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호루의 옛날 사진 

                  촉석루 전경                                         촉석루 현판                                 촉석루에서 바라본 풍경

 요즘은 안동에 대한 태그가 ‘도산서원’이나 ‘하회마을’이라고 하지만, 고려부터 조선 중반기까지는 ‘영호루’가 안동의 태그였다. 경상남도 진주를 생각하면 바로 ‘촉석루’가 떠오르고 밀양이란 지명이 ‘영남루’를 떠올리게 하듯, ‘영호루’는 안동을 떠오르게 하는 안동의 태그였다. 그러나 안동의 태그인 ‘영호루’는 안동을 간략하게 나타내는 표찰의 역할을 넘어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상징이자 이미지 역할을 했다. 한국사에서 유일하게 지역민과 왕이 직접 만나 국난극복의 모멘텀을 만들어냈던 특q별한 사건이 바로 ‘영호루’에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영호루’는 상당한 기간 동안 안동의 아이콘이었다.

  영호루가 조선 중반기까지 안동의 아이콘 역할을 한 까닭은 무엇일까? 사림의 종장이라 불렸던 김종직(金宗直)은 전국 방방곡곡의 정보를 취합하여 조선사회를 하나의 인문지리적 유기체로 종합하는『동국여지승람』의 편집을 주도하였다. 그의 숨은 편집 의도는 이 책을 통해 조선사회를 이끌어갈 인문학적 기틀을 찾는 것이었다. 김종직의 이러한 학문적 태도는 그의 삶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조선 초반기는 고려의 유제를 극복하는 조선의 건국과정과 조선 지배체제의 안정화 방법에 대한 갈등을 겪으면서 조선건국의 이념인 숭유억불의 명분은 점차 퇴색되어갔다.

                                     영남루                                                                           영남루 전경

  권력에서 한발 비켜나있던 사림파 지식인들은 기득권 훈구세력을 인문학적 비전도, 정의도 없이 권력다툼만 일삼는 무리로 보았다. 학문적 소양과 도덕적 양식으로 무장한 조선사림의 등장은 기존의 조선 지배체제의 근간을 뿌리째 흔드는 정치개혁이었다. 이후 조선사회는 소위 사림정치로 전환하게 된다. 이 조선사회의 커다란 변화를 이끈 사림의 종장이 바로 김종직이었다. 조선 중기 이후 안동이 지방 사림의 근거지가 될 것임을 예견이라도 하듯, 김종직은 ‘영호루’가 안동에 남긴 역사적 의미를 특별히 주목하면서『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이렇게 말한다. 

                                    영호루 현판                                                                     영호루의 설경 

 김종직의 이 평가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경관으로서는 영호루가 촉석루나 영남루에 미치지 못하지만 공민왕이 친히 써준 현판 글씨 때문에 더 낫다는 말일까? 사실 김종직은 왕의 현판 글씨 때문에 영호루에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부가시킨 것이 아니었다. 성리학적 계보에서 중요한 인물이고 그가 마음으로 따르던 목은 이색이 남긴 기록을 주의 깊게 요약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색이 남긴 기록은 어떨까? 영호루에 대한 기록을 남긴 사람은 김종직 이전에 고려의 명문장가 백문보와 뛰어난 학자이자 문필가인 목은 이색이 있다. 이색은 공민왕이 안동에 있을 때 시종한 신하였다. 이색은 환도한 다음에는 안동의 일을 까맣게 잊었지만 자신보다 훨씬 바쁜 왕은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도 그때의 일을 잊지 않고 영호루 현판을 직접 써서 하사한 일에 대해 이색은 스스로를 부끄러이 여기면서 이렇게 말한다.

 

높은 저 은하수가 밝게 하늘에 돌고 있다는 시경(詩經)의 말과 같이 왕의 글씨는 그러한 성인의 기상을 품고 있어 자획이 한결같이 곧고 바르다. 붓이 손에서 움직이니 광채가 하늘로부터 이른다. 또 왕 스스로 말하기를 ‘이 안동 고을은 우리가 다시 일어난 곳’이라 하며〈映湖樓〉큰 글씨 세 자를 써서 하사하니, 이것은 옛날 춘추시대에 관중이 제나라 환공에게거(莒) 땅에 있을 때의 어려움을 잊지 말라는 간언을 받아들여 군신이 서로 합심하여 나라를 일으킨 뜻과 같다.

