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컬처라인_마을이 있는 풍경]초록이 싱그러운 새재에서 임진왜란의 그림자를 밟다
- 이미홍(cultureline@naver.com)
초록이 싱그러운 새재에서 임진왜란의 그림자를 밟다
흙신길월 충렬비를 찾아서
글 이 미 홍
6월, 새재 길은 온통 싱그러운 신록이다. 무더운 날씨 탓에 오후 느지막이 차를 주차하고 1관문까지 모처럼 한적한 새재 길을 천천히 걸어가노라니 목 뒤로 차오르는 땀을 바람이 간간이 씻어준다. 옛길박물관을 한 걸음 앞에 두고 오른쪽에 새재를 찾으며 염두에 두었던 임진왜란 때 순국한 문경현감 신길원 충렬비가 보인다. 나라를 위해 스러져간 영령들을 생각하게 하는 6월의 뜨거운 햇살 아래, 비각 속에 무심히 서 있는 현감신길원충렬비 일곱 자가 붉은데 사람들은 무심히 그 옆을 지나쳐간다. 그저 누군가의 공을 기리거나 업적을 칭송하는 비석이겠거니 할 뿐 비석 앞으로 걸음을 옮겨 신길원 그 이름 석 자를 애써 찾아 읽는 이는 드물다. 그러나 알고 보면 새재 길은 숱한 역사의 흔적과 전쟁의 상흔이 배어있는 곳이다. 특히 문경새재는 1관문인 주흘관에서부터 2관문인 조곡관, 3관문인 조령관까지 임진왜란의 궤적이 깊게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문경새재가 있는 조령은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어 조령이라고 했다는데, 본디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중요 길목이라 예부터 수많은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꼭 넘어야 했던 고갯길이었고 동시에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에까지 물류와 사람의 이동 통로였다. 곧이라도 맹수가 튀어나올 것 같은 험한 고개였지만 그래도 한양으로 향하는 길손들은 험한 대신 걸리는 시간이 더 짧아서 죽령길이나 추풍령 길 보다 새재 길을 택했다. 특히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은 꼭 이 길을 택했는데, 문경(聞慶) 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고 한다. 과거 길, 선비들은 장원급제라는 기쁜 소식을 듣고 싶은 염원을 가슴에 담고 새재 길을 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문경, 특히 조령은 그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남북세력 간에 다툼이 있을 때마다 곧잘 전쟁터가 되곤 했다. 그런 까닭에 이곳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한양으로 진격하던 왜군에게도 반드시 거쳐 가야할 길이 되고 말았다.
■ 한양으로 진격하던 왜군에게도 반드시 거쳐 가야할 길
1592년 4월, 부산에 이어 밀양을 점령한 왜군 1군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는 북진을 거듭하여 불과 열이틀 만에 상주, 함창을 거쳐 4월 26일 문경현에 이르렀다. 2군인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도 장기, 경주, 군위, 용궁을 거쳐 문경에 합류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두해 전인 1590년 문경현감으로 부임했던 신길원은 난을 당하자 관아에 방어막을 치고 왜군을 맞았으나, 불과 이틀 전 상주에서 패한 순변사 이일이 문경현으로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 조령을 버리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군사 모집을 위해 온 신립의 군대에 합류하여, 문경현의 창고를 풀어 군량미를 확충하고 군사들을 더 모집하여, 신립의 군대를 따라 떠난 뒤라 현에 남아있는 군사들은 불과 수십 명이었다.
왜적이 목전에 닥친 것을 알고 문을 닫아걸고 관아를 지켰으나 1만 8천이 넘는 왜군들에게는 불가항력이었고, 현감 신길원은 적장에게 붙잡혔다. 항복하라는 걸 듣지 않고 도리어 적장을 꾸짖으며 항복에 서명하는 도장인 관인을 손에 쥐고 끝까지 놓지 않자 결국 적장의 칼에 목이 날아가고 손이 잘렸다. 신길원의 항전과 죽음을 보고 받은 류성룡이 이끄는 전시의 조정에서는 이를 귀감을 삼아 기록해 두었다가 전쟁이 끝난 후 그에게 좌승지라는 벼슬을 추증하고, 숙종 때 문경현에 충렬비를 세우고, 또한 동국신속삼강행실록에 그 충절을 실어 널리 알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문경으로 왜적이 다가오자 모두 형세 불리함을 들어 피하기를 권하였으나 공은 소리 높여 말하되 내가 맡은 고을이 곧 내가 죽을 곳인데 어찌 피하리오 하고 적은 군사를 독려하더니 적병이 이르자 달아나지 않은 자가 없고 홀로 종 하나만이 가지 않고 있거늘, 의관을 바로 하고 관인을 차고 앉아 있으니, 적병이 칼을 빼어들고 속히 항복하여 길을 가리키라고 협박하였다. 공은 손을 들어 목을 가리키며 내가 너를 동강내어 죽이지 못함을 한탄하니 빨리 죽여서 나를 더럽히지 말라 하니 적병이 성내어 먼저 한 팔을 자르고 마침내 살을 발라내는 모진 죽음을 당하였다. 사람이란 조그마한 이개가 있어도 지킬 바를 바꾸지 않은 이가 드물거늘 하물며 시퍼런 칼날 밑에서이랴 공이야말로 충렬의 선비이다.
