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컬처라인_마을이 있는 풍경]청량산을 가보지 않고서는 선비라고 할 수 없다
- 류명화(cultureline@naver.com)
“
청량산을 가보지 않고서는 선비라고 할 수 없다
”
류명화
❙혁명처럼 초록이 지상을 장악하고도 모자라 심장을 요동치게 하니 5월은 진정한 청춘이다. 녹음으로 짙어만 가는 5월은 어디에서건 싱그러운 초록빛 청량함에 물들 것만 같으니 그 청량함이란 단어는 곧 청량산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나의 몽상은 파란 겨울하늘과 바위벽을 치고 솟아오르는 눈보라까지 생각나게 한다. 이렇듯 이름만으로도 청량함이 느껴지는 산이 있어 소개할까 하니 지금부터 함께 떠나보도록 하자.
출발에 앞서 오늘 함께 걸을 청량산(淸凉山)은 봉화군 명호면과 안동시 도산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마치 푸른 주단을 깔아 놓은 듯 맑은 낙동강물이 산자락을 따라 휘감아 흐르고, 석벽처럼 열두 봉우리가 속세를 경계하며 우뚝 서 별유천지를 이루는 곳이다. 그리고 그 산을 배경으로 시대를 주름잡았던 역사적 인물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곳이기도 하다.
봉화읍으로부터 청량산은 35번 국도를 따라 안동 방향으로 약30여분 거리에 있으며 푸른 낙동강이 국도와 나란히 청량산까지 이어져 있다.
❙청량산 삼거리에서 방향을 틀어 좌측 긴 다리 건너면서부터 청량산은 시작된다. 청량산과 마을을 잇는 이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는 배로 드나들어야 했으나 다리가 놓이므로 인해 넓은 강을 단숨에 지날 수 있게 됐다. 이 다리가 놓인 것도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라고 하니 다리가 없던 당시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면 승용차로 건너는 편리함 보다 나룻배를 타고 유유자적 청량산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낭만적일 것 같다.
❘청량산으로 들어서는 입구
❙청량산 안내소로 불리는 이곳 또한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광석’이라는 어엿한 지명이 있었다. 넓은 바위들이 유독 많아서 ‘광석(廣石)’이라는 지명이 붙게 됐으며 알고 보니 이 광석들은 선사시대의 고인돌로 당시 다리공사 과정에 일부는 손실되었고 한 점만이 지금의 청량산박물관 뒤뜰에 옮겨져 자리하고 있다. 이미 어로, 채집을 하던 선사시대부터 청량산과 낙동강을 배경으로 터를 잡고 문명이 발전해 왔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렇듯 아주 오랜 시간동안 낙동강은 뭇사람들의 발길을 경계하며 청량산을 지켜온 까닭에 쉽게 범접할 수 없던 곳이었으나 이 다리가 놓임으로 인해 전국 어디서나 당일 산행이 가능해 졌으니 머물고 쉬어 갈 여행객들의 발걸음마저 재촉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청량교가 놓이기 전에는 이 자리에 광진 나루터가 있었다.
광석나루터라는 옛 지명을 대신해버린 청량산 안내소를 막 통과하면 우측 길가에 우뚝 솟은 퇴계 선생의 시비가 지나는 길손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청량산을 유독 사랑했던 퇴계 선생은 자연과 학문을 대함에 있어 이 시와 같기를 당부하는 글 같아 산행에 앞서 함께 읽고 그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讀書如遊山(독서여유산) - 이황(李滉)
讀書人說遊山似(독서일설유산사) 사람들은 글 읽기가 산을 유람하는 것과 같다더니
今見遊山似讀書(금견유산사독서) 이제 보니 산을 유람하는 것이 책 읽는 것과 같구나!
工力盡時元自下(공력진시원자하) 공력을 다하면 스스로 내려오는 법
淺深得處摠由渠(천심득처총유거) 얕고 깊음을 아는 것 모두가 자기에게 달려있네
坐看雲起因知妙(좌간운기인지묘) 조용히 앉아 일어나는 구름을 보고 오묘함을 알고
行到源頭始覺初(행도원두시각초) 발길이 근원에 이르러 비로소 시초를 깨닫네!
絶頂高尋勉公等(절정고심면공등) 높이 절정을 찾으려 그대들처럼 힘썼지만
老衰中輟愧深余(노쇠중철괴심여) 늙어 중도에 그친 나를 깊이 부끄러워하네.
