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백소애_쑤세미의 골방에서 만화읽기]“가난한 이웃을 위한 뉴욕은 없다” 대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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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웃을 위한 뉴욕은 없다”
대홍수!
1990년에 개봉한 영화 한편이 생각납니다. 마크 노플러의 ‘A Love Idea’가 흐르던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말이죠. 영화에는 파업 노동자와 한국전을 치르러 가는 군인, 거리의 부랑자와 동성애자, 매춘녀와 양아치가 등장합니다. 매춘과 폭력이 난무하는 뉴욕의 빈민가인 공업도시 브룩클린을 배경으로 1950년대 미국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줍니다. 시종일관 음울했고 금발의 창녀 트랄라를 연기한 제니퍼 제이슨 리의 모습은 무척 슬프고 강렬했어요.
“태초에 신께서 말씀과 뉴욕을 창조하셨다… 보시니 모든 것이 쓸모없더라”
뉴욕 맨해튼에서 자란 에릭 드루커의 만화 〈대홍수!〉의 표지 글입니다. <대홍수!>는 1992년 미국에서 출간한 만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만화와 많이 다릅니다. 출판사의 이름이 ‘다른’이기도 하지만 미 제국주의 역사에 관한 〈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 팔레스타인 대량 학살에 투입된 이스라엘 병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바시르와 왈츠를〉, 국가의 정치를 거부하는 〈나는 왜 저항하는가〉에 이어 4번째 소개되는 ‘다른만화 시리즈’입니다.
이 만화가 남다른 이유는 바로 글 없이 그림으로만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말풍선도 지문도 나레이션도 없습니다. 내용 또한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의 삶과 사회 문제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풍자하는 리얼리즘 만화입니다. 그림은 먹으로 찍어낸 판화처럼 어둡고 거친 느낌이 납니다. 판에 잉크를 바른 뒤 면도칼로 긁어내는 스크래치보드 작업으로 작품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시각으로만 표현한 스토리 진행 능력은 무성영화처럼 흡입력이 있습니다. 상징과 은유로 표현된 장면에는 강렬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영화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와 만화 <대홍수!> 는 뉴욕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화려한 네온사인 뒤에 가려진 고단한 도시 빈민의 삶을 에릭 드루커는 이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 문학의 서사 구조를 갖춘 소설과 결합한 만화의 한 종류로, 문학작품처럼 깊이 있고 예술성 넘치는 작가주의 만화를 일컫는 말)을 통해 밀도 있게 보여줍니다.
<대홍수!> 에는 표제작 〈대홍수〉를 비롯 단편 〈집〉과 〈L〉이 함께 실려 있습니다.
〈집〉에는, 집에서도 공장에서도 퇴거 통보를 받은 한 노동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공장은 문을 닫고 집에서도 쫓겨난 그는 절망합니다. 먹고 자고 사랑을 나눌 안락한 공간이 없으니까요. 마약과 섹스, 폭력이 난무하는 뉴욕의 뒷골목 자본의 도시에서 노동자는 그렇게 부랑자가 됩니다. 훔치고 쫓기고 감옥에 갇히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인지 죽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뒷골목에 쓰레기봉투처럼 부려져 있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마치 화석과도 같습니다. 처절하게 점멸하는 도시빈민의 삶을 만화로 담아낸 능력이 놀랍습니다. 또 다른 단편 〈L〉은 지하철에서 잠든 남자의 꿈과 현실을 담아냈는데, 예술과 인간에 대한 갈망이 차가운 현실과 대조를 이루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표제작 〈대홍수〉. 뉴욕 지하철 역사에서 막 한 남자가 나옵니다. 거리엔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비를 맞고 가는 그에게 한 노인이 우산을 건넵니다. 그는 고양이가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화실에 도착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림 속 남자는 세차게 쏟아지는 비를 뚫고 거리를 걷습니다. 그러다 구름 위로 올라가고 카니발이 열리는 브룩클린의 코니아일랜드에 도착합니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흰 옷을 입은 여자의 입맞춤을 받습니다. 가면을 쓴 사람들이 행진을 하고 이두박근의 근육질 남자의 쇼도 보게 됩니다. 이 우락부락한 남자는 미 제국주의를 상징합니다. 그의 팔에는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핍박의 역사가 시작된 콜럼버스의 배와 인디언, 미국을 상징하는 독수리 그리고 일루미나티 표식이 있어요.
다시 거리로 나온 남자는 황량한 다리 위에서 구걸하는 노숙자를 봅니다. 그의 얼굴은 흡사 삐에로와 같습니다. 도시의 첨탑을 지나 시위대와 진압 경찰과의 격렬한 충돌현장에서 뉴욕은 물에 잠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남자의 작업실도 물에 잠기게 됩니다. 그는 고양이와 함께 탈출하지만 살아남지는 못합니다. 비를 맞는 그에게 우산을 건넸던 바로 그 노인이 노아의 방주처럼 배를 타고 나타납니다. 배에는 살아남은 고양이만 타게 되면서 코끼리, 사자, 염소 등 암수가 맞는 동물들 속 홀로 남은 암고양이의 짝이 비로소 맞춰지게 됩니다.
