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백소애_쑤세미의 골방에서 만화읽기]정말,〈탐나는도다〉
- 쑤세미(sodoors@nate.com)
정말, 〈탐나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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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야월2(秋夜月2) 가을 달밤에
一月兩地照(일월양지조) 하나의 달이 두 땅을 비추는데 |
인조 때를 배경으로 한 만화 <탐나는도다>에서 영조 때의 여류시인 김삼의당의 시를 읊다니? 그러나 정혜나 작가는 이 시를 차용한 이유가 그만큼 작품의 분위기와 어울려서라고 밝혔다. 영국 청년과 제주 처녀의 사랑이야기, 그리고 사대부 댁 도령의 삼각관계. <탐나는도다>는 그들의 풋풋한 이야기가 제주를 배경으로 청정수처럼 맑고 푸르게 펼쳐지는 만화이다.
아, 왜 이 만화를 이제야 보았을까. 
학창시절 <<르네상스>>, <<댕기>>, <<하이센스>>, <<화이트>> 등의 인기 만화잡지를 구입하는 애들이 교실에서 갖는 위치는 단연 ‘갑甲’이었다. 우리들은 빠른 순번을 부여받기 위해 친분을 과시하거나 아양을 떨어야 했으며 때론 매점의 빵을 ‘조공’하기도 했다.
당시의 순정 만화계는 황미나, 김혜린, 신일숙, 김동화, 한승원, 강경옥, 이미라, 권현수, 원수연 시대를 거쳐 박희정, 유시진, 나예리, 권교정, 박은아가 토스하고, 지금은 <궁>의 박소희, <탐나는도다>의 정혜나로 이어졌다. 한참 몰입했을 때 갑자기 잡지 하단에 등장하는 ‘To be continued’는 웹툰의 다음 회를 기다리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기다림이었다. 종이만화가 가지는 여운에 긴장감과 기대감까지 더해주었던 것이 바로 아날로그 만화잡지의 위력이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풍경이 되어버린 만화잡지 전성시대를 거쳐 그나마 순정 만화잡지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윙크>>에 실린 <탐나는도다>는 드라마로 만들어져 더욱 화제를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2009년 여름, <탐나는도다>는 주요 시청자들의 취향과는 생뚱맞게 주말드라마로 편성되어 방송되다 낮은 시청률로 조기 종영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마니아들의 뜨거운 호응과 웰메이드 드라마로 호평을 받았다.
꽃미남 영국귀족 윌리엄의 新동방견문록
드라마 <탐나는도다>와 만화 <탐나는도다>는 내용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 줄거리는 거의 비슷하다. 때는 1640년. 동양문화에 대한 환상과 동경을 간직한 영국의 꽃미남 귀족청년 윌리암. 그는 특히 도자기에 매료되어 있다. 더군다나 그 용도를 몰라 더욱 궁금한 조선의 요강에! 윌리암은 네덜란드로 귀화한 일본인 상인 ‘얀’과의 친분을 이용해 몰래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는 배에 오른다. 동양의 예술품을 실어 나르는 해상 실크로드가 곧 도래되리라는 것을 느끼면서 나가사키로 향하던 윌리엄은 거센 풍랑을 만나 탐라(제주의 옛 이름)에 표류하게 된다. 말도 안 통하는 이양인 윌리엄을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은 제주도 최고 잠녀(해녀의 제주도 말, 좀녀라고 부르기도 한다)의 망아지 같은 둘째딸 버진이다.
