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안경애_영주 문화산책, 지역의 역사인물]‘망국의 한 기록으로 꽃피우다’
- 안경애(cultureline@naver.com)
‘망국의 한 기록으로 꽃피우다’
기려자 송상도
‘나 송상도는 미약하여 순절하려고 해도 마땅하게 죽을 이유를 찾지 못하였으며, 의거하려고 하여도 지혜와 담력이 없으며 해외로 나가 광복을 도무하려고 하여도 자금과 농사지을 힘이 부족하니 모두 할 수 없다. 그러나 의리를 좋아하는 마음은 오히려 사라지지 않았다. 이에 감히 옛날 기려도사 일을 본받아 호남, 관서, 기호, 영남 등지를 돌아다니며 어려움과 수고로움을 회피하지 않고 늙어 죽을 때까지 널리 수집하고 찾아다녀 책을 완성하였다.’
기려자(騎驢子) 송상도 지사의 ‘기려수필’ 발문이다.
송상도는 1871년 4월 12일 영주시 휴천동 광승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송학영, 어머니는 박제천이었다. 호는 기려자, 미헌 혹은 연파라고도 불렀다. 가학(家學)으로 공부하다가 탄당 김영주와 동정 이정호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닦았다. 원래 호서지방 사람이었던 첫 스승 탄당은 의병을 일으켜 유생들에게 격문을 보내며 항일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스승 이정호는 당대 영남의 대표적 유학자였다.
송상도는 날마다 탄당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 무렵 국운이 기울어 가는 것을 느껴서인지 스승은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며 송상도에게 기려도사 이야기를 자주 했다. 중국 명(明) 말, 토적 이자성이 군사를 일으켜 마침내 명나라가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오랑캐들은 청나라를 세웠다. 한 선비가 명을 그리며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 나귀를 타고 중국 일대를 돌아다니며 의로운 사람들의 행적을 수집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기려도사’라고 했다.
스승이 들려준 이 이야기는 뒷날 나라를 잃은 선비, 송상도의 삶에 큰 이정표가 됐다. 5년 뒤인 1900년 스승은 세상을 떠났지만 평소 들려주던 기려도사 이야기는 가슴 속에 여전히 살아 있었던 모양이다. 탄당이 떠난 후 다행히 명망 있는 동정 이정호 선생이 송상도가 거주하는 곳 가까이로 이사를 오자 스스로 찾아가 스승으로 모신다. 탄당이 떠났던 1900년경에는 송상도 집안에도 애사가 연이었다. 조부와 아내 금씨, 그리고 조카와 시집간 누이까지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집안에서 스스로 학문에 힘썼던 가학(家學)시기에 이어 청․장년기에는 탄당 김영주, 동정 이정호 두 스승을 통해 한학을 배운 송상도는 권상익(權相翊) 등 인근 유학자들과 두루 사귀었으며, 곽종석(郭鍾錫), 전우(田愚) 등과 교류해 식견을 넓혔다. 특히, 권상익은 1919년 파리장서 의거를 이끌었던 사람으로 ‘기려수필’ 서문을 썼다.
그는 서문에서
‘나의 벗 야성(冶城) 성소(聖韶) 송상도는 죽음을 무릅쓰고 남들이 놀랄 만한 위험을 감내하고 여러 해 동안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 경상도 등 수 천리를 돌아다니며 이곳저곳에서 의로운 행적들을 빠짐없이 수집하여 손수 기록하였다. 생사 여부, 세상에 드러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따지지 않고 다만 분명한 사실만을 모아 몇 권의 책으로 엮었으니, 바로 ‘기려수필’이다.‘ 라고 밝히며,
‘송상도는 의(義)와 리(利)의 구분을 살피고 인간의 바른 마음을 아껴서 자신에게 다가올 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그 같은 사람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송상도가 본격적으로 ‘기려수필’ 저작에 힘쓴 것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로 알려져 있다. 송상도는 명나라가 망한 뒤 기려도사가 나귀를 타고 다니며 明末 충신의 사적을 수집하였던 것을 본받아 우리나라 애국지사 등 의인의 사적을 편찬할 결심을 하고 전국을 누비며 자료를 수집했다. 애국지사를 직접 만나기도 하고 유가족 등 친지를 만나 사적을 기록하고 사건 당시의 신문과 기타자료, 유학자의 문집에 수록된 자료를 수집해 ‘기려수필’을 편찬했다.
