陰翳礼讃-草むら ⓒ혼다 히사시

제주의 ‘생각하는 정원(思索之苑)’

2008년 1월 제주도를 찾았다. 제주에 사는 시인 변종태(邊鍾泰)씨가 편집해서 발행하고 있는 시 잡지「다층(多層)」에 “시의 숲을 걷는 일본의 시와 시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맡게 되어 제주를 한 번 방문하라는 초대를 받은 것이다. 그때 변종태 시인이 소개해준 곳이 생각의 정원 ‘思索之苑’이며, 이 정원의 주인은 성범영(成範永)씨란 분이었다. 정원에는 성범영씨의 다음과 같은 설명문이 붙어있었다.

분재는 자연을 모방하거나 축소하여 놓인 것은 아닙니다. 자연을 소재로 하여 자연의 순리에 따라 키운 것입니다. 인간의 미적 감각과 개성을 발휘하여 본래의 자연보다 한층 더  아름다운 자연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러니 분재는 자연의 가르침을 받아 인간의 마음과 살아가는 방식을 자연으로 이끌어주는 구도적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행한 한성례 시인의 통역으로 성범영씨가 안내해주는 정원을 천천히 돌아볼 수 있었다. 1992년에 용암으로 덮여있던 땅을 돋워 만들었다는 정원은 넓고 정말 다양한 분재들이 있었다. 정원 여기저기에는 저명인사들이 찾아와서 남긴 말들을 돌비석에 새겨 세워놓았다. 정원을 안내해주는 내내 밝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던 성범영씨의 분재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思索之苑’에서 행복한 반나절을 보냈다.

해질 무렵이 되어 ‘思索之苑’을 떠나기 전, 정원 안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차를 마시면서 고맙다는 마음을 전하자, 성범영씨는 감상을 적어달라며 노트를 내밀었다. 그때 무슨 말을 적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그런데 귀국해서 얼마나 지났을까, 시를 써서 보내달라는 요청이 왔다. 내 시비(詩碑)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성범영씨를 처음 만나 반나절 대화를 나눈 것이 고작인데 참 믿기 힘든 제안이었다. 그렇지만 시비는 어찌되었든 성범영씨의 자연관과 인품을 생각하며 다음 시를 써서 자필원고와 한성례씨가 번역한 원고를 부쳤다.

                    위대한 정원사

위대한 정원사가 정원을 만드는 것은
끝나지 않는 것을 만드는 것이다.
매일 매순간 변화하는 산천초목을 닮아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것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과 대화를 즐기는 것이다.

위대한 정원사가 정원을 만드는 것은
유한한 사물과 말하는 것이다.
생의 끊임없는 변화를 되돌아보는 생명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자기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말 못하는 사물의 사랑에 안기는 것이다.

위대한 정원사가 미소를 멈추지 않는 것은
흙과 물, 빛과 바람이 두렵기 때문이다.

비애에 찬 인간 세상의 덧없음에 비추어
자기 자신이 미미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말 못하는 사물의 대변자가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4년이 흘러 올해가 생각하는 정원 ‘思索之苑’이 만들어진지 2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그런 뜻 깊은 해에 “내 시비가 완성되었다”는 소식이 왔다. “아, 정말이구나”하는 감회가 새로웠다. 동시에 성범영씨가 고생해서 완성하고 여전히 만들고 있는 생각의 정원 ‘思索之苑’을 향한 그 분의 열정을 생각하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허구로 사는 일개 시인의 작품 따위가 그분의 인생 앞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할까. 돌에 새겨진 졸시(拙詩)는 부족한 채로 남아있을 것이다. 지우개로 지울 수도 없다.

그런 생각들이 교차하는 동안 나와의 단 한 번의 만남을 기억해주고 시비까지 세워준 성범영씨의 마음을 생각하며 내 자신의 부족함을 용서하기로 한다. 필시 일본 현대 시인의 시비가 세워지는 것은 처음일 것이다. 정말 고맙다. 이제야 솔직하게 기쁘고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한다. 가까운 시일 안에 제주도에 가서 내 시비를 찾아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