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백소애_쑤세미의 골방에서 만화읽기]권현수 <하늘색 종이비행기>
- 쑤세미
풋풋한 첫사랑의 기억, 하이틴 순정만화의 추억
권현수 <하늘색 종이비행기>
하늘색 종이비행기 3권 완결/ 권현수 글,그림/ 도서출판 대화기획/ 1995년 개정판
그해 안동에 물난리가 났었다. 초등학생인 나는 단골 만화방에서 이현세, 허영만, 이상무, 이재학, 고행석, 김영숙, 황미나 작가의 만화책을 빌려보곤 했다. 낱권을 빌려가고 제때 반납하지 않는 아이들과 달리 우리 5남매 모두 만화 마니아였던 터라 만화방 주인에게 우리 남매들의 신용은 남달랐다. 시리즈물 전체를 빌려가면 그에 비례해 빌려간 양 만큼의 만화책을 서비스로 받곤 했다. 반납일도 탄력적이었지만 항상 제때 반납해 만화방 주인을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그해 여름, 갑자기 불어난 물 때문에 열어놓은 하수구로 어느 집 아이가 떠내려갔다는 풍문을 듣고도 나는 만화책을 반납하러 갔었다. 기실 만화책을 반납하기 위한 분명한 목적이 있었으나 만화방과 연결된 기와집 마당에서 흘러나오던 낭랑한 피아노 소리 때문임을 부정하진 않겠다.
만화방 집 아들은 피아노를 곧잘 쳤다. 바이엘인지 체르니인지 기억나진 않아도 주인아줌마가 집으로 연결된 쪽문을 열 때마다 피아노 소리는 들려왔다. 나는 문이 열리면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에 굳이 등을 기대고 앉아 만화책을 읽었다. 가끔 마루 끝에 선 그 애가 내 쪽을 본다는 것쯤은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이상 아무 일도 어떤 진전도 없었지만 아직도 어린 시절의 그 만화 같은 상황과 잔상이 이렇게도 남아있는 것을 보면 내겐 추억 속 앨범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풋풋한 기억임에 틀림이 없다.
로우틴Lowteen을 넘어 하이틴highteen이 되자 만화는 더욱 내 일상에 파고들었다. 만화 속 남자주인공에 매료된 터라 일반 남학생들은 한없이 찌질해보였다. 옆집에 만화 속 멋진 남자가 이사 오길 바랬고, 냉정하고 차가운 성격의 남자와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씨의 남자에게 동시에 사랑받는 삼각관계의 여주인공이 되길 바랬다. 학교의 반항아가 나로 인해 개과천선하고 다른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터프한 남주인공이 내 말만은 순종적으로 듣게 된다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상상을 하곤 했다. 스펙타클한 시절도 아니어서 기껏해야 이런 상상만 하던 그 시절을 풋풋하게 떠올리게 하는 만화가 바로 권현수의 <하늘색 종이비행기>다. 자극적이지 않고 다소 심심한 것 같은 이 만화책은 첫사랑, 종이비행기, 하늘, 친구, 우정 따위의 감수성을 끄집어내는 힘이 있다.
<하늘색 종이비행기>는 그 시절 여학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그런 사랑 이야기를 담아낸 옴니버스 만화다. 중학교 졸업 5년 후 성인이 되면 꼭 가보고 싶었던 동경의 장소 카페 에서 서로의 사랑이야기를 나누기로 한 세 주인공 유미, 수영, 혜란. 어린 시절의 단순한 감상에서 한 약속이라지만 세 명은 그리하여 중학교 졸업 후 5년 동안 서로의 생활에 집중하며 남자친구를 만들기로 하고 그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한다. 약속의 날 카페에 모인 세 명의 친구는 각자가 겪은 첫사랑을 통해 동경해 마지않았던 사랑이 현실에서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들려준다.(한창 때 친한 친구들이 5년간 소식도 모르고 만나지도 않는다는 맹점이 있지만 애교 있게 넘어가 줄 수 있다.)
보이시한 매력의 수영은 학창시절부터 선머슴아로 불린 인물. 고3 때 만난 언니의 남자친구 상우를 보고 첫눈에 반하고 그와 함께 꿈을 이루기로 한 수영의 사랑이야기인 <꿈 만들기>. 깍쟁이 혜란이 무사히 입시를 치루고 들어간 미대에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괴짜 최정호의 여자친구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린 두 번째 이야기 <캔버스 가득히 너의 모습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쌍둥이 형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반항아 영하를 좋아하는 유미의 애틋한 마음을 담은 세 번째 이야기 <하늘색 종이비행기>. 시종일관 잔잔한 해피엔딩으로 흘러가던 이야기는 마지막에 큰 슬픔의 반전을 보여준다. 전해지지 못한 마음과 먼 훗날 알게 된 서로의 마음을 담은 내용으로 소녀다운 감성을 보여준다.