장버진은 당대 최고의 꽃미남으로 이름 날린 ‘제주 원빈’출신 아빠와 ‘귀신 잡는 해녀부대’의 수장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나, 부드럽고 따스한 성품의 아빠 기질과 강인하고 용감한 엄마 기질을 모두 빼닮았다. 동생 버설이가 태어난 지 사흘도 안 돼 물질을 시작한 버진의 어머니처럼 제주의 모든 여자들은 반농반어(半農半漁)로 삭신이 쑤셔도 끊임없는 노동을 계속한다. 그런 와중에도 남존여비사상은 강해서 버진의 할머니는 ‘딸을 낳느니 소를 낳고 말겠다’는 해녀들의 속담을 토해내며 생을 마감한다. 지긋지긋한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버진은 윌리엄에게 새 세상으로 함께 데려가 줄 것을 부탁하고 어느덧 버진을 사랑하게 된 푸른 눈 소나이(사나이의 제주도 말) 윌리엄 역시 버진과 함께 제주를 떠날 것을 계획한다. 윌리엄과 말은 안통해도 정이 쌓인 비바리(제주 처녀) 버진은 난바르(먼 바다) 너머 다른 세상으로 윌리엄이 데려가 줄 것이라 믿고 윌리엄도 버진과 함께 떠날 꿈에 부푼다.
한편 한양에서 제주로 귀양 온 귀양다리(귀양살이를 얕잡아 부르는 말) 박규는 버진네에 ‘하숙’아닌 하숙을 하게 되고 유배 온 선비 주제에 온갖 품위는 다 지키려 하다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며 버진 어멍의 멸시를 받는다. 뼛속까지 양반임을 바득바득 우기던 박규는, 인간은 과연 환경의 동물인지라 버진네 가족들과의 제주도 생활에 점점 익숙해진다. 무언가 비밀을 간직한 듯한 박규는 사실 어명을 받고 제주도에 내려온 것. 때는 인조시절, 제주는 몇 안 되는 백성과 죄인들의 불모지였다. 늘 버겁게 진상품을 올려야했고 삶은 팍팍했다. 박규는 실성한 모습을 가장했지만 차가운 눈빛의 노인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제주의 미친 할아방은 실은 인조반정 때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제주에서 쓸쓸한 생을 마감했던 광해군이었다. 할아방은 이양인 윌리엄에게 자신의 모습을 감출 수 있는 ‘왕의 가면’을 건네주면서 ‘왕은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모두들 왕이 되고 싶은 것 아니냐’고 말한다.
별은 스스로 빛나는 걸 모른다
제주사람 모두 정신 나간 사람으로 여기던 할아방은 제주잠녀 버진의 진정한 멘토이다. 버진은 자신이 별이었으면 세상천지 어디든 다 비추며 다닐텐데 정해진 곳에서 물질만 할 뿐인 보잘것없는 잠녀 신세를 한탄한다. 버진은 천날만날 물질만 하다 죽은 할망의 장례를 기억한다. 할망의 장례의식에서 배를 타고 가파른 길을 가면서 한 맺힌 가락을 토해내던 해녀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이엇 사나 이어도 사나 우리 어멍 날 낳을 적에 손에 괭이 박으라고 날 낳던가’
그러나 조선시대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비운의 군주 광해군 할아방은 버진의 맑은 눈빛을 보며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아가, 너도 할애비가 보기엔 별이란다.
별은 스스로 빛나는 걸 모르는 거란다.
서로가 깨닫지 못한 자신들의 빛깔을 서로가 발견해주며…
그렇게 부딪치며 살아가는 거란다.”
월해금법(越海禁法, 제주 여자들은 제주 섬 밖을 나가지 못하는 법)에 묶여 제주도에서 팽생 잠녀로 살다 노동에 지쳐 돌아가신 할머니와 그 뒤를 묵묵히 잇는 엄마처럼 살지 않기 위해 새 세상으로 떠날 결심을 하는 버진. 버진은 자신에게도 자신만의 이어도가 있을 거라 확신한다. 자유롭게 세상을 돌아다닐 꿈에 부푼 버진과 그런 버진에게 연심을 품게 된 자신이 어처구니없는 박규. 이들이 제주의 진상품 도난사건과 여러 사건에 얽히게 되면서 이들의 삶이 수월하게 풀리지만은 않게 이야기는 전개된다.
