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컬처라인_마을이 있는 풍경]용문정을 찾아서
- 권기남(수필가)
용문정을 찾아서
▲ 학록정사에서 바라본 금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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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운(山雲)마을 I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산운1리
산운마을은 의성에서 대감마을로 불리는 전통반촌으로, 자연경관이 수려한 영천이씨(永川李氏) 집성촌이다. 마을은 수많은 전설을 간직한 금성산(金城山)을 뒤에, 비봉산(飛鳳山)을 옆에 두고 나지막한 구릉과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 이름은 신라시대 불교가 융성할 때에 수정계곡(水淨溪谷) 아래 산과 구름이 조화를 이룬 상서로운 기운이 일어 산운(山雲)이라 하였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마을의 역사는 조선 명종때 영천이씨가 처음 입향하였고, 그 입향조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1531-1609)선생이다. 이후 이 마을에서는 이민성(李民宬:1570-1629)참의, 이민환(李民奐:1573-1649)참판, 이희발(李羲發:1768-1850)판서, 한일합방시 애국지사로 건국 공훈을 세운 이태직(李泰稙:1878-1913) 등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문화재로는 중요민속자료 제237호로 지정된 소우당(素宇堂)을 비롯하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2호로 지정된 학록정사(鶴麓精舍),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74호로 지정된 운곡당(雲谷堂) 및 제375호로 지정된 점우당(漸宇堂) 등 40여동의 전통고가옥이 유존하고, 금성산과 비봉산이 만나는 절경 계곡에는 의상조사가 창건한 유서깊은 고찰 수정사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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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문정 앞 오름길 |
산운마을의 나그네가 되어
산운마을을 지키는 안내표지 글이다. 이 내용은 누구나 다 아는 의성 산운마을의 역사이다. 나는 오늘 이 문화재적인 가치로서의 산운마을이 아니라 그 마을을 지키고 다듬어 오늘의 산운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 나섰다.
점심때를 넘긴 초여름 햇살이 산운마을 돌담 그림자의 키를 한창 키우고 있을 즈음 호젓한 고샅길이 나그네를 맞이한다. 생태공원을 지나서 마을 초입에 있는 학록정사를 지나 소우당의 별당 뜰에서 다리쉼을 하고 운곡당 마당에서 금성산을 만난다.
오늘의 이야기는 운곡당에서 시작된다.
큰 산은 큰 나무를 품는다.
큰 나무는 넓은 그늘로서 여러 사람을 품는다.
그 사람은 세상을 품는다.
운곡당(雲谷堂)은 큰 산이었다.
그 산발치에서 용문정(龍門亭)이 빛나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세상을 밝힌다. 그 밝은 곳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벚꽃이 진 자리에 환생한 듯 민들레가 노란하품을 하면서 자목련의 우아한 침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곳, 용문정(龍門亭)은 사람의 기운으로서 터를 닦고, 마음으로서 세상을 밝히는 곳이었다. 용문정은 가장 현대적 선비의 삶을 조명해내는 이 시대의 양반가의 모델하우스이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으면서 화려함과 소박함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지키며 기품 넘치고 격조 있는 선비의 삶을 잘 나타내고 있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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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곡 이희발 선생 하사도상
▲ 운곡 이희발 선생 교지 |
용문예술촌에 들다
원래 용문정의 원류는 운곡당에서 비롯되었다. 산운마을 운곡당은 현재 용문정을 지키고 있는 평해(平海) 이인길(李寅吉) 선생의 6대조이신 운곡(雲谷)이희발(李羲發)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산운마을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운곡당의 후원은 금성산이 들어와 안기듯 뛰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산운마을 안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운곡선생께서 영월부사로 재직 중이던 1800년대 초기에 건립된 건물로서 소우당(素于堂) 우측에 자리 잡고 있다. 후손인 점우(漸于)이홍(李鴻)선생이 100년 후에 건립한 점우당과도 이웃해서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산운마을 1km정도 떨어진 금성산 자락에 운곡선생이 학문을 닦던 용문정이 있다. 50년 전 당주(堂主)인 평해(平海) 이인길(李寅吉) 선생은 6남매의 넷째로 태어나 부친의 엄명으로 운곡당과 용문정의 지킴이가 되어 향리(鄕里) 산운에 터를 잡았다. 경동고를 나와 서울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다른 형제들의 장래와 학업에 혹여 흠이 가지 않게 스스로 낙향을 선택했다고 한다. 팔순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선한 눈매에 부드러운 인품이 묻어나는 용모가 친근하면서도 좀 어려운 분이었다.
자칭 "귀촌 1세대의 삶을 개척했노라."면서 당신의 희생이라면 희생일 수도 있는 삶이 절대 후회스럽다거나 부친을 원망해본 적이 없었다는 말씀이 단호했다. 이게 양반의식의 한 단면인가 싶기도 했다. 모든 게 경쟁이고 제 몫 챙기기에 급급한 현대 사회 속에서 이곳은 너무 외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용문정은 원래 지금의 자리보다 훨씬 위쪽의 금성산 용가매골에 있었는데 평해(平海) 옹의 조부님이신 이홍 어르신께서 낙향 후 1924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왔다고 한다.
