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황구하_시로 거니는 상주]늦은 감의 풍경
- 황구하(cultureline@naver.com)
늦은 감의 풍경 _ 시인 황구하
“감 깎고 돌아오겠습니다”
풍물시장 과일가게 셔터는 내려지고 노을빛 현수막이 비뚜름히 걸렸습니다. 바야흐로 곶감 철, 한 사람의 일손이 절실한 때입니다. 감 깎기는 한로에서 상강 전후부터 시작됩니다. 찬서리가 내리기 전 감을 따서 깎아 건조장에 매다는데요. 이 시기를 놓치면 곶감농사 낭패를 보게 되니 잠시 장사를 접어두
고라도 감 깎는 작업에 매달리는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평일인데도 문 닫힌 가게가 의외로 많습니다.
시내 볼일을 보고 집으로 걸어들어 오다가 내친김에 북천 산책길에 들었습니다. 해가 지려면 아직 두어 시간이 남았는데도 바람 끝이 선득선득했습니다. 북천 가로수길 단풍든 벚꽃 이파리와 알록달록 감나무 이파리가 발아래 나뒹굴었는데요. 가로수는 곱게 물든 이파리를 내려놓는 대신 성신여중 학생들의 시화를 한 장씩 달고 있었습니다.
여중생들의 솔직하고 재치있는 시화를 보며 천천히 걷다가 잠시 의자에 앉았습니다. 바람결에 무늬를이루는 물살과 한적하게 노니는 청둥오리떼를 바라보고 있는데 손전화에 사진 하나가 날아듭니다. 둥글게 잘 깎은 감을 매달고 있는 현옥 씨 사진이었습니다. 아이들 글쓰기 가르치고 시 쓰고 성당 일에 집안일까지 바쁘기도 하련만 친구네 도와준다고 달려간 맘이 불그스름 번져옵니다.
상주는 남장동 곶감마을은 물론이고 논과 밭 심지어 시내 중심 가로수까지 감나무가 즐비합니다. 내 어릴 적 고향집 앞마당에도 감나무 한 그루 있습니다. 봄날 감꽃이 토도톡 떨어지면 왕관처럼 어여쁜 감꽃을 주워서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들었지요. 감꽃 목걸이 두르고 다니다 허기가 지면 톡톡 떼어 먹기도 했고요. 또 땡감이 떨어지면 소금물에 울쿼서 먹고 이파리 이쁘게 물들고 빠알간 홍시가 보이면 망을 단 장대로 따먹기도 했습니다. 제대로 따지 못하고 홍시가 땅바닥으로 철퍽 떨어지기도 했지요. 그래도 그걸 주워 깨끗한 자리 한 입 물면 얼마나 달큰했던지요.
감은 조선 초기 경상도 고령 지방에서 재배했다고 합니다. 경북 예천의 고종시와 더불어 의성의 사곡시, 경산 · 청도의 반시, 고령의 수시 등 맛나기로 이름나 있는 감이 많습니다. 상주는 둥시입니다. 감이 둥글둥글 둥글다 하여 붙은 이름이지요. 고종시는 고종 황제께 진상했다 하여 붙은 이름이고 사곡시는 고을 이름을 딴 것이랍니다.
감은 한자로 ‘시(柹)’라고 쓰는데, 『물명고』는 “감의 고자(古字)는 시(柹)이고, 범어(梵語)로는 진두가(鎭頭迦)라 한다. 수시(水柹)는 수분이 많고 맛이 좋은 것, 조홍(早紅)은 6월에 익는 작은 것, 홍시(紅柹)는 붉게 익은 것을 따서 따뜻한 곳에 두어 절로 홍숙시킨 것, 건시(乾柹)는 곶감, 백시(白柹)·황시(黃柹)는 볕에 말린 것, 오시(烏柹)는 불에 말린 것, 준시(蹲柹)는 꼬챙이에 꿰지 않고 압편한 것을 가리킨다.” 라고 다양한 종류의 감을 소개합니다. 또, 건시 껍질에 돋아나는 흰 가루를 시상(柹霜) 또는 시설(柹雪)이라 한다고 합니다.
문득 시(柹)가 시(詩)와 겹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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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홍시는 빠알간 얼굴로
날 놀긴다.
돌을 쥐고 탁 던지니까
던져 보시롱
던져 보시롱
헤헤 안 맞았지롱 이런다.
요놈의 감홍시
두고 보자.
계속 계속 돌팔매질을 해도
끝까지 안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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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도곤(울진 온정 4학년(1986년)), 「감홍시」, 이호철 엮음, 『요놈의 감홍시』(보리, 2005)
아이들과 글쓰기 공부를 할 때면 이 시를 즐겨 노래 불렀습니다. 봄을 지나 여름을 건너 가을 하늘을 환하게 밝혀주는 감홍시는 있는 그대로 한 편의 시이지요. 고종시, 사곡시, 반시, 수시, 먹시, 월하시, 둥시, 정말 감 이름도 제각각 한 편의 시로 읽혀집니다. “시는 욕망의 꿈틀거림이고, 불화(不和)의 부르짖음이에요. 생피를 보려면 딱지 앉은 것을 벗겨내야 해요. 예술은 생을 알몸으로 사는 일이에요.” 이성복 시인의 시론집 『무한화서』의 뜨거운 문장도 생각납니다. 껍질 잘 벗겨진 감처럼 결국은 제살 찢으며 바람과 햇살과 잘 포개지는 것, 온몸 땅심으로 견디며 거듭나는 수행과 치유, 그게 시가 아닐는지요.