‘한복 한 벌을 돌돌 말아 괴나리봇짐을 하고 집을 나서면 어떤 때는 봄에 떠나 가을에 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겨울옷을 입고 떠나 여름에 돌아오기도 했다. 또, 봄에 솜옷을 입고 떠났는데 3년 만에 여름 삼베옷을 입고 돌아온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때로는 거지 가운데 상거지가 되어 돌아오기도 했다. 모양새가 이렇다보니 이웃들이 시어른을 이상한 사람 취급을 했다. 인근 선비들은 ’글깨나 한다는 선비가 입하나 덜기 위해 과객노릇만 한다.‘ 고도 했다.
‘간혹 거지꼴을 한 손님 여러 명이 집에서 함께 묵었는데 오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눴다. 거지 옷 빨래를 수 없이 하고 손님들을 위해 새 옷을 짓기도 했다. 개를 잡아 극진히 대접하고 여비까지 보태주셨는데 그때는 그 거지 꼴을 한 분들이 지하 독립운동가, 비밀연락원, 군자금관계자라는 것을 몰랐다. 시어른은 성질이 급한데다 불호령이 떨어지면 무조건 복종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십여 마지기나 되던 논밭도 이웃에 꾼 빚 때문에 다 팔아 없앴다.’
생전, 송상도 며느리의 증언이다.
이렇듯 그가 자신의 전 생애와 가족들의 희생을 통해 애국지사들의 발자취를 기록한 ‘기려수필’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사료가 됐다. 기려수필에는 애국지사 207명의 약전(略傳)이 실려 있다. 이 가운데 독립운동을 펼치다 순국한 인물은 66명, 자결 등 순절한 사람은 52명이다. 이들의 신분은 대부분 관료나 유학자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여성을 비롯해 향리, 내시, 노비, 포수 등 다양한 계층의 인물과 중국인도 포함되어 있다.
‘세신(世臣)이나 옛 벌열(閥閱)중에 충성과 남다른 절의가 있는 사람들의 경우는 틀림없이 나라의 역사서에 실리고 야사에 수록되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초야에서 지낸 미천한 무리들의 경우는 전해줄 집안도 없으며 채록할 사람도 없어 틀림없이 궁벽진 시골에서 사라져 눈(雪) 속 기러기 발자국처럼 아무흔적 조차 남지 않을 테니 안타깝고 탄식할 만하지 않겠는가! 이러므로 이런 사람들의 기록을 더욱 수집해 숨겨진 사실을 밝혀주는 春秋의 뜻을 붙인다.’
기려수필 범례(凡例)에 실린 이 글은 송상도의 뜨거운 애민사상을 엿보게 한다. 송상도는 충신과 열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거리를 따지지 않고 달려갔다. 이를 통해 인물의 가계나 생애와 같은 일반 사실과 항일행적을 밝히고 서술함에 있어 최대한 실증을 기하고자 했다. 그 뿐이랴, 일일이 관련기록을 찾아내어 정리하고 공정성이 없다고 판단되면 자료를 취하지 않았다. 송상도는 이처럼 신중하게 판단해 저술의 신뢰성을 높이고자 애썼다. 그리고 간혹 인물의 평, 안설(按設)을 붙였다.
해방 후 광복 이전에 송상도가 쓴 내용을 묶은 ‘기려수필’은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송상도가 직접 보고 듣거나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직접 써서 엮은 책이었기에 그 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이 때문에 기려수필은 나라에서 독립유공자를 포상할 때 중요한 근거 자료로 채택된다. 송상도는 ‘기려수필’ 편찬 후에도 해외에서 활약한 애국지사들에 대해 수집, 책을 내고자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1946년 12월 26일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송상도는 민족자존을 지키고 역사적 책임을 다하고자 했던 애국지사들의 행적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30년의 참담한 세월을 견디며 삶을 오롯이 역사기록에 바쳤다. 송상도의 묘는 생가가 있는 영주시 휴천동 광승마을 뒷산에 있다가 1992년 6월19일 대전 국립묘지로 이장됐다. 1986년 건국표창, 1990년 12월26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송상도의 고향인 영주지역 사람들은 영주시에 있는 도립도서관 경내에 기려자 송상도지사 추모 기념비를 세웠다.
기려자송상도지사 기념사업회에서는 학술세미나를 개최하고 기려수필 국역판 ‘망국의 한 기록으로 꽃피우다’를 출판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세신(世臣)-대대로 한 왕가나 가문만을 섬기는 신하.
벌열(閥閱)-나라에 공을 세우거나 큰 벼슬을 지낸 사람이 많은 집안.
- 글쓴이 : 안경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