입구의 유초각(惟肖閣)은 운곡 이희발(1768-1859) 선생의 하사도상(下賜圖像)을 봉안하기 위해 건립한 영각(影閣)이다. 영정과 형조판서를 제수 받은 교지가 보관되어 있는 곳이었다. 교지는 붉은 비단에 금빛으로 쓴 글씨가 아주 특이했다. 현판 글씨는 조부이신 이홍선생이 직접 쓴 필체라고 한다. 이홍선생 역시 뛰어난 필체를 자랑하는 선비로서 추사선생의 수제자였던 오경석(위창 오세창의 부친)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고 한다. 이곳 유초각은 물론 용문정과 수락당 외에도 거의 모든 현판과 주련글씨가 이홍 선생의 친필이라고 한다.
▲ 유초각
▲ 용문정 원경
오늘의 주인공인 이인직 선생의 생활가옥은 용문정과 유초각의 중간 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 나지막한 공간이다. 선생의 택호인 울진 평해(平海) 황씨(黃氏) 해월당(海月堂)의 셋째 따님(黃花子)과 혼인하여 내외분이 함께 일구어 오신 용문정은 문자 그대로 용문예술촌이었다.
집과 터와 주인내외분의 궁합으로 버무려진 예술작품이며 그 분들의 삶 자체가 예술이었다. 천 평도 넘음직한 터에 잔디로 바닥을 입히고 그 위에 갖가지 수목과 꽃들로 수를 놓은 수목원을 방불케 한다. 정원사 못지않은 주인의 내공이 엿보이는 공간이다.
아주 오래된 나이를 둥치로 보여주는 백일홍이며, 벚꽃 두릅나무 호두나무 향나무 자목련 회양목 철쭉 연산홍 등으로 치장을 한 정원은 작은 들꽃들이 매무새를 완성해 주고 있었다. 특히나 용문정의 앞 뒤 뜰에 가득한 할미꽃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어디를 가도 쉽게 만나는 할미꽃이지만 용문정의 할미꽃은 반가의 안방마님 같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늘 가난해 보이고 서러워 보이는 할미꽃의 변신은 용문정의 현판이 새로운 내명부의 작위를 붙여 준 모양이다. 거기에 벚꽃이 피는 봄밤의 달빛과 너럭바위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가장 아름다운 용문정의 비경을 감추고 있다고 일행이 귀띔을 해 주었다.
▲ 용문정 전경
버려진 철도 침목을 이용해서 나지막하게 지은 집은 소박한 건축양식으로 용문정(龍門亭)과 유초각(惟肖閣)을 받들어 드러나지 않은 짜임새로 불편하지 않게 지은 두 분의 생활가옥으로서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가운데 조붓하게 자연석을 깔아서 통로를 낸 두 분의 집은 안채와 사랑채로 분리를 해서 건축물의 겸손함이 주인 내외의 품성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었다.
평해(平海)선생의 안내로 찾아든 두 분의 집에 들어서면서 소박함 속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무욕의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다.
일부러 새 것을 찾지 않아도 재활용된 한옥 문이며 손때 묻은 가구들이 진한 사람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사랑채에는 평해(平海)선생이 평소 취미삼아 조각해 놓은 서예작품과 목각이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목각은 주로 새를 깎은 것인데 직접 심어서 기른 향나무와 호두나무를 이용해서 크고 작은 새들을 조각해서 모아 놓은 게 전시장이 무색할 정도로 많은 숫자였다. 내방객에게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한 쌍씩 선물로 주신다고 했다. 우리 일행도 물론 한 쌍씩 마음 놓고 골라서 선물로 가지라고 하신다.
50년을 두고 깎아온 목각은 어느새 평해 어르신을 장인의 경지에 이르게 한 것 같았다. 그야말로 새털같이 많은 날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시간에 홈을 판 흔적이 고스란히 모여 있었다. 여기 있는 이 수많은 새들과 선물로 준 새들을 합하면 그 조각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가늠이 불가능한 숫자다. 선생이 조각한 새들이 다 날개를 펴면 용문정의 하늘을 모두 덮고도 남을 것 같다는 상상만 할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따라 용문정의 새소리가 유난하다.
두 분의 생활공간을 나오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결코 사람이 사는 데는 많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구나 하지만 그 안에서는 많은 진리와 가르침이 있을 수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고 가져도 가져도 늘 가난한 이 불쌍한 중생을 어이할꼬?
