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황구하_시로 거니는 상주]그리움 한 권
- 황구하
그리움 한 권
“오대 뜰 눈부시네요. 오대 뜰 구경하고 갑장산 입구에 가서 설든 단풍놀이합시다.”
손전화에 마련된 카톡방에 ‘느티나무시’ 동인 순영 언니의 말 주머니가 뜹니다. 가을 깊은 날, 기차소리가 당겨오는 창밖 풍경은 빛나는 노랑연둣빛입니다. 절체절명으로 물들어가는 들녘은 환하게 빛나면서도 무언가 긴박하고도 예정된 쓸쓸한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괜스레 마음 시큰거려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상주에 다다를 즈음이었지요. 순영 언니는 또 “오대 뜰 낼모레면 감 다 따고 없어지니 서둘러야, 익어가는 감나무는 석양에 봐야 장관”이라며 노을빛으로 물들어가는 감나무 사진을 띄워줍니다. 그리고는 애호박 채 썰고 육수내서 칼국수 준비한다며 어서들 오라고 톡톡 마음을 두드립니다.
저절로 마음 동당거려 상주에 도착하자마자 주애 씨 차를 타고 오대 들녘으로 나섰습니다. 오이농사 짓느라 날마다 눈코 뜰 새 없는 순영 언니는 뜨끈한 칼국수와 정구지 부침개를 푸짐하게 준비해놓았더군요. 그 많은 오이모종 다 심고 몸살할 일만 남았다더니 하루 잠시 쉬어가는 틈 가을 풍광 보라고 고맙게도 또 우리를 부른 겁니다.
수업일정 때문에 더 오래 못 있는다고 이숙 씨는 아쉬워했습니다. 순영 언니가 마련한 칼국수와 정구지 부침개를 맛나게 먹을 때 현옥 씨는 또 색색의 송편이랑 호박떡을 들고 왔지요. 모두들 제각각 바쁜 일과 중 짬을 내서 둘레둘레 나누는 음식과 차 한잔이 소중하기만 합니다. 그 많은 웃음소리가 어디 숨어있다 그리 퐁퐁 터져 나오는지 여인들 한껏 웃다가 설렁설렁 들녘을 거닐었습니다.
가을볕 누리고 있는 들판은 그야말로 황금빛, 눈이 부셨습니다. 논둑엔 짝짓기하는 메뚜기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투두둑거렸는데요. 난데없이 소란을 일으킨 우리는 미안해하면서도 손전화를 들이밀며 사진을 찍었답니다. 억새와 여뀌가 물소리를 삼키고 있는 도랑엔 버들치가 떼를 지어 노닐고요. 허공에선 잠자리떼가 연방 꽃무늬를 그리며 날고 있었습니다. 도꼬마리, 참취, 구절초, 쑥부쟁이, 벌개미취, 며느리밥풀, 개망초, 돼지감자와 낮게 꾸불티고 앉아야만 보이는 작고 여린 꽃들이 논둑과 꼬부랑 들길에 오종종 모여 가을볕을 야금야금 베어 물고 있었습니다.
오대 들은 흥각마을과 오대마을의 서쪽 들인데요. 순영 언니네 오이농장은 오대 들 한가운데 배꼽처럼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산이며 과수원이며 논이며 밭이 어깨를 걸고 둘러서서 서로를 토닥이고 쓰다듬기에 더함도 덜함도 없이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지요.
순영 언니네 오이농장 앞 텃밭에는 무가 성성하고 배추는 벌레에게 보시를 해서 구멍이 숭숭했습니다. 저걸로 어찌 김장을 할 수 있겠느냐고 지인들로부터 타박을 들었다는데요. 그래도 내 농사 진 거니 여벌김치라도 담그지 않겠느냐고 웃습니다. 그 모양이 어쩐지 먹을거리 손수 농사짓는 이의 여유와 뿌듯함으로 전해집니다. 채반에 널어놓은 고추랑 대추도 간잔지런하기만 합니다.
