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백소애_쑤세미의 골방에서 만화읽기]내일의 왕님
- 쑤세미
Don't dream it, Be it
내일의 왕님
문화콘텐츠의 시대다. 스토리텔링의 시대다. 각 지자체나 여러 단체가 스토리텔링 공모전을 내고 많은 작가나 작가 지망생들을 유혹한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창작자에 대한 ‘대접’은 수준이 형편없는 경우가 많다. 적은 상금에다 2차 저작권은 꿈도 못 꾼다. 심지어 드라마가 재방송을 해도 연기자는 재방료를 받지만 작가는 받지 못한다. 우리나라에서 창작자에 대한 푸대접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드라마건 소설이건 영화건 몇몇 스타 작가를 제외하고는 전업 작가로 밥 벌어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여전한 현실이다. 비단 작가라는 직업군 외에도 ‘하고 싶은 일’과 ‘꿈’이라는 이유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노동을 착취당하는 경우가 많다. 작품을 논할 땐 비즈니스 마인드였다가 작가료를 지급할 때는 예술가 마인드로 돌변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여기, 우연히 본 연극 한 편으로 자신의 인생을 바꾸게 되는 소녀가 있다. 연극무대가 가져다준 문화적 충격에 빠진 그녀는 자신의 길이 ‘연극배우’라고 생각하여 극단에 들어갔다가 극작가, 연출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독자들에게 자극을 주는 이야기는 없다. 그저 물 흐르는 대로 졸졸졸 흐르는 〈내일의 왕님〉은 마치 화학조미료 없이 맛낸 담백한 음식을 먹은 느낌의 만화이다. 처음엔 이 번역 티가 줄줄 흐르는 제목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으나 자신의 꿈을 향해 ‘자존감’을 갖는 여주인공에게 한편으론 더없이 어울리는 제목 같기도 하다.
〈내일의 왕님〉은 만화 강국 일본답게 만화답지 않은 주제와 소재로 재미와 감동을 준다. 굼뜬 주인공이 고군분투하며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여, 미운 오리새끼에서 백조로 탈바꿈하여 꿈을 이뤄나가게 되는 이 만화는, ‘서사의 자극’에만 길들여진 오늘날의 우리에게 청량감을 주는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건 전자음악의 피곤함에 지친 대한민국이 ‘버스커버스커’에 열광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 같다.
사사야 유우는 도쿄의 대학에서 막 자취를 시작한 촌뜨기 신입생이다. 어느 날 친구를 따라 연극을 보게 되고 그곳에서 연극배우 이치이 토야의 연기에 매료되고 만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영정을 보며 매일 대화를 나누는 유우. 그녀는 할머니에게 이제야 자신의 길을 찾은 것 같다고 고백한다. 바로 연극배우가 되는 것. 처음 본 연극의 강렬한 느낌과 무대의 세계에 푹 빠지게 된 유우는 천재 극작가이자 연출가 시마무라 쇼고가 단장으로 있는 극단 ‘아란동’과 인연을 맺게 된다.
대학에서 국문과의 ‘섬 소녀’로 통하는 유우는 함께 다니기 창피할 정도의 패션테러리스트다. 검은색 학생 단화에 접어 신은 흰색 커버의 양말. 무릎 밑 15cm의 낙낙한 치마, 반듯하게 다림질한 블라우스와 두 갈래 딴 머리에 검정색 실 핀, 그리고 무성한 눈썹. 이 모든 촌티를 갖춘 유우가 연극배우가 되고 싶어 하니 주위사람은 모두 비웃기 일쑤다.
극단 ‘아란동’에 들어간 유우는 소도구에 의상 준비, 포스터 부착, 티켓 판매 등 자질구레한 잡일부터 시작하게 된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자취방으로 들어선 유우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고 회상에 젖는다. 고향에는 아버지와 새어머니, 이복동생들이 있다. 대학에 가고 싶었던 유우는 새어머니의 반대에 부딪치게 된다. 유우는 돌아가신 할머니가 예전에 했던 말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다. 자신의 명의로 되어 있는 뒷산을 팔아 유우를 대학에 보내준 할머니.
유우. 어서 네 길을 찾거라. 확실한 네 길을 찾으면 그 다음은 망설일 것 없어.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살 수가 있단다.
이후 습관처럼 할머니에게 하루 일과를 말하고 다짐하는 유우. 자신은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며 오히려 욕심쟁이라고 허세를 떠는 순박한 유우. 이중고의 생활을 전전하는 연극배우들의 삶을 이해하고 ‘아란동’에 점점 적응해가던 중 단장 쇼고에게 유우가 극본 집필과 연출에 더 소질이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유우는 무엇이던 알아서 손해 볼 게 없다는 정신으로 열심히 공부한다. 그 와중에 인기 배우 토야와의 우정도 돈독해진다. 유우는 강렬한 아우라를 풍기며 연기자로서의 존재감을 각인시킨 토야에게 인간으로도 일로도 매료된다. 토야도 목소리만으로도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디테일한 분석을 해주며 응원하는 유우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유우는 공연을 앞두고 일반인들의 삶을 훔치는 연기자들의 진지한 모습을 목격한다. 거리나 전철, 카페나 식당에서 만난 사람들의 버릇이나 표정, 행동이나 말투를 고스란히 가슴에 담아두려는 연기자의 진지한 모습에서 그저 열정만 가지고 취미 따위로 연극을 하려고 했던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할머니,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나 봐요.’ 자신이 연기에 소질이 없다고 포기하려는 찰나 ‘작가’라는 다른 길이 열린다. 유우는 자신이 만들어낸 인물을 배우가 연기해주고 자신이 쓴 대사를 생생한 언어로 되살리는 행위가 얼마나 멋진 일인지 깨닫게 되고 비로소 자신의 길을 찾았음을 할머니에게 고백한다. ‘할머니. 내가 만든 세계. 이건 굉장한 쾌감이에요.’