만화가 권현수는 그 자신이 여고생 때 잡지 《여학생》을 통해 등단한다. 《여학생》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끌던 잡지였다. 언니가 사다놓은 잡지에는 국내외 연예인들의 인기순위가 있곤 했는데 얼핏 기억나는 것은 남자가수는 1위가 조용필, 2위가 이용, 3위가 전영록이었다. 물론 이 인기순위는 독자들의 엽서로 판가름 나곤 했다. 외국 여자연예인들의 인기 순위도 재미있었는데 1위가 브룩 쉴즈 2위가 소피 마르소 3위가 피비 케이츠였던 걸로 기억난다. 이 잡지책에 연재된 것이 바로 권현수의 <러브 방정식>이다. 지금에야 보면 민폐덩어리인 여주인공이, 특유의 사랑스러움을 무기로 남자 주인공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삼각관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첫사랑의 열병을 앓고 자신의 진정한 사랑은 항상 옆에서 지켜주는 죽마고우였음을 깨닫게 되는 주인공 ‘희야’에 대한 이야기다.
권현수의 초창기 그림은 좀 더 부드럽고 곡선이 많았다. 1980년대 <하늘색 종이비행기> <노을빛 메시지>, <뮤직 에세이>, <너와 나의 비망록> 때 인기의 절정을 이루고 이후 1990년대로 넘어서면서 <나만의 프린스> 등을 거치며 인물이나 전체적인 그림이 평면화 된 느낌을 든다. 좀 더 세련된 그림체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특유의 서정적인 느낌이 안나서 많이 아쉬워했었다. 그래서일까 이후 예전만큼의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순정만화계에서 ‘건전한 하이틴’ ‘모범생 학원물’을 그리는 데는 아마 독보적인 인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제목도 여학생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예쁘고 아기자기한 것이 많은데 <여름 느낌>, <눈 밤의 러브발라드>, <수요일의 로맨스 서브웨이>, <지붕아래 소네트>, <내일도 맑음>, <반짝반짝 너의 별>, <그애의 실루엣> 등 지금 들어도 촌스럽지 않은 맑은 느낌의 제목들이 대부분이다.
<하늘색 종이비행기>는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 못한 영하가 유미에게 마음대신 날렸던 것이다. 유미는 사랑이 이루어져 현재진형중인 수영과 혜란에게 자신의 첫사랑도 결실을 맺었음을 고백하지만 사실은 그와 달랐다. 유미는 대입에 실패하고 그 여파로 힘든 1년의 재수기간을 보냈다. 영하의 소식을 알 길이 없는 유미는 카페에서 친구들과 행복한 수다를 떤 후 홀로 집으로 가다 자연스레 발걸음이 영하의 집으로 향하게 된다. 그곳에서 학창시절부터 자신만을 봐왔던 영하의 쌍둥이 형을 만나게 되고 유미는 그에게서 충격적인 영하의 근황을 듣게 된다. 집안의 말썽장이에 불과했던 자신의 진면목을 알아봐주고 응원해준 유미를 향해 영하가 유일하게 표현했던 마음은 하늘색 종이비행기였다. 영하는 재수를 거쳐 대입에 성공한 유미에게 그 마음을 전하려 했지만 그런 날은 결코 오지 못한다. 유미의 첫사랑은 영원히 이뤄지지 못한다. 대부분 사람들의 첫사랑이 그렇듯이 말이다.
청아한 ‘순정純情’만화를 읽는 봄밤, 까마득히 잊었던 첫사랑을 생각해본다.
- 글쓴이 : 백소애
- 강원도 태백 출생. 아이큐는 낮지만 머리가 좋다고 굳게 믿고 있음. 변덕이 심하고 우유부단하나 따뜻한 품성을 지니고 있다. 조카들에게 헌신적이며 인간성 또한 좋다.....고 믿고 있다. 학생 때 교무실에서 밀대자루로 바닥 밀면서 은밀히 훔쳐본 생활기록부에는 ‘예의 바르나 산만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한참을 갸우뚱 하다가 담임이 수학선생님이었기에 그냥 이해하기로 함. 다소 후진 취향을 지니고 있으나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고 쓸데없는 걱정과 호기심이 많음. 같은 계획을 몇 년째 하고 있으며 역시나 올해도 다이어트와 앞머리 기르기에 도전할 생각이며 과메기에 없어서는 안 될 다시마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 웹툰도 괜찮지만 만화책은 역시 종이책으로 보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아날로그 건어물녀. 좋아하는 것은 무한도전, 오뎅으로 만든 떡볶이, 삼겹살에 매실소주, 비오는 날, 생활의 달인,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괴짜가족 류의 저질유머. 비 오는 날 무한도전 틀어놓고 배 깔고 누워 만화책 보면서 빈둥거리며 사는 것이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