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남효선_동해연안의 문화여행]"신선이 떼배타고 노니는 아름다운 바닷길" 망양-후포 해파랑길
- 남효선(cultureline@naver.com)
울진 후포 등기산서 아련한 첫사랑을 만나다
"신선이 떼배타고 노니는 아름다운 바닷길" 망양-후포 해파랑길
남 효 선
'생태문화관광도시' 경북 울진군의 남쪽 관문이자 국제마리나항으로 부상하고 있는 후포항을 감싸고 있는 등기산공원은 여말선초 안축선생과 서거정선생의 발자취가 흠씬 배어 있는 망사정을 비롯 수령 200여년 이상의 팽나무군락, 울진지역 선사시대의 유적군 등을 품고 있는 역사생태명소로 각광받고 있는 해양공원이다.
최근 울진군은 후포 등기산 아래 갓바위 해변 공원에 신경림 시인의 시비를 세워 후포항의 아름다움을 한 폭 더했다.
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만 한 잘못이 맷방석만 하게
동산만 하게 커 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는 엄격해지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 보다.
돌처럼 잘아지고 굳어지나 보다
멀리 동해 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럼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럼.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는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
<신경림 시 ‘동해바다 -후포에서’ 전문>
자신의 시비가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고 울진 후포항을 찾은 신경림 시인은 지난 1987년 작가 세분과 울진을 찾아 사흘을 유숙했다며 특히 울진바다의 아름다움과 울진사람들의 후덕한 정을 평생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 시인은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아름다운 풍광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며 이는 울진사람들의 자연자원을 보존하려는 탁월한 "생태관 덕분인 것 같다"고 말했다
바닷바람과 어울려 그림처럼 서 있는 팽나무 그늘이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처럼 단아하다.
'신선이 떼배(仙槎;울진의 옛 지명)타고 노니는 따뜻한 바다' 경북 울진군 후포항으로 들어오는 남쪽 관문에 '국민 장모 춘자할머니'와 '국민 사위 남서방'이 나란히 앉아 울진대게와 문어숙회를 한상 차려놓고 파티를 열고 있다.
울진대게와 문어를 한상 차린 밥상머리의 주연은 역시 '국민 장모 춘자할머니'이다.
오랜 세월 바닷바람에 맞서 자식을 기르고 가계를 일군, 영낙없는 갯마을 어머니 상이다.
▲ 후포항 대게 어로 작업 모습
'생태문화관광도시' 울진의 남쪽 관문이자 '국제마리나항'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후포(厚浦)의 본 이름은 '휘라포(徽羅浦)'이다.
'비단처럼 아름다운 포구'라는 뜻이다.
또 후포는 '후리그물질'의 어로방식이 잘 발달된 포구의 특성을 딴 '후리포'에서 어휘변용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한번쯤 후포항을 와 본 사람은 안다. 왜 후포항이 휘라포라는 이름을 지녔는지를.
고려 말 뛰어난 학자이자 문학가인 안축(安軸 1282~1348) 선생은 여말선초 격동의 정치적 변혁기에 영동의 최남단 울진 후포를 찾아 등기산 정상에 누각을 세우고 '망사정(望槎亭)'이라는 액편을 달았다.
'떼배를 바라보는 정자'. 머릿속에 그림 한 점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더없이 높고 푸른 하늘엔 흰 구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혹은 한데 엉켜 흐르고 하늘과 맞닿은 '천근(天根; 수평선)'은 눈에 잡힐 듯 아물거리고 갈매기는 속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청람빛 바다 위를 빙 돈다. 청람빛 바다에는 떼배 한 척 갈매기를 쫓아 일렁거린다"
정치적 격랑기의 혼란 속에서 동해 끝단 울진 후포 갯가에서 떼배를 만난 안축선생은 평생 만져보지 못한 '단사표음(簞食瓢飮)'의 세상을 만나고 '서린 뿌리와 엉클어진 마디'처럼 혼란스런 '반근착절(盤根錯節)'의 어지러운 세상을 바다에 던졌을 것이다.
▲ 후포 등기산에 복원된 망사정
조선조 대학자인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망사정에서 깎아지른 해안절벽 밑으로 가없이 펼쳐진 잔잔한 바다를 보며 "망사정 위는 신선의 집인데/망사정 아래는 어룡의 물결이네/은하수 한줄기 넓은 바다에 닿아있고/저 멀리 가을바람 따라 견우성에 이른다네"라고 노래했다.
