속엔 언제나 권력을 움켜쥔 자들이 있었고, 그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한다는 것은 반역 행위였기에 주도 역시, 권력의 화살을 피해갈 수 없었다. 전설에 의하면 주도는 신라의 왕이 보낸 마장군의 화살에 맞아서 죽었다고 한다. 그가 흘린 피가 사흘 내내 끊이지 않고 강물로 흘러들어가 땅과 강을 붉게 적셨다고 한다. 그 핏물로 젖은 땅에서 피어난 꽃이 수달래꽃이다. 수달래 꽃은 진달래보다 붉고, 철쭉꽃보다 약간 연한 꽃으로 주왕산에서만 볼 수 있는 자생화이다.
이러한 주왕의 전설을 배경으로 만든 인형극이 있다. 2009년 나무닭움직임연구소가 환경연극 작업을 하면서 지역의 민담이나 전설을 발굴하여 청송에 사는 아주머니들과 함께 만든 인형극 ‘주왕이야기’이다. 조롱박으로 인형의 얼굴과 몸통을 만들었고, 팔다리는 관절이 있어서 정교하게 움직일 수 있는 테이블 인형극 공연용 인형들이다. 중국의 당나라와 신라 시대의 의상을 조사해서 등장인물들의 의상도 아줌마들이 직접 바느질해서 만들었다. 여지껏 케릭터로 형상되지 않았던 주왕 전설 속의 등장인물들이 청송에 사는 평범한 주민들의 상상력과 손끝으로 창조되었다.
❙인형극 ‘주왕이야기’를 제작하고 있는 청송 주민 모습
인형극 ‘주왕이야기’는 주왕의 아들인 대전도군을 중심인물로 놓고 진행된다. 주왕 전설을 풀이한 자료에 의하면 주왕의 아들은 어릴 적부터 글 읽기와 사색을 좋아하고, 천체의 현상을 관통하였다. 대전도군은 아버지에게 군사를 일으켜 권력을 빼앗는 일이 옳지 않은 일이니 돌이켜 생각하라고 말하고, 천문을 살펴보오니 아버지의 직성(直星;사람의 나이에 따라 그 운수를 맡아본다는 아홉별)이 광체가 없으니 가히 큰일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 했다고 한다. 대전도군은 아들의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는 아버지를 따라 요동 땅에 이르러 당나라를 떠나올 때에도 울부짖으며 따라왔고, 마침내 아버지가 마장군에게 화살을 맞아 숨을 거두는 모습까지 지켜보아야 했다. 아버지의 운명을 미리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막지 못해 이국 땅 장수에게 아버지의 목이 베이는 것을 숨어서 지켜보아야 했던 아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마장군 일행이 주왕의 머리를 베어서 당나라 왕에게 바치러 가던 도중 태풍이 심하게 일고 모래와 돌이 하늘높이 날아와 배가 전복되었다. 대전도군을 잘 아는 사람들은 대전도군의 효성이 지극하여 풍랑이 일어 전복되었다고 했다. 인형극 ‘주왕 이야기’의 시나리오는 아버지를 잃게 되어 슬픔에 가득 찬 대전도군이 강으로 떠내려 온 아버지의 머리를 건져올리면서 주왕을 회상하는 이야기로 진행된다. 아버지와 함께 주왕산으로 숨어들어와 살다가 부상당한 흰사슴의 다리를 고쳐주고, 백 년 묵은 지네에게 잡혀 먹힐 뻔한 여인을 구해주었던 이야기, 아버지와 함께 주왕굴에 숨어 살다가 아버지의 최후를 지켜봐야할 때까지의 이야기들이 인형극으로 펼쳐진다.
❙인형극 ‘주왕이야기’를 연습하는 모습
전설에 의하면, 아들 대전도군은 주왕의 장사를 지낸 후에는 세상일이 무상하고 부귀공명이 뜬구름과 같음을 깨닫고 삭발하여 주왕산을 떠났다고 한다. 매년 주왕의 기일이 되면 흰사슴을 타고 주왕산에 왔다가 사라지곤 하기를 백여 년이 넘도록 했다는데, 그가 언제 어디서 세상을 떠났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인형극 ‘주왕이야기’ 마지막 장면에도 수달래꽃이 피어난 주왕의 무덤가에 흰사슴을 타고 날아 오르는 대전도군의 모습이 나온다. 또한, 주왕산의 아름다운 계곡 절골에 내려오는 전설 ‘지네 이야기’를 버무려서 빈약한 주왕 전설의 서사를 채우고 있다. 주왕과 대전도군이 신라 마장군 일행을 피해 절골에 숨어들어왔다가 백년 묵은 지네에게 바쳐진 처녀를 구하는 장면이다. 지네는 주왕이 몸을 숨겼다가 죽게 되는 주왕굴에 살고 있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지네는 주왕에 의해 제거되지만 역설적이게도 주왕 역시, 그 장소에서 죽게 된다. 살기 위해 몸을 숨긴 그 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운명... 결국, 삶과 죽음은 우리 곁에 늘 함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래의 글은 인형극 ‘주왕 이야기’에는 주왕이 죽기 전날, 아들 대전 도군과 아버지 주왕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대전 : 아버지의 별이 흐려졌습니다.