탐라를 구해줍서
17세기 조선시대 탐라에 표류한 영국 미소년 윌리엄이 엉뚱하고 발랄한 해녀 버진과 명문가 자제 박규를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 <탐나는도다>는 좀 더 넓게는 제주를 지키려는 조선시대 제주사람들과 해녀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야기이기도 하다. ‘왕의 가면’을 쓰고 마음대로 세상을 주무르고 싶은 자들에 대한 순박한 제주 사람들의 대항이기도 하다. 제주에서는 사대부 박규도 노동을 하고 이양인 윌리암도 마을사람으로 인정받는다. 신분차별, 성차별, 인종차별을 넘어선 이해와 소통, 우정을 이 작품에서는 거창할 것 없이 다 보여주고 있다. 폐쇄된 섬에서, 열린 사고를 가진 고삐 풀린 순수한 비바리 버진을 통해서 말이다.
‘안녕 지긋지긋한 나의 고향 제주도.’ 버진은 한양으로 끌려간 윌리엄을 찾기 위해 변복을 하고 제주를 떠나고 그래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더욱 강하게 깨닫게 된다. 무릇 삶이란 아이러니하게도 잃은 뒤에야 소중함을 아는 것이다. 사랑이 떠나간 뒤에야 그 소중함을 알고 자연이 파괴된 뒤에야 소중함을 아는 것, ‘왕의 탈’을 벗고 그제야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보게 된 광해군처럼 말이다. 삶의 터전을 잃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주특기를 살려 제주를 팔아넘기려는 이들의 배를 빗창(전복 따는 도구)으로 찍어 바다에 가라앉게 하는 해녀들의 모습은 그래서 더욱 인상적이었다.
어명을 감추고 유배 온 명문가 도령, 영국인 귀족 청년, 쫓겨난 왕, 천한 제주 잠녀 등 다양한 인간군상을 통해 만화적 상상력과 17세기 제주의 역사적 재미까지 더한 만화 <탐나는도다>, 더불어 배우들과 싱크로율 100%인 드라마 <탐나는도다>는 다가온 봄처럼 따뜻하고 즐거운 이야기이다. 제주를 배경으로 버진과 윌리암, 박규의 삼각 사랑 속에 신분제와 제주 민초들의 삶을 녹여내고 있는 만화 <탐나는도다>는 나라에 진상품을 바쳐야 하는 제주 잠녀들의 거친 삶을 개그로 승화, 시원한 바다를 배경으로 시종일관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다.
탐나는도다1-15(완)/ 정혜나 글, 그림/ 서울문화사
- 글쓴이 : 백소애
- 강원도 태백 출생. 아이큐는 낮지만 머리가 좋다고 굳게 믿고 있음. 변덕이 심하고 우유부단하나 따뜻한 품성을 지니고 있다. 조카들에게 헌신적이며 인간성 또한 좋다.....고 믿고 있다. 학생 때 교무실에서 밀대자루로 바닥 밀면서 은밀히 훔쳐본 생활기록부에는 ‘예의 바르나 산만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한참을 갸우뚱 하다가 담임이 수학선생님이었기에 그냥 이해하기로 함. 다소 후진 취향을 지니고 있으나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고 쓸데없는 걱정과 호기심이 많음. 같은 계획을 몇 년째 하고 있으며 역시나 올해도 다이어트와 앞머리 기르기에 도전할 생각이며 과메기에 없어서는 안 될 다시마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 웹툰도 괜찮지만 만화책은 역시 종이책으로 보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아날로그 건어물녀. 좋아하는 것은 무한도전, 오뎅으로 만든 떡볶이, 삼겹살에 매실소주, 비오는 날, 생활의 달인,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괴짜가족 류의 저질유머. 비 오는 날 무한도전 틀어놓고 배 깔고 누워 만화책 보면서 빈둥거리며 사는 것이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