여말선초 문인들로부터 사랑을 받던 망사정은 조선 중기에 중건되었다가 400여년이 지난 2010년에 복원됐다.
등기산(燈旗山)은 고기잡이 배들에게 지표를 알려주기 위해 낮에는 흰 깃발을 꼽고 밤에는 봉화불을 피웠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 등기산 팽나무 그늘에 서면 당신은 '첫사랑의 주인공'
▲ 후포 등기산 공원 팽나무 (여름풍경과 늦가을 풍경)
망사정과 함께 후포바다를 한눈에 조망하는 명소로 등기산 정상에 뿌리내린 팽나무 군락을 빼놓을 수 없다.
좌우로 가지를 뻗쳐 우람하면서도 단아한 모습의 팽나무 군락은 '영화 속 첫사랑의 장소'처럼 두 팔 벌려 코발트빛 후포 바다를 안고 있다.
무성한 잎사귀를 단 팽나무 그늘의 벤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면 "아련한 첫사랑의 향내"가 파도처럼 왈칵 가슴으로 달려온다.
팽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으면 누구나 '설레는 첫사랑의 주인공'이 된다.
마침 등기산 공원을 찾은 마흔 줄의 중년여성들이 팽나무 그늘아래 벤치에 앉아 후포 앞바다를 떠가는 배를 바라본다.
맑고 잔잔한 바다가 수천년을 어루만져 빚은 등기산은 해수와 바닷바람이 키운 해양 수종의 보고이다.
수령 이백년이 넘는 팽나무 군락과 경북 북부지방에서는 좀체 만나기 어려운 말채나무, 참빗살나무, 당조팝나무, 푼지나무가 사철 푸른 잎사귀를 매달고 바닷바람을 맞는다.
등기산 공원에서 건너편 해안 절벽으로 이어진 데크길을 따라 갓바위섬에 오르면 국민시인 신경림 선생의 시비가 반긴다.
신경림 시인은 자신의 시비가 세워진 후포항을 찾아 "서른 해 전 후포바다를 보며 화해와 사랑을 배웠다"고 말했다.
울릉도와 독도로 떠나는 뱃길의 출항지인 후포 북항에는 '울진대게의 일생사'를 한눈에 조망하고 학습할 수 있는 '울진대게전시관'이 조성돼 있다.
'비단을 깔아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바다' 후포항은 이제 동해안 어업전진기지에서 '국내 최대의 국제마리나항'으로 탈바꿈한다.
해양레저스포츠항만으로 거듭나는 셈이다.
◆ 거일마을서 만나는 '울진대게' 이야기
등기산과 후포바다를 뒤로 떼밀면서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오르면 '울진대게 원조마을'인 거일리에 닿는다.
'대게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 거일마을은 동해안 최대의 어족자원 보고인 '왕돌초'를 안고 있다.
후포에서 거일마을로 이어지는 바닷길은 전국의 낚시마니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바다낚시 명당'이다.
갯바위를 후리는 파도에 맞서 손끝으로 왈칵 달려드는 짜릿한 손맛은 직접 느껴본 사람만이 그 참맛을 알터이다.
한국수산자원관리공단이 이같은 명성을 살려 바다낚시 명당터인 거일마을 앞 바다에 '바다낚시공원'을 조성했다.
거일마을 초입에 '울진대게 원조마을'을 알리는 울진대게공원이 단아하게 자리잡고 있다.
'대나무 마디'를 닮은 울진대게상(像)과 울진대게잡이로 가계를 이룬 어부상(像), 그리고 원조마을 거일리의 유래비가 에메랄드빛 바다를 배경으로 훌륭한 포토존을 선사한다.
▲ 거일리 앞 바다 갯바위
거일마을의 지명유래는 바로 '대게'의 생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거일마을의 향언은 '게알'이다. '대게 알'을 뜻함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마을의 형국 또한 '알을 품고 있는 대게의 몸통'을 닮아있다.
거일마을 사람들에게서 대게는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삶 전체에 고스란히 자리잡고 있다.
수산학계와 어업인들의 로망인 '왕돌초'의 중심마을 또한 이 거일마을이다.
왕돌초는 울진대게의 최대 서식지이자 동해안 최고의 어자원 보고로 각광받고 있는 수중바위군락이다.
울진군은 이 왕돌초를 중심으로 바다목장화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
거일마을을 지나 흰 파도가 뭍으로 오르는 바닷길을 따라 10여리쯤 북쪽으로 발길을 놓으면 '신라화랑 정신을 배태한' 월송숲을 만난다.
