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소애_쑤세미의 골방에서 만화읽기]90년대 병맛 아니, 개그만화 <보글보글>
• 컬처라인(cultureline@naver.com) 2015-06-29

“노래방에서 100점을 맞아야 아지트로 갈 수 있다”
90년대 병맛 아니, 개그만화 <보글보글>

장면1. 지구 정복을 노리는 악의 무리 마그마에 맞서 지구를 지키는 비밀단체 스완(SWAN). 스완의 특수요원 나도산은 뻑하면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분과 이름을 밝히고 다닌다. 나도산은 임무를 완수하거나 부장의 호출이 있을 때면 항상 동네 보글보글 노래방의 12호 방에서 열창을 한다. 그곳에서 100점을 맞아야 스완의 비밀 아지트로 통하는 문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 문을 통과한 후에는 철저한 보안유지를 위해 ‘암호’를 묻는데 답은 ‘모른다’이다. 어느 날은 밤새도록 노래를 불러도 100점을 맞지 못해 결국 아지트 입성에 실패한 적도 있다.

장면2. 나도산은 수수께끼의 조직 마그마의 오락부장 미스터R의 방에 잠입한다. 미스터 R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버릇이 있는데 나도산은 런닝을 입고 이불 속에 누운 그에서 총구를 들이댄다. 미스터R은 순간 두 손가락으로 나도산의 눈을 찌른다. 기습에 놀란 나도산이 엉뚱한 곳에 총을 쏘며 괴로워하는 동안 미스터R은 여유 있게 실탄을 장정한다. 그러나 나도산은 바로 정신을 수습하여 스승님을 떠올리며 그간의 혹독한 훈련내용을 복기한다.
“잊지 마라, 그 힘든 훈련을. 이 순간을 위해 얼마나 힘든 훈련을 해왔는지……. 마음의 눈으로 상대를 봐야 하느니라.” 불 꺼진 방에서 떡을 써는 스승님 옆에서 총을 쏘았던 순간, 소림사 무림고수처럼 화로를 품에 품고 총을 쐈던 순간 등을 떠올리며 나도산은 미스터R을 해치운다.

‘초감각 사이파이(PSI-FI)개그’라 명명한 만화 <보글보글>은 1997년 <<영점프>>17호에 연재를 시작하며 이후 총3권의 단행본으로 묶여 나왔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악인을 응징하는 대머리 소시민 아저씨를 주인공으로 한 <대한민국 황대장>(1991)으로 유명한 만화가 김진태는 그동안 인물 간 소심한 복수의 향연을 보여주는 시트콤식 찌질한 캐릭터와 슬랩스틱 코미디가 난무하는 작품을 선보였다. <대한민국 황대장>에서는 고유명사처럼 되어버린 그 유명한 ‘처절한 응징’이 등장하는데 처절한 응징이란 바로 업그레이드 된 ‘똥침’을 일컫는 말이다.
<대한민국 황대장>은 슈퍼맨 대머리 아저씨 버전으로, 대한민국 어느 곳에서나 도움을 요청하는 곳에 보자기 같은 빨간 망토를 휘날리며 급히 달려가서 사건을 해결(?)하는 황대장의 영웅담을 그린 만화다. ‘황대장’은 때로는 드래곤볼의 할아범처럼, 때로는 크레용신짱의 짱구처럼 변태 혹은 주접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한민국 황대장>, <시민쾌걸>, <영웅열공전>으로 이어지는 작품을 통해 토종 한국형 히어로의 탄생이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며 불의에 득달같이 달려가 응징하는 소시민의 활약상을 그려내는 김진태 작가의 작품관을 엿볼 수 있다.

<식객> <미생> 등 몇몇 대형 베스트셀러 작품을 제외한 종이 만화책 시대가 저물고 웹툰이 인기인 지금, 그의 엉뚱한 개그는 충분히 대중을 사로잡을 요소가 많다. 오히려 지금 더 활발히 활동한다면 더욱 인기가 많을 작가라 짐작해본다. 세상의 루저들에게 방구석에서 키득거리는 재미를 안겨주는 김진태식 개그를 일종의 ‘병맛’만화로도 부를 수도 있는데, 순전히 긍정적인 의미의 ‘병맛’만화임을 밝히고 싶다. 왜냐면 그의 만화에는 풍자와 해학이 버무려진 개그가 있으니까.