알몸으로 완성되는 곶감은 ‘꼬챙이에 꽂아서 말린 감’으로 ‘곶다’에서 온 말입니다. 된소리로 ‘꽂감’이라 하는 것도 ‘꽂다’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곶감은 햇살과 바람결에 마릅니다. 바람이 잘 통하는 처마 밑에 주렁주렁 매달거나 볏짚으로 새끼줄을 엮어 거기에 감을 매달던 풍경은 그리움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주로 플라스틱으로 만든 곶감 매다는 도구를 이용해 말리지요.
감을 깎아 매달면 바람따라 둥글둥글 노을빛 알몸이 춤을 춥니다. 차츰 빛이 탁해지면서 겉은 꾸덕꾸덕해지고 속은 말랑말랑한 홍시로 바뀌는데요. 감이 잘 마르고 곶감이 되기까지는 달포에서 두 달 정도 걸린답니다. 반건시는 한 달 정도, 건시는 두 달 정도가 필요한데요. 어릴 땐 바싹 말라 하얀 분이 나기 전 이즈음의 곶감을 하나하나 빼서 참 달게 먹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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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깎는 기계에 손이 먹힌 아버지
지난가을 유난히도 풍년이 들어
짧은 가을 해에 손길은 더뎌
찬바람에 사람이 말라야
피 마르고 살 마른 꺼칠한 아버지
그래도 손 다 안 달아나기 다행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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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덕, 「곶감」, 『붉은디기』(시와에세이, 2015)
‘하늘 아래 첫 감나무’로 불리는 수령 750년 된 감나무가 있습니다. 그 나무 아래 돌비석에는 “지금 곶감의 진상을 상주에 나누어 정하였다(今也乾柹之貢分於尙州而尙州買.『예종실록』, 「권 2」, 1468년 11월 13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요. 그곳 외남면 소은리가 고향인 박순덕 시인의 시를 읽으며 잠시 눈시울 붉어집니다.
모든 농사가 그렇듯 곶감농사도 어려움이 많습니다. 감나무 가지는 여간 약한 게 아닙니다. 감을 따다 떨어지면 약도 없다는 게 헛말이 아닙니다. 해마다 감을 따다 감나무에서 떨어져 죽거나 크게 다쳐 병원 신세를 지는 경우를 종종 봐왔으니까요. 어찌 감 따는 데만 위험이 도사리고 있겠는지요. 박순덕 시인의 아버님처럼 “감 깎는 기계에 손이 먹힌” 사람도 여럿 있습니다. 기온이 높으면 곶감이 되기도 전에 건조장에서 순식간에 내려앉아버리는 일도 허다합니다.
고향의 정감을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나무로 단연 감나무가 으뜸일 것입니다. 어릴 적 감은 곶감뿐만 아니라 항아리에 담아 보관하던 귀한 양식이었지요. 한겨울 항아리에서 꺼내온 홍시는 이가 시리도록 차가워 오소소 떨기도 했지만 입에 착착 감기는 달고 시원한 맛으로 긴 겨울밤의 허기를 달래주곤 했습니다. 고 김남주 시인은 시 「옛 마을을 지나며」에서 “찬서리/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아름다움을 “조선의 마음”이라 했습니다. 여기에는 사람의 양식이 아닌 한겨울 날짐승을 위한 양식의 나눔과 베풂의 정신이 가득합니다.
“던져 보시롱/던져 보시롱” 빨갛게 놀리는 감홍시를 향해 까치발을 하고 “돌팔매질”하던 꼬마는 이제 중년이 되었겠지요. 깊어가는 이 가을날 저처럼 고향집 감나무를 그리워하거나 고향에서 감홍시를 달게 먹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찬바람 더 사나워지기 전 빈집을 혼자 지키고 있는 고향집 감나무를 만나러 가야겠습니다. 감꽃 목걸이를 걸게 해주고 배고픔을 채워주고 그늘 아래 돗자리를 펴고 놀게 해주던 감나무, 어린 학생들의 시를 달고 있는 북천 감나무처럼 까치밥 몇 개 매단 채 겨울 수행에 드는 그를 꼭 안아주어야겠습니다.
곶감 철, 상주 시내가 조용합니다. 한 달 가까이 이 적막을 건너가야 옷가게도 미용실도 식당도 커피숍도 북적북적 깨어날 것입니다. 그래야 풍물시장도 얼쑤얼쑤 내고 달아 맺고 풀 것입니다. 며칠 전 통화했던 친구 말이 생각납니다.
“요새 괜히 시내 빌빌 돌아댕기지 마. 감도 못 깎는 뇨자라고 놀리여.”(♣) 
- 글쓴이 : 황구하
-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다. 영남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2004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 『물에 뜬 달』이 있으며 현재 반년간지 『시에티카』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