❙이 시에 선생은 “독서(讀書)는 유산(遊山)이고 유산은 독서”라고 했다. 이는 책 읽기를 자연에서 노는 듯 하고, 자연에서 노는 듯 공부하라는 말 같으니 생태적 자연환경과 유교적 인문사상을 중요시했던 퇴계 선생의 가르침은 이 시 안에도 깊숙이 배어 있었다. 퇴계 선생이 유독 사랑했던 청량산은 본디 퇴계의 문중 산으로 그의 5대 고조부 이자수(李子修)가 송안군으로 책봉되면서 나라로부터 받은 봉산(封山)이었다. 청량산과 퇴계 선생의 인연은 그의 나이 13세 되던 해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堣)의 가르침을 받으면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송재는 관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틈틈이 조카인 퇴계와 사위 조효연(曺孝淵)을 친히 가르쳤다고 한다. 퇴계의 첫 인격적 스승이 숙부 송재 였다면, 그의 생태적 자연관의 스승이자, 첫 시작은 바로 이곳 청량산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청량산은 그에게 있어 정신적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독서여유산’이라는 시를 통해 당부하셨듯이 단순히 산행을 위한 산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 배우는 학습장이라 생각하며 오늘 산행의 들머리인 입석으로 향한다. 오늘은 청량산 여러 코스 가운데 입석에서 출발해 금탑봉-자소봉-탁필봉-연적봉-뒤실고개-청량사-입석으로 회귀할 계획이며 거리는 6km 정도이며 약 3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청량산 안내도
❙입석을 시작으로 지금부터 금탑 봉까지의 길은 소나무와 관목들이 잘 어우러진 호젓한 숲길이다. 청량산은 밖에서 보면 울퉁불퉁한 바위산으로 등산로가 거칠 것 같지만 막상 숲길로 들어서면 고요하고 아늑한 오솔길처럼 길은 아주 순한 편이다. 숲길을 걷다보니 이것저것 잡식을 하며 밖으로부터 얻은 음식을 씹어 삼켜야만 명을 이어가는 인간들과는 달리 햇살 한 조각, 이슬 한 방울로도 스스로를 부양하는 나무의 삶은 얼마나 고귀한가. 이렇게 숲과 호흡을 나누며 걷다보니 묵언수행이 따로 없다는 생각과 함께 스님들이 속세를 떠나 불도를 닦으려고 산으로 찾아드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그러고 보니 이곳 청량산은 불교문화의 흔적이 유독 많이 남아 있는 산이다. 앞에서 청량산은 맑고 서늘함이 느껴지는 산이라 이야기 했지만 청량산은 본디 불도를 깨끗하게 닦을 수 있는 곳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중국 화엄종의 성산인 청량산처럼 보살봉, 금탑봉, 연화봉, 반야봉, 문수봉과 같이 봉우리마다 불교적 이름을 붙인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며 그런 이름의 봉우리들을 모아 놓은 청량산 또한 산 전체가 불교의 터전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청량산도 시대를 거스를 수는 없었는지 고려 말 최치원을 비롯해 퇴계 이황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청량산도 유교의 성지로 변하게 되었다. 그리고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청량산 열 두 봉우리마다 새로운 유교적 이름을 붙이게 되면서부터 보살봉은 자소봉으로 의상봉은 장인봉으로 불리기 시작하고 다른 봉우리들도 선학봉, 탁필봉, 경일봉처럼 유교적 이름으로 바뀌게 되자, 불교의 터전이었던 청량산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유교의 터전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렇듯 시대흐름에 따라 종교도 철학도 변해 왔듯이 수많은 역사적 인물 또한 이곳 청량산을 거쳐 갔으니 그로인한 유불선(儒佛仙) 사상이 낳은 숱한 전설과 이야기들은 봉우리마다 이름을 달리하면서도 깊숙이 녹아들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많은 이야기들 속에 등장하는 대표적 인물로는 신라시대 승려 원효, 의상 그리고 통일신라시대의 명필 김생이 있고, 고려시대 명문장가로 칭송받았던 최치원 그리고 조선시대로 들어서면 대학자 퇴계 이황이 청량산과 관련된 일화에 주요 인물로 출현한다. 퇴계는 이곳 청량산에서 조선 성리학을 집대성 시켰고, 그 후 그를 따랐던 제자들과 선비들은 청량산을 퇴계 학문의 성지로 여기게 되었다. 이렇게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거쳐 간 청량산을 바라보니, 명산이 명인을 만드는 것인지 명인이 명산을 만드는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청량산은 시대마다 큰 인물들을 배출한 명산임에 틀림이 없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을 따라 그 옛날 역사에 큰 획을 그었던 그분들도 이 길을 걸었다 생각하니 왠지 숙연해진다. 뒷짐을 지고 사색에 빠져 느릿느릿 걷다보니 어느덧 3단 케이크처럼 생긴 거대한 바위산 ‘금탑봉’에 이르렀다. 치원봉(致遠峰)으로 부르기도 하는 이 봉우리를 중심으로 치원암을 비롯해 다섯 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상 청량암의 자리로 추정되는 위치에 응진전만이 남아 거대한 금탑봉을 등에 업은 채 오가는 산객들을 맞고 있었다.