위키백과에 따르면 ‘병맛’이란 인터넷 유행어로, 정확한 의미를 규정하기는 어려우나 어떤 대상이 맥락 없고 형편없으며 어이없음을 뜻하는 신조어라고 한다. 또 인터넷에서 병맛을 가장 널리 표방하는 방식은 ‘웹툰’이며 병맛 만화의 특징은 대충 그린 듯한 작화체, 비정상적인 이야기 구성 및 내용이라고 한다. ‘병신 같은 말’의 축약어이지만 이제는 ‘아르바이트’라 부르지 않고 ‘알바’라 부르는 사람이 더 많은 것처럼 어느새 ‘병맛’이라 더 많이 불리고 있다.
‘뭥미’식의 황당한 내용과 ‘우왕 굳’식의 전복할만한 결말로 병맛 마니아들을 환호하게 한 최근의 웹툰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자연 1990년대에는 만화가 김진태가 떠오른다. 엉뚱하고 황당하고 저질스런 B급 문화를 ‘병맛’이라고 한다면 난 사실 ‘병맛 문화’의 마니아이기도 하다. 만화가 김진태는 품위를 지키려는 사람을 기어코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리고 심각한 사안도 개그로 승화하는 뛰어난 감각을 선보인다.
숟가락 구부리기를 온 국민 앞에서 시연한 유리 겔라(나중엔 논란이 됐지만), 인터넷 채팅, 영화 접속, 현피 뜨기 등 1990년대 유행 문화와 각종 패러디를 담은 <보글보글>은 연예인들의 쓰잘데기 없는 신변잡기를 얘기하면서 항상 ‘고품격 방송’임을 외치는 TV예능 <라디오스타>처럼 다소 유치하고 저질스런 내용으로도 얼마든지 ‘고품격 개그 만화’의 신화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적으로, 마그마가 지구정복을 위해 만든 생체병기들에게 적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하자 생체병기는 ‘우리는 누구이며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절망과 불안의 시대를 헤치고 찬란한 21세기의 주역이 되자’고 외친다. 이유는 생체병기 DNA 우성인자 중에 철학교수의 것이 있어서라고 한다. 우람한 근육질의 생체병기 10001호는 ‘나는 누구인가’를 외치며 골목에서 행려생활을 하다 스완의 해외요원인 재불교포 산부인과 의사인 애잘빼옹을 만나게 된다. 애잘빼옹은 1인당 국민소득이 만불이 넘는 한국의 도시빈민을 보며 가슴아파한다. 마침 애잘빼옹은 채팅을 하다 욕설을 남발한 마그마의 멤버 프로디지와 현피를 뜨게 되어 그곳에 생체병기 10001호를 데려가고 프로디지는 치사하게 혼자 안 나오고 친구를 데려왔다고 비난하는데 애잘빼옹의 답변이 걸작이다.
“이분의 실체는 경제성장의 그늘에 가려진 민중의 실체야.”

온갖 고생을 하며 지구를 지키게 된 스완이지만 그들의 활약상을 알아주는 이가 없고 당분간 휴가를 즐기고 싶다는 부장의 바람에도 불구, 그들은 우주선에 태워져 이제는 우주의 평화를 위해 지구 밖으로 날아가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이 황당무계한 설정과 유쾌한 개그코드를 지닌 만화 <보글보글>은 종이만화의 중흥기, 만화방 구석에서 ‘큭큭’거리며 봤던 그 마지막 시대를 장식했던 수많은 만화 중 하나이다.
끝으로 ‘X-파일을 능가하는 미스테리에 배꼽 잡는 유머의 진수가 어우러진 새로운 감각의 개그만화’ ‘김진태표 만화는 월드베스트 품질과 평생 애프터서비스를 보장합니다!’라는 책의 표지 글을 과연 출판사에서 썼는지 만화가 김진태가 썼는지 무척 궁금하기 짝이 없다.

보글보글1-3완결/ 김진태/ ㈜서울문화사/ 1988

글쓴이 : 백소애

강원도 태백 출생. 아이큐는 낮지만 머리가 좋다고 굳게 믿고 있음. 변덕이 심하고 우유부단하나 따뜻한 품성을 지니고 있다. 조카들에게 헌신적이며 인간성 또한 좋다.....고 믿고 있다. 학생 때 교무실에서 밀대자루로 바닥 밀면서 은밀히 훔쳐본 생활기록부에는 ‘예의 바르나 산만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한참을 갸우뚱 하다가 담임이 수학선생님이었기에 그냥 이해하기로 함. 다소 후진 취향을 지니고 있으나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고 쓸데없는 걱정과 호기심이 많음. 같은 계획을 몇 년째 하고 있으며 역시나 올해도 다이어트와 앞머리 기르기에 도전할 생각이며 과메기에 없어서는 안 될 다시마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 웹툰도 괜찮지만 만화책은 역시 종이책으로 보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아날로그 건어물녀. 좋아하는 것은 무한도전, 오뎅으로 만든 떡볶이, 삼겹살에 매실소주, 비오는 날, 생활의 달인,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괴짜가족 류의 저질유머. 비 오는 날 무한도전 틀어놓고 배 깔고 누워 만화책 보면서 빈둥거리며 사는 것이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