동국신속상감행실록 중
■ 1관문 주흘관을 오르다 마주하는 충렬사
임진왜란에서 지방 현감에 불과했던 신길원이 차지하는 업적이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아니고 그가 부하 수십 명을 데리고 조족지혈로 한나절도 버티지 못한 전투 아닌 전투가 혁혁한 전공이 되는 것도 아닌데, 당시 그가 충절의 표상으로 삼강행실록에 올라 오늘날까지 그 충절이 전해지는 것은 임진왜란 그 당시에도 관군이나 관의 장수가 왜적을 맞아 끝까지 항전한 예가 그만큼 드물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중과부적의 적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지기는 할망정 끝까지 저항이라도 하는 이들이 많았다면 신길원의 미미한 공적이 삼강행실록에까지 오르지는 못했을 지도 모른다. 문경관아 자리에 있던 충렬비가 새재 입구로 옮겨진 것에 대해 혹자들은, 신길원이 왜적에 쫓겨 도망치다 이곳에서 항전하다 순국했다고도 하고, 무장이 아닌 문인 출신 현감이라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도망치다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는데 오직 관인을 사수하다 죽은 그 정신을 기려, 새재를 지나는 이들에게 그 본을 삼게 하려 했다고도 한다. 새재 길을 걸으며 역사의 진실과 그 의미를 곱씹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걷다보니 어느새 1관문인 주흘관 앞이다. 1관문 바로 뒤에 오른 쪽으로 난 주흘산으로 가는 등산로를 따라 조금 들어가면 신길원 현감을 모신 충렬사가 나온다. 1관문 뒤로 살짝 비껴 있어 이 역시 자칫하면 알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기 쉽다. 순조 때 문경 향내 유림과 현감 홍로영이 창건하였는데 고종 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81년 문경유림에 의해 복원되었다. 신길원 충령비와 더불어 문경새재 1관문 가까이로 옮겨져 새재를 찾는 이들에게 간혹 그 이름자를 기억하게 한다.
신립이 왜적을 조령에서 방어하지 않고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다가 패한 것이 계기가 되어 조령은 국방의 중요한 요충지로 새롭게 부각되었다. 명나라 지원군 이여송이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며 숨을 헐떡거리는 필마를 보며 유험여차(有驗如此), 이렇게 험할 수 있는가 하며 지키지 아니하였음을 한탄한 데 이어 명 장수 송응창까지 조령에 관방을 설치할 것을 주문하기에 이르자 임란 3년째인 1594년 2월, 유성룡이 조령의 사정을 잘 아는 신충원을 조령 방어 책임자로 천거하여 축성케 하였다. 신충원은 조령의 고개 정상에서는 길이 여러 갈래로 분산되어 적을 맞아 지키지 어렵다고 보고 정상에서 동쪽으로 10리쯤 내려와 양쪽 절벽이 험준하고 계곡이 깊은 지형에 지금의 2관문 자리에 조동문을 축성하였다. 임진왜란 후에도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 조령 방어 전략과 성을 더 쌓아야 한다는 상소가 끊이지 않아 2관문을 증축하고 숙종 조에 이르러 1관문과 3관문을 연이어 축성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임란 후 연풍 현감 이만형은 성을 세 겹으로 쌓아야 한다는 상소문에서 3관문 지점에 있던 원과 2관문인 석문의 거리가 10여리로 멀고 험준하여 석문을 중심으로 남과 북에 성을 쌓으면,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어, 도적이 오면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가서 지키고, 도적이 물러가면 군사를 흩어서 밭을 갈아 곡식을 심으며, 병량을 저장하여 험한 곳을 막고 요새를 지킬 수 있다고 하였다. 1개의 성을 쌓는 것만 해도 큰 역사인데 성을 세 겹으로 쌓은 것은 조정이나 백성들에게나 부담이 클 수밖에 없는 대역사인데도 불구하고 결국 3개의 관문을 세운 것을 보면, 부산에서 한양까지 너무나 쉽게 뚫려버린 임진왜란의 공포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반증해주는 것만 같다. 그러나 실제로 전란 후 그렇지 않아도 열악한 조정 살림살이에서 관문 축성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에 이어 병자호란까지 겪게 되자 조정도 왜적 방비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마침내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00여 년이 지나 1708년에야 적을 막기 위한 관방 시설로 2관문에 이어 1관문과 3관문까지 총 6.5㎞의 새재 관문이 축성, 완성되었다.
