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정창식_마을이 있는 문경시]문경의 문화마을
- 정창식(cultureline@naver.com)
크고 아름다운 산 아래 마을 - 갈벌
정창식
하나의 공간에서 처음과 끝이 갖는 거리감은 낯설다. 그 낯섦은 생소함에 있다. 사람과의 교류가 없고 물자의 오고감이 없게 되면 같은 산과 들이라도 그곳에서는 이방인이 된다. 문경읍에 소재하는 갈평마을은 문경시의 끝이며 오지이다. 마을은 시의 경계에 놓여있다. 그 경계너머에는 충북 충주시이다.
그러나, 바꿔놓고 보면 갈평과 관음에서 하루 해를 머리에 이고 보내는 그곳 사람들에게는 문경의 시작일 수 있다. 옛날이 그랬다. 1900년대 무렵 이곳은 신북면(산북면) 소재지였다. 신북면은 용연과 평천, 중평과 관음 그리고 당포와 고요 등 주변 10개 마을을 아우르는 문경읍에서 제법 넓은 곳이었다. 그 면의 소재지가 문경읍에서 한참 떨어져있는 갈벌(갈평의 옛이름)이라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 궁금증을 안고 갈평마을을 찾았다. 마을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권사문(87세)이라는 분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권사문 선생
그는 오래전 교편생활을 접고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고 했다. 늦은 오후, 햇볕 드는 마당에 들어서니 주련(柱聯)이 눈에 들어왔다. 일심상조불언중(一心相照不言中).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잘 헤아리다.’라는 의미라고 했다. 은둔하며 지내는 이의 마음 씀을 잘 표현한 듯했다. 그는 노령에도 꼿꼿하며 맑아 보였다. 타고난 덕성 때문인지 낯선 이의 부담스런 방문에도 웃는 얼굴이었다.
“이곳은 구 영남대로였어요. 예천이 구십리고 충주가 같은 구십리죠.”
조선 태종14년에 새재 길을 개통하기 전까지 이곳 하늘재는 충주에서 경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한다. 원래, 영남은 계립령과 조령 아래 상주와 문경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개통 후에도 충주지역과 안동 예천 지역의 사람들은 이 갈평마을을 지나 새재를 넘어 서울로 향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설에 퇴계 이황이 한양을 오가는 도중에 마을 뒤의 산을 보면서, “아, 크고 아름답다!” 라는 감탄을 자아내어 대미산(黛眉山)이라는 원래의 이름이 대미산(大美山)으로 바꿨다고 한다.
근대 이후 까지 이곳은 교통의 요지로써, 드나드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주변의 관음에는 오늘날 여관과 같은 원(院)이 있어 지금도 나이든 사람들은 이곳을 관음원으로 부르고 있기도 하다. 당시, 지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백호가 넘는 사람들이 갈벌에 살았다고 한다. 해방이후에도 용흥초등학교의 학생수가 63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우리 지역의 명당으로 전해오는 말에 ‘일(一) 갈벌 이(二) 아차’라는 말이 있어요.”
이곳에 터를 잡은 송안군(松安君) 이자수(李子修)라는 분의 글에 갈벌을 비빈장상(妃嬪將相)이 대를 이어서 태어날, 제일의 양기(陽其)라고 적어 놓았다.
아차 마을은 가은읍의 갈전을 이른다. 화지구곡(花枝九曲)을 지은 옥소 권섭(1671~1759)은 지금의 당포리, 옛 화지동에서 동천(洞天)[산과 내로 둘러싸인,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좋은 곳]을 경영하면서 이곳에 있는 소나무의 멋스러움을 칠곡(七曲)으로 불렀다. 지금도 용흥초등학교와 관음요 마당에는 그때의 소나무들 인 듯, 굽이치는 소나무들이 고고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자세히 보면 마을 주변에 운치 있는 소나무들이 적지 않음을 볼 수 있다.
❘ 부처의 마음으로 빚는 도자기 마을 - 관음
❘도자기 마을답게 문경 곳곳에서 마주하는 풍경 - 조선요와 관음요
관음마을은 갈벌에서 십리 정도에 위치해 있다. 이곳 주변에는 수백년 동안 도자기만 지어온 사기굴(요장)이 있다. 바로, 경상북도민속자료 135호인 망댕이가마이다. 그 가마의 주인인 8대 도예 종가의 맥을 잇는 조선요(김영식)가 도예 박물관을 지어 마을을 지키고 있다. 같은 맥을 잇는 관음요(김선식)도 있다. 그리고 중점요(김태운), 평원요(박태춘), 갈평요(신석용), 백두요(김경수), 관욱요(김종욱) 등이 있고 주변 마을인 당포에는 도예 명장의 요장인 문경요(천한봉)와 관문요(김종필) 등 우리 문경지역의 대표적인 요장들이 위치해 있다.