❘금탑봉
❙돌담길을 따라 응진전으로 들어서니 683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명과 함께 내부에 16나한상과 공민왕의 부인인 노국공주 상이 모셔져 있음을 문화해설판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엄청난 바위아래 자리를 잡은 응진전은 다소 위태로워 보이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서면 신기하리만큼 고요하고 아늑한 곳이다. 응진전 열린 방문안으로 살며시 들여다보려는 순간 호법신장의 주먹만한 매부리코와 휘둥그레 뜬 눈이 정면으로 마주치는 순간 너무 놀라 기절하는 줄만 알았다. 출입문을 지키는 호법신장 외에도 응진전 내부에는 석가삼존불을 중심으로 좌우 나란히 16나한(羅漢)이 모셔져 있으며 이 나한은 석가부처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과 역대 여러 나라에서 성자로 추앙받았던 고승들이다.
이곳에 모셔진 16나한은 석가여래가 열반한 이후에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열반에 들지 않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면서 불법을 수호하는 성인들이며 나한은 응진(應眞)의 뜻을 갖고 있어 나한상을 모신 곳을 응진전 또는 나한전이라고 부르고 있다. 제각기 표정과 생김이 다른 나한상은 종교적 위엄을 갖추었다기보다 오히려 귀엽고 익살스럽기까지하다. 여기에 있는 16나한은 노국공주가 홍건적 퇴치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뜻에서 손수 시녀들과 함께 상을 깎아서 모셨다고 전하며 이는 홍건적의 난으로 인해 노국공주와 함께 공민왕이 청량산으로 피신해 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고개를 살짝 돌려 문밖을 주시하는 호법신장의 휘둥그레 뜬 눈과 매부리코를 보면 깜짝 놀랐다가도 이내 웃음 짓게 된다.
❘응진전 내부
노국공주의 애환이 담긴 응진전 나와 돌담길을 따라 다음 목적지인 풍혈대를 향 걷는다. 산모퉁이 하나쯤 지나왔을까? 그리 멀지않은 곳에 풍혈대를 가리키는 날개 형 이정표 앞에 도착했다. 청량산을 찾는 많은 등산객들은 이곳 풍혈대를 그냥 지나치기 일쑤지만 신라 말 유학자이며 최고의 문장가 최치원이 말년에 은둔을 결심하고 청량산으로 들어와 이 자리에서 독서와 바둑을 즐겼던 곳이라 하니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풍혈대는 독서대라 하기도 하며 넙적한 바위가 천정을 이루고 남북으로 굴처럼 트여 있어 무더운 여름철에도 시원한 바람이 샘처럼 솟아나는 ‘바람샘’ 같은 곳이다. 그래서 풍혈대(風穴臺)라는 이름이 붙었는 모양이다. 귀뚜라미 울고 별이 총총히 박힌 가을밤에 이곳 풍혈대에서 비박을 할 수 있다면 그때는 또 어떤 느낌일지 혼자 상상해본다.
❘풍혈대 밖으로 보이는 연화봉
❙풍혈대를 내려오면 바위절개지 아래 작은 샘을 만나게 되는데 이 물을 최치원이 마시고 총명해졌다 해서 이름하여 ‘총명수’라 부른다.
기억력도 떨어지고 건망증도 심한지라 총명수라는 이름만 들어도 솔깃해지니 어찌 마시지 않고 지나칠 수 있겠는가? 풍혈대에서 쐰 청량한 바람으로 머리를 식히고 총명수 한 사발에 총기까지 되찾았으니 오늘은 이것만으로도 흡족한 날이다. 끊없이 솟아오르는 총명수 옆으로 최치원이 그의 이름을 따 치원암(致遠蓭)이라는 암자를 짓고 기거했다 하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으니, 천 년 전 그의 흔적을 찾는 일은 사막에 떨어진 동전을 찾는 일처럼 까마득하기만 하다. 풍혈대와 총명수를 지나면 길은 다시 호젓해지고 등산로 저편으로 펼쳐지는 풍경에 놀라 저절로 발이 멈춰진 곳 이곳이 바로 어풍대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열두 봉우리가 꽃잎처럼 둘러싼 가운데 꽃술인양 단아하게 자리 잡고 앉은 청량사는 분명 법당 안에 모셔진 부처님의 모습과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녹음이 짙어가는 5월의 청량사는 부처님의 지혜가 온 세상을 밝히듯 온통 붉은 연등으로 가득하다. 연등이 환하게 불을 밝히는 청량사의 밤풍경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기암괴석의 바위산을 배경으로 청량사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이곳 어풍대는 청량산 많은 전망대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청량산을 찾는 사람들은 이 길을 거닐며 자연을 음미하고 풍월을 노래한 곳이라 해 ‘어풍대(御風臺)’라 이름지었다 하나 이시대의 사람들이 이곳 어풍대에 서게 된다면, 풍월을 읊기보다 너나 할 것 없이 제일 먼저 스마트 폰이나 카메라를 꺼내 들게 될 것이다.