순영 언니는 실하게 자라고 있는 무 고랑을 오가며 듬성듬성 무를 뽑았습니다. 저에게도 옆에 있는 지고추를 따라며 재촉을 하였는데요. 다닥다닥 바람결에 흔들리는 고추를 톡톡 따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순덕 언니와 춘자 언니가 늦게 와서 함께 고추를 따고 넝쿨진 수세미랑 호박도 두어 덩이 거두었습니다. 가게 일 때문에 오지 못하는 미령 언니가 아쉽다며 요모조모 챙기는 순영 언니 품새에 가슴이 뭉클했는데요. 커다란 비닐 포대를 가져와 재바르게 이것저것 담아주는 순영 언니 손놀림에 그만 울컥,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엄마는 맏종부로 시집와 일 년 내내 제사와 생신, 집안 대소사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여인이었습니다. 앓아누우신 증조할아버지 심심할까봐 우리 동무들 마당에서 놀게 했고요. 간간 입이 심심하면 증조할아버지 방에 가서 절을 하게 했지요. 그러면 증조할아버지는 머리맡의 박하사탕을 한 움큼씩 집어주시고 잔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증조할머니 머리를 빗겨드리게 하거나 할아버지 먹을 갈아드리게 하거나 할머니 꽃밭 맨드라미 모가지 댕강 끊어 처마에 다는 일을 거들게 하기도 했는데요. 꼬마에게도 작은 일거리를 주어 바쁜 가을 집안 대소사를 거들게 한 것이지요. 모두 건강한 듯 또 한쪽 그늘지게 앓으며 한 분 한 분 저쪽으로 가시고 아버지마저 갑작스레 떠나보내고 엄마는 한순간 반쪽이 되더니 몇 년 뒤 여름날 쿵, 쓰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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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통증도 제풀에 지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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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대장암 진단을 받고 딱 100일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돌아가시기 열흘 전쯤 엄마는 무조건 집으로 가자고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졸랐는데요. 바삭 바삭 타들어가는 마른 혀로 어금니를 깨물며 간신히 외쳤습니다. 제발 좀 집으로 데려가 달라고. 그렇게 애원하며 돌아간 집 대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마당 한쪽 맨드라미 붉디붉게 고개 빼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흩어진 친지들과 자식들을 꾸역꾸역 불러 모아 저세상으로 가시던 날은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장례차를 따라가며 곡을 하던 10월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왜 그리도 무심했는지, 왜 그리도 자신을 돌볼 새가 없었는지요. 밭에 덩그러니 남겨진 들깨며 콩이며 추수를 못해 큰일이라고 마지막까지 걱정을 하며 눈물지었습니다. 어쩌면 엄마는 통증을 평생 끌어안고 살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집안에 인삼 내음과 술내가 떨어지지 않았고 삼장 일꾼들 밥해내느라 광목 앞치마 마를 날 없었는데요. 그러면서도 엄마는 자식 앞에서 결코 어둡지 않았습니다. 인삼밭 차양처럼 그늘을 늘이고 가을볕처럼 온힘을 다해 식구들 비춰주느라 정작 자신은 스스로 들여다볼 새가 없었던 게지요. 생각해보면 세상 모든 엄마는 형체도 없이 참으로 큰 이름입니다.
시절이 그리 포시랍지 않지만 가을 들녘은 여전히 풍요롭습니다. 벼 베기가 시작된 한쪽 시름 깊은 콤바인 소리에 일하는 사람들 손길 또한 분주합니다. 모든 생명에게 생명을 완성시켜 주는 힘으로 이 계절은 존재합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따뜻한 빛과 더 절실한 바람으로 양식을 갈무리하는 시간입니다. 사람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최선을 다해 끌어안는 땅, 삶이 비록 썰렁한 잡초일지라도 넉넉하게 품어주는 가을 들녘은 그래서 장엄합니다.
산그늘이 들녘에 길게 드리워지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순영 언니가 바리바리 싸준 묵직한 포대를 푸니 부엌이 꽉 찹니다. 무청은 데치고 무는 잘 씻어 깍두기를 담갔습니다. 통통하게 약이 오른 고추도 간장과 식초, 매실액을 달여 지를 담갔습니다. 호박은 썰어 채반에 널어 말리기로 하고요.
하루가 후딱 지나갔지만 마음 한 자락 오래 머물던 물기가 바람과 햇살에 빠져나가 가벼워졌습니다. 밤늦게야 한숨 돌리고 순영 언니네 앞마당에서 데려온 국화 한 가지 탁자에 꽂아놓으니 은은한 향내가 피어납니다. 꽃향기 따라 번져오는 그리운 사람, 무엇보다 친정엄마 같은 순영 언니의 맘이 고맙고 함께 손잡은 ‘느티나무시’ 도반들이 고맙고 오대 들이 고맙고 가을볕이 고맙습니다.
겨울이 오고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다시 가을이 와도 내 생애 가장 뜨거운 그리움 한 권, 그렇게 고요하고 위대한 가을볕은 엄마입니다. 오늘 밤은 그 어느 날의 엄마가 꿈에 오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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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꽃이슬 싸하니 젖어 달빛으로 목 축이는 첫새벽
어머니는 담장에 엎드린 황금호박 거두시며 술에 취한 앞산보고 어서 깨라 합니다.
마당 한 가운데 한 줌 햇살 더 쬐일까 통통 여문 이삭들 큰 애들 작은 애들 한 되 두 되 마음 되박질
빳빳하게 풀 먹인 광목 앞치마 눈이 부시도록 어머니는 온 종일 뜨겁게 서성거리고 잠이 덜 깬 앞산은 아직도 붉기만한데
어머니 골 깊은 기침소리는 마당에 지쳐 누운 달이 됩니다.
황구하, 「어느 날」 전문 |
- 글쓴이 : 황구하
-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다. 영남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2004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 『물에 뜬 달』이 있으며 현재 반년간지 『시에티카』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