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효선_동해연안의 문화여행]울진읍 장날 이야기
• 남효선 2013-03-11

울진읍 장날 이야기
닷새마다 듣는 그리운 친정 소식
팔십 평생 드나들어도 친정 곳 사람 보면 손부터 '덥석'

 

 

말래서 왔다는 순례 할미 펼쳐놓은 도토리묵, 나생이 그대로 남아 있다 순례할미 쪼그리고 앉은 치마폭 가지런히 펼쳐진 나이롱 보푸재 겨울 해가 그림자를 깔고 누웠다. 계란 노른자만치로 노오랗다 도토리묵 한 양푼이, 잘 말린 씨래기 세 묶음, 차좁쌀 세되 마구 팔아 남은 돈 이 만원 이천 원짜리 국시 한 그릇 점심으로 말고 손주 놈 골덴바지 칠천 원 주고 애지중지 나이롱 보푸재에 말아 쥐었다. 설이 낼 모랜데, 이 태 전 집 나간 며눌아는 영 소식이 없다.   걸어서 세 시간 걸리는 울진읍장 드나든 지 올해로 예순 해, 시집와서 이 태 째 되던 해에 시어머니 뒤 세우고 드나들던 울진읍 장터 나락 거둬 설 대목 읍 장날이면 시어미 몰래 하얀 입쌀 두 됫박 팔아 맏아들 하얀 운동화도 신기고 지아비 봉초꾸러미도 챙겼다  살아갈수록 좋은 날은 안 생기고 닷새 장마다 낯익힌 어물전 끝냄이 할미 팔다 남은 물가자미 세 마리 건넨다. 순례할미, 말없이 물가자미 받아들고 나생이 한 웅큼 들이민다. 나이롱 보푸재에 계란만큼 남아있던 겨울 해는 저만치 삿갓봉 목재를 기웃거린다 손주 놈 골덴바지 말아 쥔 나이롱 보푸재, 순례할미 손등 검버섯 새로 한 줄 희멀건 힘줄, 숨가쁘다.   <남효선 졸시 「대목장」전문>

경북 울진 북면 두천리 ‘원당 말래’에 사는 순례 할머니는 60년 전, 열여덟 살 나던 해에 70리 바깥 갈면마을에서 말래로 시집왔습니다.

시집살이 6년 만에 시어머니와 함께 처음으로 ‘산나물 보따리’를 이고 40리 길을 걸어 울진읍장에 장보러 왔습니다.

 

 

 

 

 

 

 

 

 

잠시도 허리 펼 날 없는 산중마을 시집살이의 고된 일상을 잠시 벗어두고 읍내장터로 가는 길은 가마타고 시집오던 날처럼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습니다.

말래 마을 나무장사들이 겨울, 동이 트기 무섭게  장작을 지고 숨 가쁘게 내달아 죽변항에서 뱃사람들에게 장작더미를 넘기고, 국시 한 그릇 사 먹기 아까워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집으로 오다가, 아침 햇살 발갛게 앉아 있는 ‘잿만딩이’에서 자기도 모르게 깜박 잠들어 얼어 죽었다는 ‘눈물고개’도 숨 한 번 몰아쉬지 않고 가뿐하게 넘었습니다.

 

 

 

 

80 평생 닷새마다 드나든 읍내 장터지만, 순례할머니는 올 때마다 가슴 설렙니다.

시절이 워낙 빠르게 변해, 이 태 전에 시집 간 손녀딸이 목에다 걸어 준 핸드폰으로 친정 소식을 간간이 듣긴 해도 닷새마다 장터에서 친정 곳 사람들 만나는 일보다 더 정겨운 것은 없습니다.

탱자나무집 순이 시모가 노환으로 세상을 버렸다느니, 우물집 귀남이 할매가 아들 따라 서울 가서 살다가 요양원에 들어갔다느니 하는 서글픈 얘기들도 순례할머니는 친정 곳 소식이어서 슬픔보다는 정겨움이 앞섭니다.

낼 모레면 이월초하루, 영등입니다. 순례할매는 말래 산중에서 눈바람 헤치며 언 땅을 뚫고 고개를 내민 나생이 한 봉지, 읍내장터에서 만난 친정 곳 먼 조카뻘 되는 며느리 손 안에 꼭 쥐어주었습니다.  

글쓴이 : 남효선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안동대학교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공부하였다. 1989년 문학사상의 시 부문에서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하였다. 한국작가회의, 경북작가회의, 안동참꽃문학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둘게삼』이 있다. 현재 시민사회신문의 전국본부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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