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백소애_쑤세미의 골방에서 만화읽기]4만 킬로미터의 지구에 나는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소중한 날의 꿈>
- 백소애(cultureline@naver.com)
4만 킬로미터의 지구에 나는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소중한 날의 꿈>
백소애
❘소중한 날의 꿈
추억이란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한다는 뜻이다. 어른들은 어렵고 힘든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돌이켜 보며 웃음 짓고 그리워하고 더러는 울컥 한다. 어쩌면, 그 추억의 근저에는 ‘당시는 모두가 힘든 시절’이라는 공감과 어느덧 덜컥 나이를 먹어버린 자신의 모습에서 서글픔을 발견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주위 친구들에게 가끔씩,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느 시절로 돌아가겠냐고 물어보는데, 한결같이 고교 때라고 대답한다. 그 이유를 생각해본다. 가장 소중한 친구를 얻는 시기이고, 아직 어른이 되기 전이고, 진로를 바꿀 수 있는 때이고 무엇보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절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소중한 날의 꿈>의 영어 제목을 즉 ‘푸르른 날’로 지었는가 보다.
할리우드 융단폭격 영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가 천만 관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 시점에 2011년 개봉한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의 누적 관객 수 5만 3천명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안재훈·한혜진 감독, 송혜진의 시나리오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을 만화로 구성, 축약시킨 애니북 <소중한 날의 꿈>은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초를 배경으로 18세 고교생 이랑, 철수, 수민의 소중한 꿈과 사랑, 우정에 관한 이야기다.
❘철수와 수민 그리고 이랑
극장에서 러브스토리를 세 번이나 볼 정도의 로맨스영화 마니아인 방앗간 집 딸 이랑은 스스로 맹물 같은 아이라고 생각하는 평범한 열여덟 소녀다. 이랑은 그나마 잘하는 달리기에서조차 친구 민정에게 추월당하자 일부러 넘어져 시합을 포기해버리고 그런 자신을 용납하기 힘들어 육상부를 그만둔다. 러브스토리의 라이언 오닐 같은 남자와의 첫사랑을 꿈꾸는데, 고장 난 라디오를 맡기러 들른 전파상에서 만난 같은 학교 철수와 요즘말로 ‘썸’을 타게 된다. 이랑은 불안한 미래와 걱정되는 진로, 그 속에서 친구들과 비교해 더딘 자신에 열등감을 느낀다. 이길 것 같지 않은 시합을 포기해 스스로 경쟁구도에서 비껴난 사람처럼 구는 애어른이다.
❘일명 찰스로 불리는 "철수"와 썸을 타는 "이랑"
이랑과 ‘썸’을 타는 철수는 일명 찰스로 불린다. 대한민국 최초, 최고의 우주비행사를 꿈꾸는 철수는 삼촌의 전파사에서 고장 난 물건을 수리하는 맥가이버이자 학교 옥상에서 새처럼 날아오르는 비행실험을 하는 괴짜이다. ‘내가 하는 것들이 미래의 나에게 도움이 될지 안 될지 몰라서’ 고민하다가 자신의 얘기에 귀기울여주는 이랑으로 인해 자신감을 갖게 되고, 그런 이랑에게 땅끝마을에 있는 공룡의 발자국을 보여주려 함께 기차를 타고 떠난다. 그곳에서 발자국을 남기고 사라진 공룡의 꿈을 꾸게 되고 비록 자신들의 발자국은 남지 않겠지만 함께 한 이 순간과 장소를 기억하자고 다짐한다.
전학 첫날 노래를 시키는 급우들 앞에서 “하늘과 땅 사이에 꽃비가 내리더니~” 김만수의 ‘푸른시절’을 맹랑하게 부르던 소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반장의 명령을 거부하는 전학생 수민. 레코드점에서 영화 ‘엘비라 마디간’의 테마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1번 안단테를 찾아 구입하는 조숙한 수민은 이랑과 단짝이 된다. 자신의 자작 시집에 ‘나는 사형수다. 나는 나를 죽였다. 희망으로 때리고 용기로 부수고 나는 나를 죽인 사형수다.’라는 시를 적어놓고 서른셋까지만 살 거라고 말한다. 유명한 사람 중엔 그때 죽은 사람이 많노라고. ‘영감의 샘이 마르지 않을 것 같다’는 문학소녀 수민 또한 영락없는 애어른으로, 철없는 또래 남학생들의 구애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더니 늙수그레한 화가를 짝사랑한다. 잔뜩 멋을 부린 수민의 자작시를 읽어 본 화가가 “소박하고 솔직해야 돼. 친구들이랑 함께 어울리면서 몸으로 직접 느끼는 거야. 수지, 파이팅!!“이라고 심지어 수민의 이름까지 기억 못하며 조언하고 응원하자 절망한다.
❘라이언 오닐과 같은 첫사랑을 꿈 꾸는 이랑과 늙수그레한 화가를 짝사랑하는 수민
우리가 동경하고 고민하고 절망하고 기뻐했던 모든 것들이 지나고 나면 참 별 것 아니었던 시절의 이야기를 내내 푸르른 배경을 무대로 보여준 <소중한 날의 꿈>. 우리가 모든 예술장르를 접한 뒤 느끼는 감정 가운데, ‘재미’와 ‘감동’이 서로 더해지면 무척 인상 깊은 작품으로 기억에 남기 마련이다. 이 작품이 더욱 다가왔던 것은, 학창시절 짝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내가 평범한 이랑과 비슷했다면 그 애는 수민과 비슷했다. 거침없고 열정적이었던 친구는 엄마와 다툰 후, 집안 찬장 깊숙이 숨겨둔 약을 꺼내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 약을 먹으면 죽는다고 말했던 엄마의 경고를 되새기며 의문의 약을 한 병 마시고 방안에 누워 죽음을 기다렸다. 잠시 후 집으로 돌아온 엄마가 재봉틀 기름병이 왜 나와 있냐고 추궁했다는, 이 황당한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친구는 그러나 몇 해 전 정말 거짓말처럼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이랑과 철수가 공룡을 만나고 우주를 꿈꾸고, 그런 것을 꿈꾼다는 것이 하찮지 않게 느끼는 청춘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처럼, 막다른 길은 돌아가고 때론 지름길로 가로질러서 그렇게 길을 걸었으면 좋았을 것을, 친구의 선택에 무척 마음이 아파왔다. 그 친구와 함께 했던 풋풋하고 소중했던 날이 그렇게 오버랩됐다.