양반의 으뜸덕목은 봉제사 접빈객
이 물색없는 내방객의 발길은 어느새 용문정 돌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고작 막걸리 몇 병을 들고 찾아간 불청객을 참 무안하게 하는 주안상과 손님들이 먼저 대청마루를 차지하고 있었다. 안주인 황여사님이 그림자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오르내리면서 차려낸 주안상에 반가의 안살림을 반추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들머리에 있던 두릅밭에서 채취한 두릅을 주재료로 한 정갈한 상차림이 종갓집 안주인의 부덕(婦德)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살짝 데친 두릅에다가 들기름과 통깨로 살짝 밑간을 한 두릅회와 소고기와 두릅으로 꼬지를 한 두릅소고기 산적, 그리고 마른 안주 등이 먼저 오신 손님들과 기다리고 있었다.
▲ 새 목각 작품
평소 평해 어르신과 교분이 두터운 여러 지인들께서 이미 자리를 하고 계셨다. 들어서면서 “맞아! 이 모습이 원래 용문정의 본래 모습이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봉제사 접빈객’을 삶의 바탕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본모습을 오늘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보고 가려는 마음이 저만치 앞장서서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불청객이면 어떠랴! 아낙네가 용문정에 올라가 술상을 마주하는 일이 좀 민망하고 그림이 마땅찮기는 하지만 오십 중반 아줌마의 뻔뻔함으로 밀어 붙여 보기로 작정을 했다. 그 사이에 끼어들어 앉아 있으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선비들의 속내를 흘낏 흘낏 들여다보는 재미 또한 수월하지 않을 것 같아서다.
늘 사랑에는 글 읽는 소리가 문지방을 넘고, 손님들이 붐비고, 아낙네들의 음식솜씨가 가문마다 입소문을 타고 퍼지고, 많은 제사와 제관들로 분주한 곳이 내가 상상하는 종갓집의 풍경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런 곳을 제대로 찾은 듯해서 어르신들이 하시는 말씀을 더 귀담아 듣기로 했다.
한 가문에 불천위 제사를 한 분만 모셔도 영광인데 이곳 산운마을에는 네 분의 불천위를 봉행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평해 어르신의 6대조 되시는 운곡 이 희발 선생은 초계문신으로서 영조와 정조, 헌종 철종 등 네 임금을 모시면서 형조판서를 지낸 분이라며 후손으로서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접빈객(좌), 상차림(우)
오늘을 살아가는 진정한 양반의 길을 찾다
그리고 평해 어르신은 조상의 유업을 받들어 오늘의 용문정을 지킬 수 있게 해 준 선친의 뜻에 늘 감사한 마음이라고 한다. 옛말에 '조상덕'이란 말이 있다. 후손이 조상들의 업적을 자부심으로 안고 살기 위해선 조상들의 후광이 필요하듯이 이미 명계의 강을 건넌 우리의 조상들도 후손들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평해 어르신처럼 평생 조상을 받들고 그 업적을 빛나게 하는 일에 충심을 다하는 후손이 있다면 그 조상들은 얼마나 더 존경받고 오래 오래 후대 사람들에게 기억될까를 생각하면 죽은 조상보다 살아 있는 자손들의 노력이 더 크게 작용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과일나무 큰 가지에 굵은 과일이 열리고 왕대밭에 왕대가 난다지 않던가? 우리가 먼 조상을 만날 수는 없지만 이렇게 보이지 않는 갖가지 덕목을 주고받는 아름다운 이어달리기가 바로 우리 삶이 아닌가 싶어서다.
어느덧 술자리가 무르익으면서 자투리로 한 뼘 정도 남은 해가 용문정 처마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아직 보고 들어야 할 이야기도 많은데 시간이 야속하다. 마침 술기운을 받은 당주 어른의 풍류가 지금부터 시작이다. 고즈넉한 싯구절과 노래와 어깨춤으로 내방객을 즐겁게 해 주는 평해 어르신의 양반가의 멋을 제대로 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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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태수, 용문정, 47.0x28.0cm, 2010. 한지에 수묵담채 |
일만하지도 않고 책만 죽어라 파지도 않고 그렇다고 내외가 엄격해서 안채와 사랑채의 경계선도 그리 크지 않은 이 시대에 맞는 양반가의 본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용문정은 멋과 풍류가 공존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양반가의 실체이다. 성인도 시속을 따르라는 옛말처럼 오늘날 용문정 평해 선생은 가장 현실적이고 기품 있는 양반의 자세로 살아가는 분이다. 평소 이런 분을 꼭 만나 뵙고 이런 곳을 꼭 찾아보고 싶었던 소망을 오늘에야 이룬 것 같아서 목젖까지 따듯한 물이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아직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도 많이 남았고 안주인 황여사님의 고운 자태도 카메라에 담아야 하는데 사모님은 그림자처럼 정자를 오르내리면서 손사래로 고요하게 대답을 하신다.
아마 이쯤에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내년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대감을 졸라 달밤의 벚꽃 지는 용문정의 정경을 너럭바위 위에서 실컷 보리라 다짐하면서 해동갑으로 유초각의 담장을 돌아 내려왔다.
- 글쓴이 : 컬처라인
- 경상북도 북부권 11개 시군의 문화예술 관련 정보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