■ 세 겹으로 쌓은 관문, 조령 고개 길을 지켜주는 길잡이가 되다
임진왜란 때는 왜적에게 쫓기고 약탈당하고, 군량미로 곡식을 빼앗기다시피 하고, 관군으로 차출되어 조총을 든 왜적에게 죽임을 당하고, 후퇴하는 적들에게 또다시 희생양이 되고, 그러고도 전란 후에까지 끊임없이 새재 축성 부역에 동원되었으니, 문경 지역은 그 지리적 위치 때문에 임진왜란 때 한마디로 거의 초토화가 되다시피 했고, 민초들은 집집마다 피울음을 울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당했던 치욕이 오늘 날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큼 튼튼하게 재정비되고 증축되어 많은 이들이 찾는 역사의 현장이자 명승지가 되었듯이, 임진왜란 때의 선조와 조정의 몽진의 아픔은 오늘날 걷고 싶은 길 문경새재를 낳았다. 그런데 문경새재의 이 세 겹으로 쌓은 관문은 결국 한 번도 일본군의 방어를 위해 쓰이지 않았다는 것, 사후약방문격이지만 그래도 이 지역에 다시 큰 피바람이 몰아치지 않았다는 점, 그래서 백성들이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었다는 사실에는 또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된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성벽이며 관문의 모습이 제대로 잘 보존되어 오늘 우리가 즐겨 걷는 조령 고개 길을 지켜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번쯤 생각하면서 새재를 걷는다면 더 좋을 것이다.
1관문을 지나면 왼쪽에 있는 사극 찰영장에서 요즘 징비록 촬영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민정, 군정의 최고관직을 지내며 전시의 조정을 이끌었던 재상 류성룡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자신이 보고 듣고 행한 7년간의 일을 기록한 일기 징비록을 처음 접했던 때가 떠오른다. 대학 1학년 때, 헌책방에서 집어 들었던 세로로 쓰여진 삼중당의 작지만 의외로 두꺼웠던 징비록 문고판. 그 뒤 대학 도서관에서 관련 자료들을 두루 찾아 읽기도 했지만, 징비록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과 놀라움은 지금도 생생하다. 난을 당한 한 나라의 재상의 솔직하고도 사실적인 기록들과 부끄럽고 보잘 것 없는 행적 하나하나까지,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는 징비록의 말 뜻 그대로 세밀하게 기록한 그 정신에 놀랐고, 지리멸렬한 전시상황과 비참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몽진 길에서도 전시 상황을 점검하고 임금과 조정과 백성의 입장을 생각했던 인간 류성룡과 역사의 기록이란 어때야 하는 가를 말해주는 징비록은 모두가 꼭 읽어봐야 하는 책이다. 현대인과 대중들의 기호에 맞게 각색된 TV사극에 비할 바가 아니다. 류성룡이라는 인물을 떠나서 징비록은 그 자체만으로도 세계에 내놓을만한 기록유산이다. 지금 여기 문경새재와 현감 신길원을 이야기 하면서도 류성룡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음이다.
마침 가는 날이 새재 길 맨발걷기대회가 있는 날이라 간혹 내려오는 이들 중에 맨발인 사람들이 눈에 띈다. 그 발이 그렇게 시원해 보일 수가 없다. 부드러운 마사토가 깔린 흙길은 맨발 걷기대회가 아니라도 여름이면 절로 신발을 벗어들고 걷고 싶게 만드는 길이다. 차량 통행이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는 덕분에 고개가 생겨난 이래로 한 번도 포장되거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수천 수백 년을 맑은 흙 기운을 간직한 채 더욱 깊어진 숲길, 물소리 깊이 숨은 계곡 따라 전나무, 단풍나무, 가문비나무, 박달나무가 아름드리 우거진 숲길에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맑은 기운과 시원한 향기가 있다. 초여름 무더위도 문득 쉬어가곤 하는 새재 길이다. 돌아 나오는 길, 길손들이 쉬어가라고 마련해둔 쉼터에 앉아 사람들이 발을 씻는다. 그 길 끝에 이르러 그냥 돌아 나오기 아쉬운 이들은 파전 한 접시에 분홍빛 은은히 도는 오미자 막걸리 한 잔을 걸쳐도 좋을 것이다.
- 글쓴이 : 컬처라인
- 경상북도 북부권 11개 시군의 문화예술 관련 정보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