❘어풍대는 청량사와 청량산을 사진에 담기 가장 좋은 곳이다.
❘연등으로 가득한 청량사 야경
❙멀찌감치에서 기암괴석들을 배경으로 아름답게 자리 잡은 청량사를 충분히 만끽한 후 경일봉을 향해 오르다보면 커다란 절벽 중간에 움푹 파진 석굴과 마주하게 되는데 바로 이곳이 통일신라시대의 명필이며 ‘해동(海東)의 서성(書聖)’ 동국서예의 제1인자로 불렸던 김생(金生)이 10년간 신필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필법을 익혔던 김생굴 이다. 옆으로 나란히 또 하나의 석굴이 있는데 처마처럼 돌출한 바위 끝으로 낙수가 끊임없이 떨어지는 것으로 봐 이곳을 ‘김생폭포’라 부르는 모양이다. 폭포라고 하면 당연히 흰 물줄기가 거칠게 쏟아져 야겠지만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이 전부인 이곳을 폭포라 하자니 다소 민망할 따름이다. 비가 충분히 온 다음날 들른다면 멋진 폭포수를 볼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지금은 갈수기라 졸졸 흐르는 정도의 물이 폭포수의 전부다.
❙김생굴을 지나 지금부터 자소봉 까지는 꾸준한 오르막길이다. 특히 자소봉 전망대로 가는 철계단은 동화 속에 등장하는 하늘사다리처럼 수직에 가깝다. 청량산 열두 봉우리 중 세번째로 높은 이곳을 예전에는 ‘보살봉’이라 불렀으나, 주세붕이 ‘자소봉’이라 이름을 붙이고 난 후부터 지금까지 ‘자소봉’으로 불리고 있다. 끝없이 펼쳐진 산과 들 그리고 사람이 사는 마을이 같은 그림속에서 정겹게 자리하고 있다. 산행에서 정상은 내 삶의 공간을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한 점에 가까운 저 작은 삶의 공간에서 우리는 날마다 바동거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 한 점이 내 삶의 전부인 양 그렇게 살았던 것이다. 사방으로 펼쳐진 조망을 뒤로하고 오른만큼 내려가야만 하는 것 또한 산행을 통해서 배웠으니 이제 다시 내려 가보자.
❘자소봉에서 바라본 영양 일월산
❙자소봉에서 내려와 서쪽으로 연이어 탁필봉과 연적봉을 지나게 되는데 탁필봉은 봉우리 생긴 모양이 붓끝을 모아놓은 것 같다고 해서 ‘필봉’이라고 부르다가 주세붕이 중국 여산(廬山)의 탁필봉과 견주어 ‘탁(卓)’자를 덧붙여 탁필봉(卓筆峯)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같은 의미로 ‘문필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뾰족이 외따로 우뚝 서 있는 탁필봉과 자소봉 그리고 연적봉은 마치 삼형제처럼 나란히 서 있으나 아쉽게도 연적봉을 제외한 두 봉우리의 정상에는 오를 수가 없다.