“해방전후에 이곳에 대여섯개의 요장들이 있었어요. 천한봉씨도 관음마을에서 시작했고, 도예 명장인 이학천씨의 부친도 여기에서 작업했어요.”
이곳 뇌암과 중점마을 사이에는 도자기의 원료인 백토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불을 땔 수 있는 산림자원이 풍부했기 때문에 도자를 만들 여건이 구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수요처까지 쉽게 공급할 수 있는 교통이 마련되지 않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였는데, 이곳은 하늘재와 여우목을 넘어가면 충주와 예천, 안동이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해 있다. 동로면에 인접한 방곡마을이 도예로 유명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이 맞아 떨어진 건 옛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요장들이 계속 들어서는 이유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전통에 겨워하는 본능 때문인지, 아니면 이곳의 자연환경이 주는 아름다움 때문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문득 이곳의 이름이 떠올랐다. 어쩌면 도공의 마음이 이곳에서는 관음(觀音)[불교-자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한다는 보살]이 되어 도자를 빚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재에 이르는 관음마을 도로 주변에는 여러 별장이 들어서 있다. 송안군 이자수가 말한 제일의 양기(陽其)가 갈평마을에 이어 이곳까지 발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 현재가 옛것으로 미래를 찾다
❘문경의 망댕이 가마 가는 초입 ❘백두요 표지석
이곳 출신들 중 널리 알려진 분을 아느냐는 질문에 그는 수줍어하며 한국을 빛낸 엔지니어 60인에 선정된 동생 얘기며, 중앙부처 공무원 아무개, 문경문화원장 등등... 언뜻 언론에서 접한 이름들을 자랑하듯 늘어 놓으며 다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지역과 나라를 빛낸 훌륭한 이가 적지 않다.
집을 나섰다. 한때 많은 사람들로 붐볐을 마을 장터에 쇄락한 단층건물 유리문에 미장원이라고 써진 색 바랜 글씨가 보였다. 세월의 흔적이다. 보건소 앞마당에 문경갈평리오층석탑이 소나무 반송과 함께 지나가는 나그네를 무심히 바라보고 서있었다. 석탑은 유형문화재 185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탑은 도굴범이 훔친 것을 주민들이 찾은 거에요. 수세골과 문막 사이에 있던 절터에 그때 석탑의 기단이 아직 남아 있어요.”
뭐랄까, 명실상부한 문화재임에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 저 미완성 오층석탑은, 여러 가지 여건이 많이 갖추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부족해 보이는, 안타까운 현재의 마을 모습과 닮아 있는 듯했다. 두 마을을 오가면서 느꼈던 소회는 분명 현재가 옛것으로 미래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는 듯했으나 아직은 스산해 보였다. 두 마을이 각각 앞으로 나가면서 누군가 이를 하나로 엮는 어떤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여보았다. 십 여년 전 전국 아름다운 학교로 선정된 용흥초등학교를 뒤로 하고 마을을 벗어났다. 바람이 산 너머로 해를 몰아내고 있었다.
| 자료 수집에 협조해 주신 갈벌마을의 정필 선생과 권사문 선생께 감사드립니다.
컬처라인 15호에 실린 "마을이 있는 풍경 -문경의 문화마을 편" 의 사진 자료는 아름다운 선물 101 (정창식 님 블로그) 출처임을 밝힙니다. |
- 글쓴이 : 정창식
- ▪ 현 문경문화원 이사 ▪ 안동대학교 문화산업전문대학원에서 스토리텔링을 전공하였다. [주간문경]에 문경문화와 관련된 글을 연재하고 있다. 문경의 자연과 마을, 유적과 문화재 그리고 오래된 이야기들을 새롭게 봄으로써 문경문화의 가치를 높이고 싶어한다. ▪ 저서 수필집 "아름다운 선물 101" (2010) 에세이집 『아름다운 선물 101』 은 우리 인생에서 있어서 스치는 인연들과의 소중한 관계, 베풂의 마음 등 일상에서 느낀 감정들을 엮은 책이다. 수필집 "문경도처유상수" (2016) 주간문경에 2010년부터 연재하고 있는 문경문화와 관련된 글 중 57편을 선별해 책으로 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