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최혜란_자연의 길에서 사람의 삶을 찾다]부용대 층길을 걷다
- 최혜란
부용대 층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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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층길 |
▲ 층길 |
층길(針: 침길이라고도 함)은 하회마을 부용대의 층층절벽을 따라나있는 좁고 험한 옛길이다. 부용대 절벽 중간으로 걀쯤이 이어지는 이 아슬아슬한 층길을 걷다보면 발아래로는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고 강 건너로 하회마을이 보인다. 이 길 위에서 아름다운 풍경은 물론 서애와 겸암 형제가 남긴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 층길은 옥연정사나 겸암정사 어느 쪽에서나 출발할 수 있다. 겸암정사 앞에 차를 세워놓고 부용대를 거쳐 화천서원과 옥연정사를 둘러보고 층길을 걸어 겸암정사로 되돌아가거나, 화천서원 옆의 부용대로 가는 산길을 택해 겸암정을 보고 층길을 걸어 옥연정사 쪽으로 나와도 좋다.
▲ 하회마을 전경
옥연정사에서 출발하는 코스는 먼저 부용대에 올라 강이 휘감고 돌아가는 하회마을의 전경을 감상한 후 겸암정사를 보고 층길을 걸어 옥연정사로 되돌아온다. 옥연정사 쪽에서 층길을 걸어 겸암정사에 돌아본 후 부용대에 올라 하회마을과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고 옥연정사 쪽으로 내려오면 된다. 옥연정사 아래에 있는 모래톱 끝에는 나루터가 있다. 나룻배를 타고 하회마을로 들어갈 수 있다. 마을로 들어가는 가장 운치 있는 방법이다. 높다란 부용대에서 낙동강의 고운 모래톱, 만송정과 하회마을을 감싸고도는 물길을 바라보고 옥연정사 쪽으로 내려와 배를 타고 마을로 들어가 마을의 고샅을 어슬렁거려 본다. 부용대에 올라 먼저 눈으로 그림을 그리고, 마을을 체험하러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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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쌀겨바위 |
▲ 갈모바위 |
층길은 ‘형제의 길’이라고도 한다. 관직에서 물러나 옥연정사에 머물렀던 서애 류성룡은 아침저녁으로 이 길을 걸어 겸암정(謙嵒亭)으로 형님을 만나러갔다고 전해진다. 겸암정사가 1567년, 옥연정사가 1586년에 지어졌으니 벌써 400여 년이 지난 옛날이야기다. 층길을 걷다보면 마치 강 위에 떠있는 쌀겨처럼 보인다는 쌀겨바위와, 층길 중간쯤에서 내려다보면 형상이 뛰어나갈 자세를 취한 말의 귀처럼 생겼다는 갈모바위(마암, 말바위라고도 함)를 볼 수 있다. 마암은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 공의「하회16경」이란 시에 ‘마암노도(馬巖怒濤)’로도 묘사된 바위다. 물이 많이 흐를 때 바위에 강물이 부딪치면서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큰 소리를 낸다고 한다.
▲ 1828년 하회마을
지난 2008년 안동시가 하회마을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던 중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화공 이의성이 그린 조선후기의 하회마을의 모습을 담은 산수화〈1828년 하회마을〉을 발견했다. 도산서원에서 예천 지보에 이르는 낙동강 줄기의 명승지를 그린 여덟 폭 병풍 중 한 폭이다. 1828년 당시의 경관, 가옥의 배치, 풍속 등이 상세히 묘사되어있다. 이 그림에는 풍산 류씨 종택인 양진당과 충효당,「하회16경」에 나오는 강섶의 바위, 마을의 교통수단이었던 나룻배와 섶다리, 서애와 겸암이 우애를 다지며 왕래했다는 부용대 ‘층길’ 등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전설로 전해지는 ‘안씨가 피 천석을 수확했다던 섬’, 만송정의 솔숲, 하회마을의 풍수지리적인 단점을 보완한 조산(造山) 등도 표현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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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암정사 전경 |
▲ 겸암정사에서 바라본 풍경 |
오늘은 층길을 겸암정사와 옥연정사 양쪽에서 다 걸어보기로 했다. 겸암정은 잘 알려진 것처럼 겸암 류운룡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던 곳이다. 부용대의 서쪽, 강물이 크게 돌아 굽이치는 절벽 위 소나무숲 속에 마치 숨어있는 듯 고요히 들어앉아있다. 건물은 절벽 가장자리에 '일'자형으로 놓여있고, 그 뒤편에 살림채는 'ㄱ'자형 집이다. 정사의 안방과 건넌방 앞쪽으로는 툇마루를 마련해놓았다. 정사는 남쪽 절벽 위편, 살림채는 정사 뒤쪽에 있다. 살림채의 문이 잠겨있어 안을 볼 수 없다는 점이 무척 아쉬웠다. 정사에서 내려다보면 강 건너 모래밭과 만송정, 하회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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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암정사 현판 |
▲ 나룻배에서 바라본 겸암정사 |
겸암정이라는 당호는 퇴계 이황 선생이 겸암의 학문적 자질과 성실함에 감복하여 지어준 것이다. 겸암은 퇴계 선생이 지어준 당호를 귀히 여겨 자신의 호로 삼았다. 퇴계 이황은 겸암정의 현판을 써주면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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聞君構得新齋好 그대가 새 집을 잘 지었다고 들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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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암 류운룡 선생의 시 |
▲ 겸암정사로 가는 길 |
겸암정 입구에는 겸암이 퇴계 선생의『유청량산(遊淸凉山)』의 운(韻)을 따서 지은 시가 돌에 새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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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次
峭壁丹崖窈復深 雲烟明滅碧千尋
퇴계 선생의『유청량산(遊淸凉山)』의 운(韻)을 따서 겸암 류운룡이 짓다 |
▲ 겸암정 강수계