유우는 점점 높아져만 가는 ‘스타’ 토야에게 언젠가 자신이 쓰고 싶은 작품에 대해 말한다. 고전 민화를 토대로 한 〈되돌이 고개〉. 인적이 드문 산중의 허름한 초가집에 사는 할아버지는 어쩌다 찾아오는 나그네들에게 차를 내주며 이야기를 한 편씩 들려준다.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마칠 때마다 젊어진다는 이야기인데, 유우는 그 이야기를 1인극으로 만들어 토야를 주인공으로 쓰고 싶다고 이야기 한다. 〈되돌이 고개〉를 언젠가 꼭 무대에 올리자는 약속을 하는 둘은 작품 이야기만으로 행복해진다. 도약할 기회가 온다면 얼마든지 넓은 세상으로 나가야 하지만, 첫 마음을 간직하고 언젠가는 연극무대로 돌아올 것이라는 둘만의 약속은 소중한 비밀이 된다.
누가 뭐라든 매사 최선을 다하는 유우는 일본만화 특유의 ‘캔디’형 캐릭터지만 민폐형 캐릭터가 아니다. 비아냥거리는 상대에게도 진심을 다해 끝내는 자신의 진심이 통하게 만드는 매력의 소유자다. 공연을 앞두고 무대 뒤에서 발발 떠는 신인 연기자에게는 ‘신인이라는 딱지에 좋은 점이 있다면 실수해도 겁날 게 없다는 거다’는 말로 응원해주고, 또 연극무대를 넘어 TV에까지 진출한 토야를 두고는 ‘내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간다면 내가 노력해서 거기까지 따라가면 돼’라며 의기 충전한다. 의욕이 앞서 벌써 다음 작품을 향해 달려가는 그녀지만 ‘아란동’단장 쇼고의 진심어린 조언에 숨고르기를 한다. ‘할머니, 제가 또 내달려버린 것 같아요.’
유우와 같이 내달려버리는 청춘이 그리운 시대다. 장래 희망이 안정적인 ‘공무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 반에 서른 명의 아이들이 있다면 서른 가지의 장래희망이 나올 수 있는 그런 다양성과 창의력, 내일의 왕님이 될 수 있다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는 청춘들이 말이다. 유우는 꿈을 향해 한발씩 내딛고 토야와의 약속도 지킨다. 자신이 완성한 연극 〈되돌이 고개〉에서 한 편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젊어지는 할아버지처럼, 나그네(관객)에게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기 삶의 퍼즐도 완성해가는 것이다.
할머니, 사람은 참 이상해요. 어느 날 문득 생각지도 않은 자신을 발견해서 마치 새로운 생명을 받은 것처럼 빛을 발하기도 해요.
아마도 학창시절 이 만화를 접했더라면 나는 아마도 극작가의 꿈을 꿨을지도 모른다. 봄날처럼 따뜻하고 벚꽃처럼 풋풋한 만화 〈내일의 왕님〉의 유쾌한 이야기를 이 봄에 여러분과 함께 하고 싶다. 총 10권인 이 만화책을 몇 해 전 점포 정리하는 책방에 가서 권당 300원에 구입! 횡재했다. 이제 아름다운 봄날이 시작되었으니 가까운 시일 내 부산 보수동 헌책방 거리를 거닐며 만화책을 찾아볼 생각이다.
내일의 왕님1-10(완)/ 에미코 야치(Emiko Yachi) 글 그림/ 서울문화사
- 글쓴이 : 백소애
- 강원도 태백 출생. 아이큐는 낮지만 머리가 좋다고 굳게 믿고 있음. 변덕이 심하고 우유부단하나 따뜻한 품성을 지니고 있다. 조카들에게 헌신적이며 인간성 또한 좋다.....고 믿고 있다. 학생 때 교무실에서 밀대자루로 바닥 밀면서 은밀히 훔쳐본 생활기록부에는 ‘예의 바르나 산만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한참을 갸우뚱 하다가 담임이 수학선생님이었기에 그냥 이해하기로 함. 다소 후진 취향을 지니고 있으나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고 쓸데없는 걱정과 호기심이 많음. 같은 계획을 몇 년째 하고 있으며 역시나 올해도 다이어트와 앞머리 기르기에 도전할 생각이며 과메기에 없어서는 안 될 다시마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 웹툰도 괜찮지만 만화책은 역시 종이책으로 보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아날로그 건어물녀. 좋아하는 것은 무한도전, 오뎅으로 만든 떡볶이, 삼겹살에 매실소주, 비오는 날, 생활의 달인,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괴짜가족 류의 저질유머. 비 오는 날 무한도전 틀어놓고 배 깔고 누워 만화책 보면서 빈둥거리며 사는 것이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