 

  김종직이 주목한 것은 공민왕의 글씨보다는 이색이 남긴 글 속에 담겨있던 ‘영호루’라는 글씨를 써서 하사할 때의 공민왕의 통치정신이었다. ‘이 안동고을에서 우리가 다시 일어났다’는 자기충전의 다짐과 힘든 때를 잊지 말자는 교훈의 되새김이었다. 이런 공민왕의 발언에는 안동생활에 대한 좋은 추억이 긴 여운으로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국난극복의 막중한 책임에 시달리던 국왕이 안일한 마음으로 어떻게 영호루 경관에 빠질 수 있겠는가? 만약 백성이 겪는 고초를  잊고 잠시나마 경관의 흥취에 빠진다면 국왕의 자격을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영호루에 투영된 공민왕의 강한 기억의 비밀이 바로 이점에 있다. 짐작컨대 안동에 대한 ‘좋은 추억’과 ‘교훈적 자기다짐’은 위기의 국면에서 보여준 안동인의 침착함과 당당함, 그리고 순박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친근한 응대였다고 보인다.

 

洛東上流                                                                           嶺左名樓

 

  백문보(白文寶)의 기록을 보면, 이런 짐작이 단순한 추론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백문보는『금방기(金牓記)』라는 자신의 책에서 홍건적의 침략으로 공민왕이 안동에 들어오게 되는 정황과 공민왕을 맞이하는 안동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산은 높고 물은 맑으며 풍속은 예스럽고 백성들은 순박하다. 장군과 원수의 깃발은 엇갈려 덮여있고 옷차림은 서로 바라볼 만하다. 행궁은 말끔히 정돈하여 임금의 행차를 인도하면서 태연하고 침착하여 여유가 있었다. 임금이 마음으로 기뻐하여 여기에 거가(車駕)를 멈추고 장수를 명하여 적을 치게 하였다.

 

  개경에서 출발하여 청주와 충주를 거쳐 안동에 이르기까지 백성은 혼비백산하고 관료들은 지리멸렬하여 일패도지(一敗塗地)로 쫓겨 오다가, 죽령을 넘어 안동에 오자 마음을 놓고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백성들의 마음가짐과 행동거지가 오히려 왕을 안심시켜 국난을 극복할 수 있는 여유를 찾게 한 것이다. 백성이 만들어준 여유가 공민왕을 영호루로 나아가게 하여 안동의 경관을 바라볼 수 있게 한 것이다. 백성의 마음을 얻어 기쁜 왕이 어찌 그 백성들이 사는 땅을  아름답게 보지 않겠는가? 왕이 국난의 위기를 당한 후에 비로소 백성의 마음을 알 수 있었으니 어쩌면 전화위복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공민왕에 대한 안동사람들의 마음은 공민왕이 사랑하던 이국출신의 공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노국공주에 대한 안동사람들의 애틋한 응대는 지금도 ‘놋다리밟기’ 놀이로 전승되고 있다. 이것은 우연히 왕후를 모시게 된 지역민들의 충정의 스토리가 아니라, 위기국면에서 한 지역의 백성이 일궈낸 국난극복의 상징적 드라마다. 공민왕의 안동 피난은 공민왕의 통치이념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와 조선을 막론하고 국난을 맞은 국왕에게는 훌륭한 귀감이 되었다. 그 점을 공민왕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세월이 흐른 뒤에도 안동을 잊지 않고 손수 글씨를 써서 하사한 것은 어려움을 통해 진심을 보여주는 백성을 만났다는 기쁨과 교훈을 오래 간직하려는 최고통치자의 비망록(備忘錄)이다.

 

영호루 누각 아래에서 본 풍경

 

 ‘영호루’라는 글씨에는 백성의 진심을 얻어 통치철학을 재발견한 공민왕의 의지가 새겨있고 아름다운 추억이 서려있다. 또한 영호루라는 이름에는 백문보와 이색의 역사적 이해가 녹아있다. 그리고 조선의 통치철학을 왕도정치로 일신하려했던 김종직에게는 안동의 영호루가 임금과 백성이 진정하게 소통하는 훌륭한 사례이자 물증이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영호루’는 공간으로서 정자의 의미를 넘어, 국가적 위난 속에서 백성과 왕이 진심으로 만났던 소통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그러한 의미를 가진 사건이 이곳 안동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영호루는 안동의 아이콘이 된 것이다. 어쩌면 김종직은 공민왕 때의 사건이 발생한 안동이 순박하고 침착한 집단적 선의지가 갈무리되어 있는 곳이므로, 영호루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장차 ‘선비들의 숲(사림)’이 되리라고 예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주세붕의 제영시

 