정사 입구의 처마 밑에 ‘겸암정 강수계(謙嵓亭 講修稧)’라는 목판이 붙어있다. 강수계를 보면 겸암선생이 학문 연마와 자기수양에 힘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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講道 도를 익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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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암 류운룡은 잘 알려진 것처럼 아우 서애 류성룡과 함께 이황의 제자였다. 그는 퇴계가 관직에서 물러나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도산서당을 열자 아버지의 권유로 아우와 함께 퇴계에게 학문을 배웠다. 겸암이 하회와 도산을 오가며 퇴계에게 실제로 공부한 기간은 10년 남짓이었다. 그의 수학기간은 아우 류성룡이나 다른 제자들이 퇴계 선생에게 학문을 배웠던 기간에 비해 월등히 긴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생 서애 류성룡을 비롯하여 월천 조목, 학봉 김성일이 계파를 형성한 것과는 달리 독자적 계파를 형성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겸암이 자신의 계파를 형성하지 못한 것은 결코 그의 학문적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퇴계의『계몽전의(啓蒙傳疑)』『이학통록(理學通錄)』등을 편찬하는데 참여해 스승의 학문을 정리하고 계승할 정도로 역량이 뛰어났다. 따라서 겸암이 계파를 형성하지 못한 것은 학문적 요인이 아니라 그의 현실적인 판단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난 후 학파 내부에서 계파를 형성하여 분파한 것은 학문적 견해차라기보다 현실을 인식하는 태도와 출세관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으로 미뤄볼 때, 겸암이 자신의 계파를 형성하지 않았던 것은 퇴계학파의 분파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서애 류성룡의 시
겸암정사를 천천히 둘러보고 나오니 정사 앞 빈 터에 아우 서애 류성룡이 형님이 정자를 지은 것을 알고 쓴 시가 돌에 새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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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兄遺亭館 우리 형님 정자 지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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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지(吉地), 하회마을 |
▲ 나룻배를 기다리는 사람들 |
겸암정사에서 부용대로 가는 고즈넉한 산길을 천천히 걸었다. 소나무가 제법 많이 자라고 있어 코끝에서 솔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부용대 정상에 서서 건너편에 보이는 하회마을을 바라본다. 부용대에서 보면 마을의 수려한 풍수지리를 유추할 수 있다. 산과 강이 ‘S’자 모양으로 어우러져 태극 모양을 이루는 ‘산태극 수태극(山太極 水太極)’, 연꽃이 물에 떠있는 듯해서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배가 가는 모습 같이 생겼다고 해서 ‘행주형(行舟形)’이라 했던가. 모래톱 끝에서 나룻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작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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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연정사 |
▲ 옥연서당 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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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애 선생이 심은 소나무 |
▲ 種松 시비 |
다시 길을 내려와 화천서원을 지나 옥연정사 안으로 들어선다. 정사 입구에는 서애의 종송(種松)이란 시가 돌에 새겨져있다. 정사 마당에는 수령이 450년이나 되는 노송이 서있는데, 서애가 제자들과 함께 심었다고 한다. ‘種松’이란 시비는 아마도 이것을 기념하여 지은 시인 듯 하다. 서애는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에 머물면서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징비록』(국보 제132호)을 썼다.
▲ 층길 바위 틈에 난 풀
옥연정사를 돌아보고 간죽문(看竹門)을 나와 다시 층길을 걷는다. 층길 오른편으로는 부용대가 우뚝 솟아있다. 이 길은 한 폭이 채 안되지만, 길 중간 중간 바위 사이로 오르내리는 험준한 구간도 있다. 그 길에서 바위틈에 고개를 쏙 내밀고 있는 풀을 만났다. 그렇게 건너편에 있는 하회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감탄하다가, 높이 솟아있는 부용대를 쳐다보며 현기증이 느끼기도 하며 그 길을 걸었다. 그 옛날 서애와 겸암 형제가 걸었을 이 길을 천천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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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연 |
▲ 능파대 |
▲ 추월담 |
층길의 종착지점인 옥연정사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언덕 끝에도 노송이 한 그루 서있었다. 저 건너편으로는 만송정 솔숲이 보인다. 발아래에는 널따란 모래톱이 펼쳐지고 기다란 모래톱 끝엔 나룻배를 타려고 관광객들이 줄지어 서있다. 나룻배를 타면 이 강을 건너 하회마을로 들어갈 수 있다. 옥연정사 아래 깨끗하고 맑은 소(沼)가 있는데 이름도 ‘옥연(玉淵)’이다. 옥연정사 아래의 바위에는 능파대(凌波臺)와 추월담(秋月潭)이라고 새겨져 있다. 서애는 이곳을 오가면서 바위에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겸암정사 옆에는 강물이 아무리 들이쳐도 이르지 못한다는 능허대(凌虛臺)가 있었다. 400년 전의 겸암과 서애 형제를 떠올리며 나는 모터 달린 나룻배에 오른다. 그 옛날 서애와 겸암 형제는 노 젓는 배를 타고 이 강을 건너 마을을 오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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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허대 |
▲ 뒤에서 바라본 겸암정사 |
- 글쓴이 : 최혜란
- 살아가는 동안 지구별의 곳곳을 눈으로 보고 두 발로 디뎌보고 싶은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