❙삼형제 중 막내인 연적봉을 지나 완만한 능선 길로 내려오니 내 청량과 외 청량을 경계하는 뒷실고개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하늘다리까지는 왕복 30여분정도 소요되지만, 오늘은 들르지 않고 바로 청량사로 내려간다. 청량사로 내려오는 숲길은 다래 넝쿨과 다양한 관목들이 잘 어우러져 짙은 그늘을 선사하고 다양한 꽃향기와 풀냄새의 출처를 눈으로 찾아가며 내려오다 보니 벌써 청량사 유리보전 뒷마당 이다. 청량사 유리보전에 도착하니 사방으로 시원스레 트인 조망 가운데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무엇 보다 영화워낭소리에서 노부부가 죽은 소의 명복을 빌며 절하던 5층 석탑과 삼각우송이다. 탑을 중심으로 좌측으로 금탑봉이 그림처럼 펼쳐지고 우측엔 연화봉이 그에 뒤질세라 장엄하게 자리하고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으나 청량사 5층 석탑 앞에 이르면 시야는 시원하게 열려 있다. 봉우리마다 기가 모이는 연대에 석축을 쌓아올리고 그 위에 5층 석탑을 세웠으니 조망은 물론 주변 환경과 잘 어우러져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으며 화려하지도 소박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 이렇듯 어느 한곳 나무랄 데 없는 청량사는 종교와 상관없이 보는 이라면 누구나 그 아름다움에 매료될 것이다. 화엄경에 ‘문수보살의 정토는 동방의 청량산’이라 했다하니 청량산 붉은 석축 위에 단아하게 자리 잡고 앉은 청량사가 바로 문수보살의 정토가 아닐까. 수천 년 전에는 청량사를 중심으로 골짜기마다 청량사 부속 암자들로 가득했을 터이니, 과연 말 그대로 동방의 정토가 바로 이곳이 아니었을까. 청량사 보물로는 공민왕의 친필인 ‘유리보전(琉璃寶殿)’ 현판과 종이를 녹여 만든 ‘지불(紙佛)’이 있다.
❘청량사 유리보전
❙청량사는 원효대사의 창건 이후 여말 선초에 고봉 법장선사가 다시 중창했고, 이어 1984년 지현스님이 주지로 부임 받은 이후 심검당과 심우실 그리고 범종루와 안심당까지 새롭게 자리 잡아 지금의 청량사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산사음악회의 원조’ 라고 수식어가 붙은 청량산 산사음악회는 지현스님이 대중들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는 음악으로 소리공양을 하고자한대서 시작 됐으며 산사를 지역의 문화공간으로 만드는데 손색이 없었다. 청량사 산사음악회는 청량사 5층 석탑을 주 무대로 매년 10월 첫째 주 토요일 저녁 7시에 열리는데 이날은 전국에서 몰려든 관람객들로 아침부터 장사진을 이룰 만큼 많이 알려져 있다. 지리적 특성상 무대와 객석 공간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1만여 명의 사람들이 산사음악회를 찾아오고 있다.
❙이렇듯 청량사는 기도를 드리는 사찰이자, 대중들의 쉼터이며 또한 예술적 문화공간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해 가고 있다. 청량사는 비탈지고 좁은 곳에 석축을 쌓아 공간을 확보함으로써 자연경관을 훼손시키지 않고도 아늑하고 정갈한 느낌의 절을 지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잘 가꿔진 청량사 꽃길을 따라 산을 내려오면 연화봉과 금탑봉을 사이에 두고 청량정사(淸涼精舍)와 찻집 ‘산꾼의 집’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있다. 이곳은 일찍이 송재(松齋) 이우(李堣)선생이 퇴계와 퇴계의 형인 온계를 가르쳤고 뒷날 퇴계는 이곳에서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을 저술한 곳이다. 1832년(순조32) 이곳에 사림들의 합의로 ‘오산당’이 새롭게 지어졌는데, ‘오산당’이란 당호는 퇴계가 청량산을 ‘오가산(吾家山)’이라 한 것에서 비롯됐으며 훗날 의병 항쟁의 근거지로 쓰였다가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되어 1901년 이 자리에 ‘청량정사’로 다시 지어져 지금에 이르게 됐다. 산객의 무분별한 방문을 단속하기 위해서인지 오늘은 ‘청량정사’의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다. 담장 밖에서 길게 목을 빼 들여다보고 지나쳐야하는 아쉬움을 애써 이웃에 자리한 찻집( ‘산꾼의 집’)에서 차 한 잔으로 달래 보려고 한다. 잔잔한 명상음악이 흐르는 찻집에서 쥔장이 권하는 한방차 한 잔과 구수하게 쏟아내는 쥔장의 입담은 묵직하게 뭉쳤던 다리의 피로감마저 덜어 주었주기에 입석으로 내려오는 발걸음은 마냥 가볍기만 하다.
❘청량정사
“청량산을 가보지 않고서는 선비노릇을 할 수 없다”고 했던 퇴계 선생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이제는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자연과 학문은 결코 따로 일 수 없음을 가르쳐준 퇴계 선생과 이렇게 아름다운 청량산이 우리 가까이에 있음을 감사히 여기며 오늘 산행은 여기서 마무리할까 한다.
- 글쓴이 : 컬처라인
- 경상북도 북부권 11개 시군의 문화예술 관련 정보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