 ‘영호루(映湖樓)’가 단순한 정자의 의미에서 벗어나 안동을 대표하는 아이콘의 역할을 해왔다고 해도 정자의 성격을 띠는 것은 분명하다. 영호루에 걸려 있는 수많은 시판(詩板)은 경관조망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일반적 의미의 정자들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호루의 제영시(題詠詩)는 일반 정자의 제영시와 다른 정형을 보여준다. 그것은 영호루가 소통정치의 특별한 역사적 사건(공민왕의 현판)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권사복(權思復)은 공민왕이 하사한〈映湖樓〉현판을 걸기 위해 영호루 모습을 일신한 다음 당시 뛰어난 문장가였던 백문보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이때 백문보는 기문을 써주면서 영호루의 연혁 정도는 자기가 감당할 수 있지만, 훗날 누군가에 의해 왕발(王勃)의〈등왕각서(滕王閣序〉와 같은 명문이 영호루에도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백문보의 기문에는 이미〈등왕각서〉와 같은 정형과 품격이 보인다. 주변경관의 자연지형이 하늘 기운과 땅 기운의 조화로 이루어지며, 바로 그런 곳에 영준한 인물이 태어나고 순박한 인심이 만들어진다는 점을 웅혼한 필치로 묘사한 것이〈등왕각서〉의 첫 부분을 영호루 주변경관에 그대로 옮긴 듯하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곳의 상응하는 천지(天地)의 기운이 마침내 이곳 백성(땅기운)이 하늘의 용(龍) 기운(공민왕)과 만나는 결과를 만들어 한반도 역사에서 소통정치의 특별한 사례가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백문보의 글을 보자.

 

영호루는 호수를 굽어보고 있어 기둥과 서까래 대마루와 들보가 물속에 거꾸로 비쳐 그림자가 어지럽게 일렁인다. 무협(巫峽; 임청각 인근 양쪽 계곡)이 그 왼쪽에 놓여있고 성산(城山)이 그 오른쪽에 버티고 있다. 큰 강은 옷깃과 띠처럼 둘러있고 물은 돌아서 호수를 만들었다. 무릇 물의 근원과 지류가 머리를 간방(艮方)에 두고 꼬리를 곤방(坤方)에 둔 것으로서 하늘에 있는 것은 은하수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복주(福州)의 글 잘하는 선비와 걸출한 인재가 가끔 이 정기를 타고 그 사이에 탄생한다. 대체로 해와 달이 형상을 드리우고 은하가 문채를 이루는 것은 하늘의 아름다운 현상이다. 이 누(樓)가 은하수처럼 ‘근원을 간방에 두고 꼬리를 곤방에 둔 강물을’ 누르고 섰으니, 하늘의 문채와 같은〈임금의 현판글씨를 얻어〉금벽(金碧)의 단청으로 새겨서 오는 세상에 밝게 빛나게 함은 마땅한 일이다. 임금의 덕의 밝은빛이 이곳에 강림하여 몇 천 년을 두고 우러러보며 흠모하게 되었으니, 나라 일의 기틀에 불행함이 있었던 것이 도리어 누(樓)를 위하여 다행이다.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이원의 제영시                                                                김극일의 제영시   

 

 김안국의 제영시                                                                퇴계 선생의 제영시

 

 백문보의 기문은 위에서 보듯이〈등왕각서〉의 전형을 그대로 따르는 듯하다. 그 전형성은 대체로 경관을 묘사하면서 삶의 애환과 각성으로 이어지는 서정표현이 많다는 점이다. 그러나 영호루의 제영시는 이런 전형성을 가진 시(詩) 부류와, 공민왕 현판이 가진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내용, 두 부류로 대별될 수 있다. 그 두 가지를 함께 노래하는 것도 있지만 결국 두 부류에 귀속된다고 할 수 있다. 정도전(鄭道傳)·이원(李原)·김종직·조순(趙舜)·김극일(金克一)의 시가 안동의 역사적 사건을 되새기는 부류에 해당한다면, 우탁(禹倬)·권근(權近)·조효문(曺孝門)·김안국(金安國)·이퇴계의 시는 경관의 아름다움과 삶의 애환과 각성을 노래한 것이다.

 

 영호루는 갑술년(1934년)의 홍수로 사라졌다. 현재의 영호루는 반대편 위치에 시멘트 건물로 중건되었으나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워서인지 안동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나마 밤에 강변을 지나는 시민들에게 미미하나마 조명경관 정도의 역할은 해왔는데, 최근에 신설된 강변 문화시설의 강한 불빛으로 말미암아 그 존재성조차 희미해졌다. 안동에 대한 역사기록으로서 강조되었던 영호루가 이렇게 맥없이 사라져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영호루는 안동의 아이콘이었을 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의 맥락에서도 아주 특별한 역사적 사건을 내장한 메모리 카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