주왕 : 내가 곧 죽겠구나.
대전 : 아버지께서 꿈꾸시는 세상은 도대체 어떤 세상입니까
주왕 : 네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세상과 같지 않겠느냐.
대전 : 흰 사슴과 호랑이가 평화롭게 뛰어다니고, 꽃이 만발하고, 인간들에게서 욕심과 질투가 사라지고, 전쟁도 없고,
배고픈 사람도 없는 그런 세상이요?
주도, 말없이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대전 : 그런 세상이 가능할까요?
주도, 일어나서 물길을 열고 바깥을 살펴본다.
화살이 날아온다. 주도의 가슴에 박힌다. 주도가 화살을 붙잡고 떨어진다.
주변이 핏빛으로 물든다.
-인형극 ‘주왕이야기’중에서.
주왕산에 얽힌 전설은 주왕이 꿈꾸었던 이상국, 유토피아를 상상하게 한다. 주왕이 산성을 쌓았던 흔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주왕산 자하성터의 이끼 낀 돌들을 볼 때마다 주왕이 꿈꾸었던 이상 세계는 어떤 세상이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주왕의 이상세계란 결국 주왕의 전설이 만들어지고 회자되었던 시대의 청송 사람들의 소망이었으리라.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청송은 지리적으로 고립되어있는 오지이고, 겨울은 너무나도 춥다. 이 고립된 지역에서 겨울을 이겨낸다는 것은 생존을 위한 투쟁과도 같은 일이다. 고립감과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야 했던 산촌 사람들이 만들어낸 주왕은 그들이 이겨내야 할 겨울, 동장군을 상징할 것이다. 떨쳐내고 싶은 고립감, 극심한 추위와 두려움을 의미할 것이다. 그 주왕을 죽이기 위해 말을 타고 뒤따라오는 마장군은 봄의 기운으로 볼 수 있겠고, 주왕의 피로 물든 땅에서 피어나는 수달래꽃은 겨울을 죽이고 승리한 봄의 환희일 것이다. 그러니깐 주왕이야기는 추위와 고립감 속에서 봄을 기다리는 지역 공동체의 구체적인 삶으로부터 만들어진 이야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인형극 ‘주왕이야기’ 를 공연하는 모습 (2010년 청송 사과연극제) ⓒ 박재형
숨겨진 전설을 새롭게 해석하여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와 인물로 재현해내려는 노력은 공동체가 해체되어가고 전통의 가치가 외면당하는 세태를 치유하는 소중한 실천이다. 특히, 인형극 ‘주왕이야기’는 지역주민에 의해 만들어지고 연행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옛 선조들의 소망이 담긴 이상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시점으로 더듬어보고, 성찰하면서 내일을 준비할 수 있는 가르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형극 ‘주왕이야기’는 아직 주왕산 전설이 지닌 인문학적 해석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극적인 이야기나 등장인물의 완성도 역시 아직 미흡하지만, 지역 공동체의 민담과 전설에 애정을 갖고 지속적으로 인형극 작업을 하고자 하는 청송지역아줌마들이 있기에 인형극 ‘주왕 이야기’는 늘 새롭게 다시 태어나 지역 주민들과 교감하는 공연 문화로 자리잡아갈 것이다. 할아버지 세대에서 아버지 세대로, 그리고 지금 자라고 있는 아이들에게로 따스히 전해져오는 옛이야기, 청송의 아줌마들에 의해 빚어진 인형극 ‘주왕 이야기’가 청송에서 오래오래 꽃피어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 본 글과 컬처라인 15호에 실린 "연극으로 만나는 세상" 의 사진 자료는 박재형(경상남도 함안군) 님으로부터
제공받은 사진입니다. 아울러 사진제공에 도움을 주신 박재형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 글쓴이 : 임은혜
- 극작가, '나무닭움직임연구소'는 청송군 청송읍 송생리에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