월송숲 언저리에서 만나는 월송정(越松亭)은 관동팔경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누각이다.
신라 정신의 표상인 화랑들이 심신을 연마한 월송숲 속에 싸여 '송림 위로 떠오르는 달'의 풍광을 바라본다는 월송정의 풍취는 가히 당대의 문인가객들이 무릎을 칠만큼 황홀하다.
'여지도서(輿地圖書)'는 월송정 언덕을 '조산(造山)' 풍수이야기로 설명하고 있다.
▲ 월송정
◆ '울릉.독도 실질지배 현장' 대풍헌서 역사를 배우다
무엇보다 눈여겨봐야할 대목이 월송정 주변에서 발굴된 '월송포진'의 유적이다.
일찍이 울진 평해지역은 '울릉도와 독도의 실질지배'를 위한 뱃길의 첫출발지로 역사학계가 주목하고 있는 곳이다.
이른바 국토영유권의 역사적 현장인 셈이다.
그 대표적 문화유산이 기성면 구산리의 '대풍헌(待風軒)'과 이곳 '월송포진과 월송정'이다.
▲ 대풍헌
▲ 수토사행렬 재현
대풍헌은 조선조 울릉도와 독도를 관할하기 위한 수토(搜討)를 위해 뱃길을 기다리던 출항지이다.
최근 월송숲 일원에서 '월송포진'의 유적이 발굴되면서 대풍헌과 함께 이곳 월송숲은 ‘울릉도와 독도의 실질지배’의 역사적 현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월송정은 지금의 모습 이전에 월송포진의 관문이었음이 확인됐다.
조선조 최고의 진경화가인 겸재 정선의 '월송정도'도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울진군은 월송포진 일대를 국내 대표적인 '국토영유권 역사문화관광권'인 '수토문화나라'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또 해마다 봄철에 조선조 당시의 수토사 행렬을 재현하는 '수토사뱃길재현'축제를 펼치고 있다.
월송숲의 북쪽 언저리에 서 있는 '군무교비'도 눈길을 끈다.
군무교는 대풍헌이 있는 기성면 구산마을과 월송포진을 잇는 다리이다.
군무교비는 조선조 당시 구산마을과 월송을 잇는 교량건설의 전 과정을 담은 석비이다.
특히 이 석비가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당시 교량건설에 동원된 민중들의 이름과 역할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울진군은 '울릉도와 독도 실질지배의 역사적 현장'인 대풍헌과 월송포진 일대를 '국토영유권 역사문화권'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 망양리 '망양정 옛터'에서 겸재 정선을 만나다
▲ 옛 망양정 복원
구산마을을 지나 봉산포구를 돌아 '오징어 풍물거리'로 조성된 망양리에 다다르면 '울진바다의 아름다움과 빛깔을 오롯이 만나는' 망양정 옛터를 만난다.
겸재 정선은 "조선조 천하제일루"의 명성을 떨친 망양정을 만나기 위해 한양을 떠나 천리길을 달려와 "만경창파를 굽어보며 파도가 부서지는 해안단애 꼭대기에 하늘을 받치고 있는 망양정을 보고 단숨에 불후의 명작 '망양정도'를 남겼다.
정선의 망양정도만으로도 숙종대왕이 왜 '천하제일루'라는 액편을 하사했는지를 너끈히 알수 있다.
'천하제일루'의 명성은 이제 유허비와 세 그루의 송림으로 남고 망양정은 '울진의 젖줄'인 왕피천이 바다와 만나는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로 이건 되어 옛 명성을 다시 되살리고 있다.
망양정 옛터는 조선 후기 기행가이자 문인인 옥소 권섭의 유행록(遊行錄) 속에 등장하는 '조도잔(鳥道棧)'과 함께 신라시대 수로부인이 남편인 강릉태수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 벌어지는 로맨틱 스캔들을 담은 "꽃 꺾어 바친 백수노인"의 이야기인 '헌화가'와 '구지가'의 현장으로도 추정돼 '생태문화관광도시' 울진의 정수를 보여주는 스토리텔링의 현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최근 울진군은 겸재 정선의 망양정도를 토대로 옛 망양정을 복원했다.
- 글쓴이 : 남효선
-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안동대학교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공부하였다. 1989년 문학사상의 시 부문에서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하였다. 한국작가회의, 경북작가회의, 안동참꽃문학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둘게삼』이 있다. 현재 시민사회신문의 전국본부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