이 작품은 작가의 경험과도 무척 관련이 깊습니다. 1988년, 맨해튼의 톰킨스 스퀘어 공원(영화 〈위대한 유산〉과 〈어거스트 러쉬〉에 나오는 그 공원)이 범죄의 온상이자 도시의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경찰이 야간 통행금지를 시키자 노숙자, 부랑자들은 시위에 나섭니다. 이 시위에 참여한 에릭 드루커는 경찰의 폭력적 시위진압에 충격을 받습니다. 바로 〈대홍수〉속 시위장면과 매치됩니다. 그림을 그리는 남자 또한 에릭 드루커 자신에 투영되고요.
화실에서 남자가 그린 그림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한 에스키모 사냥꾼이 떠다니는 얼음 덩어리 위에 서서 며칠 동안 표류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구조되었을 때 사냥꾼은 사람들에게 노래를 들려주었는데 “나는 즐거워, 이대로 좋아! 내 주위는 온통 얼음뿐이야, 이대로 좋아!” 그러다가 “난 눈을 뜨고 깨어 있는데 지쳐버렸어… 이대로 좋아!”라고 합니다.
컨베이어 벨트처럼 돌아가는 세상에 미국의 상징이자 세계적 메트로폴리스 뉴욕의 어두운 단면을 그려낸 〈대홍수!〉는 영화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의 그것처럼 암울합니다. 그러나 선명한 하트, 붉은 심장을 한 남자가 흑백의 판화와 같은 비 내리는 뉴욕의 거리를 걷는 것을 보노라면 어딘가에 남아 있는 온기가 느껴지고 희망의 박동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홍수 속에서 잠식당하고 표류하는 삶, ‘눈 뜨고 깨어 있는데 지친’ 사람들의 도시 뉴욕은 대홍수 속에 잠기지만 노아의 방주에는 암수 동물들이 생존합니다.
작가 에릭 드루커는 오랫동안 거리에서 행상을 했습니다. 20대 초반부터 맨해튼의 보도에서 자신이 직접 그린 작은 잡지를 팔았다고 하네요. 그 잡지에는 경찰의 야만적인 폭력, 집주인의 테러, 부동산 협잡꾼 등 자신의 이웃에서 항상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었다고 합니다. 케테 콜비츠 등 독일 표현주의 작가들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에릭 드루커는 인물의 내적 동요를 드러내기 위해 왜곡과 과장법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는 작품 속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그는 뉴요커 3세대로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대사도 지문도 없는 거친 흑백 이미지의 만화를 보게 되는데 그게 곧 무성만화와 목판화 만화였습니다. 그의 작품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게 돼죠.
옛날 소설가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이 서점의 낚시코너에 꽂혀 있더라는 웃지 못할 일화처럼 그래픽 노블의 개념이 아직 자리 잡기 전인 1992년 미국에서 발표된 <대홍수!> 는 몇몇 서점에서는 순수예술 코너에 또 다른 서점에서는 유머, 대중문화, 공상과학소설 때로는 심리학 코너에 꽂혀있기도 했답니다.
판화처럼 거칠지만 강렬한 흑백의 그림은 그 강렬한 메시지를 더욱 선명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작품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한 작가는 작품 속 말 없음이 곧 소통에 대한 시도이고 그림이 언어의 장벽을 넘는 수단임을 믿는다고 합니다. 과연 절망으로 희망을 노래하는 작가인 것 같습니다. 끝으로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도 이런 글귀가 나옵니다.
‘난 일어나 도시의 거리를 걸을 것이다. 내 영혼이 사랑하는 그를 찾으러…’
혼탁한 세상, 역시 사람만이 희망입니다. 붉고 따뜻한 심장을 품고 거리를 걷는 당신, 누군가에게 구원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대홍수(FLOOD)/ 에릭 드루커 그림, 김한청 옮김/ 2010/ 도서출판 다른/ 값14,000원
- 글쓴이 : 백소애
- 강원도 태백 출생. 아이큐는 낮지만 머리가 좋다고 굳게 믿고 있음. 변덕이 심하고 우유부단하나 따뜻한 품성을 지니고 있다. 조카들에게 헌신적이며 인간성 또한 좋다.....고 믿고 있다. 학생 때 교무실에서 밀대자루로 바닥 밀면서 은밀히 훔쳐본 생활기록부에는 ‘예의 바르나 산만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한참을 갸우뚱 하다가 담임이 수학선생님이었기에 그냥 이해하기로 함. 다소 후진 취향을 지니고 있으나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고 쓸데없는 걱정과 호기심이 많음. 같은 계획을 몇 년째 하고 있으며 역시나 올해도 다이어트와 앞머리 기르기에 도전할 생각이며 과메기에 없어서는 안 될 다시마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 웹툰도 괜찮지만 만화책은 역시 종이책으로 보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아날로그 건어물녀. 좋아하는 것은 무한도전, 오뎅으로 만든 떡볶이, 삼겹살에 매실소주, 비오는 날, 생활의 달인,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괴짜가족 류의 저질유머. 비 오는 날 무한도전 틀어놓고 배 깔고 누워 만화책 보면서 빈둥거리며 사는 것이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