❘소중한 날의 꿈
<소중한 날의 꿈>은 세련된 그림체는 아니지만 기획부터 제작까지 총 11년의 세월 동안 10만장의 작화를 거쳐 지난 2010년 6월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극장 개봉 후 이듬해 애니북이 나왔다. 혹 애니북을 먼저 접했더라도 95분 애니메이션으로 한 번 더 감상하길 권한다. 이렇게 많은 손품과 발품을 들인 작품에는 전국 각지의 명소가 배경으로 등장한다. 철수가 이랑에게 우산을 건네는 장면에서는 마을 사이로 기차가 다녀 유명해진 군산 경암동의 기찻길이,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110년 역사의 전주 기전여고, 철수 삼촌의 아지트가 있는 달동네 마을은 서울 이화동, 추계단축마라톤대회에 참가한 이랑이 뛰는 춘천의 실제 마라톤 코스 등등. 그 외에도 장날에 차력쇼를 펼치는 약장수를 비롯한 공병우 세종타자기, 새우깡과 표어가 새겨진 나무액자, 미닫이문이 달린 TV, 문구점 앞에 매달린 빨간 돼지저금통, 거리와 하수구를 소독하는 방구차 등의 소품도 등장한다.
여담으로, 애니북 표지에는 ‘달나라에 인간이 도착한 그해, 나에게는 첫사랑이 찾아왔습니다.’라는 문구가 있는데 1969년 7월 20일 아폴로11호가 달에 도착했으니 애니메이션의 배경은 엄밀히 따지면 1969년의 해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극장에서 상영되는 러브스토리는 1971년 개봉되었고 전학 온 수민이 부르는 김만수의 노래 ‘푸른 시절’은 1977년 발표된 노래다. 이랑과 수민이 다니던 레코드점에는 1983년 1집을 발표한 이문세의 카세트테이프가 있고 거리에는 1974년에 개봉한 영화 ‘별들의 고향’ 포스터가 최신영화 상영 벽보판에 붙어 있는 등 해당 년도의 디테일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전반적으로 1970년 후반과 1980년 초반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 듯하다. 실제로 감독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는 판타지를 보여주고 싶었다”며 70년대 말을 배경으로 삼았다고 한다.
1등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달리기가 더욱 자신이 없는 이랑은 귀가 들리지 않는 철수의 삼촌과 대화를 나눈다. 달에 착륙한 사람 중 닐 암스트롱만 기억하는 세상에서 삼촌은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달에 발을 디뎠다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다. 시간 차이가 있을 뿐’ 이라고 답해준다.
⎯⎯⎯⎯⎯⎯⎯
난 달릴 줄은 알지만 세계에서 일등은 아니다.
내가 할 줄 아는 것들은 다 그렇다.
그렇다고 근사한 어른이 될 수 없는 건 아닐 것이다.
어쨌든 나는 어른으로 가는 길에 있다.
⎯⎯⎯⎯⎯⎯⎯
이랑은 ‘이렇게 한심한 나도 무슨 일을 하고 무언가를 남길 수 있을까요?’ 하고 의문을 갖는다. 이런 고민 없이 사춘기를 보내고 학창시절을 보내고 어른이 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소박한 이야기는 서랍장 속 깊숙이 넣어둔 우리 각자의 추억이 담긴 앨범이다. 이랑의 성장기를 통해 우리는 어른이 된 이랑이 지금도 여전히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우리는 모두가 평범하고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
❘소중한 날의 꿈
(소중한 날의 꿈/ 애니메이션-연필로 명상하기, 만화구성-이종규/ 주니어 김영사/ 2011/ 값12,000원)
- 글쓴이 : 백소애
- 강원도 태백 출생. 아이큐는 낮지만 머리가 좋다고 굳게 믿고 있음. 변덕이 심하고 우유부단하나 따뜻한 품성을 지니고 있다. 조카들에게 헌신적이며 인간성 또한 좋다.....고 믿고 있다. 학생 때 교무실에서 밀대자루로 바닥 밀면서 은밀히 훔쳐본 생활기록부에는 ‘예의 바르나 산만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한참을 갸우뚱 하다가 담임이 수학선생님이었기에 그냥 이해하기로 함. 다소 후진 취향을 지니고 있으나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고 쓸데없는 걱정과 호기심이 많음. 같은 계획을 몇 년째 하고 있으며 역시나 올해도 다이어트와 앞머리 기르기에 도전할 생각이며 과메기에 없어서는 안 될 다시마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 웹툰도 괜찮지만 만화책은 역시 종이책으로 보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아날로그 건어물녀. 좋아하는 것은 무한도전, 오뎅으로 만든 떡볶이, 삼겹살에 매실소주, 비오는 날, 생활의 달인,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괴짜가족 류의 저질유머. 비 오는 날 무한도전 틀어놓고 배 깔고 누워 만화책 보면서 빈둥거리며 사는 것이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