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이효걸_안동의 정자 기행]기록으로 살펴본 안동의 정자 개관 2
- 이효걸
기록으로 살펴본 안동의 정자 개관 2
안동의 정자 문화는 퇴계 이황을 정점으로 크게 변화한다. 퇴계가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예안에 도산서당을 짓고 10여 년간 후학을 가르친 일은 단순히 퇴계의 은일적 삶의 모습으로만 볼 수 없다. 그의 후반부 삶이 관료 생활에서 온 피로감을 덜어내거나 혹은 그가 기대했던 유교적 이상을 현실정치에서 구현해낼 수 없는 무력감과 좌절감을 무마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후반부 10년간의 삶은 평생을 통해 탐구한 성리학적 이상을 자신의 삶으로 몸소 구현하고자 하는 굳건한 의지가 서려있기 때문에, 그것은 ‘물러난 삶’이 아니라 ‘참됨으로 돌아온 삶’이다. 마침내 자신의 이상에 맞는 참 삶으로 돌아온 최후 10년간의 퇴계의 삶은 크게 세 갈래로 되짚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조선 최고의 성리학을 지역화했다는 점이며, 둘째는 성리학의 이상을 실제의 삶에 밀착시킴으로써 자율적 생활공동체를 구현하고자 했다는 점이고, 마지막으로 그의 일상적 행위 중 많은 부분이 자기 삶의 터전을 아름답게 가꾸는 인문학적 문화활동이었다는 점이다.
▲ 도산서당
무엇보다도 퇴계가 도산서당을 짓고 지역의 후학을 잘 가르쳐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양성했다는 사실은 조선 성리학이 지역화에 성공했음을 뜻한다. 국가의 최고교육기관인 성균관을 통하지 않고도 지역의 사교육 기관에서 동일한 수준의 교육성과를 거뒀다는 사실은 엘리트 교육의 지역평준화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퇴계가 입증한 이 교육적 성취는 훗날 지역에서 교육의 이상적 표본이 되어 전국 곳곳에 서원이 건립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퇴계의 귀향활동은 여기에만 그치지 않았다. 유학의 이상인 도덕적 공동체의 건설은 국가의 지배체제를 통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통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적 삶을 통해 자발적이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하는데 있다. 퇴계는 ‘예안향약’을 제정하여 지역사회를 자율적인 도덕적 공동체로 만드는 모범을 보였다. 그것은 관습의 행태를 반성적으로 고찰하고 그 안에 유교적 선의지를 반영하여 일상생활에서 자치적 윤리공동체를 구현하는 유학적 실천이었다. 성리학적 이념의 정치적 구현을 표방한 조선 건국의 정당성이, 궁극적으로 예안향약처럼 지역사회 곳곳에서 자율적으로 생활윤리를 실천하는 공동체가 튼튼하게 뿌리내릴 때 가능하다면, 퇴계가 귀향한 후의 활동이 지닌 역사적 의의는 사실 관직을 통한 기여보다 훨씬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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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잡영』겉표지 |
▲『도산잡영』속표지 |
퇴계의 귀향생활이 남긴 또 하나의 의의는 자기 삶의 터전을 인문학적으로 가꾸었다는 점이다. 바로 이점이 안동의 정자문화가 퇴계 이후 크게 변했다는 사실과 직결된다. 퇴계가 귀향해서 남긴 시는 분량이 엄청나다. 요즘의 직업시인조차 그만큼 시를 쓰기 쉽지 않다.『도산잡영(陶山雜詠)』을 보면 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시의 소재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퇴계의 시는 좋은 풍광을 찾아다니면서 그때그때 샘솟는 자신의 흥취를 담아냈다기보다 자신의 삶터에 들어있는 자연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그것을 인간학적으로 재해석했다. 곧 자연과 조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 그의 시에 나타난 주된 정조(情調)였다. 다시 말하면 유교경전에 표현된 딱딱한 관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연의 생동하는 기운을 온몸으로 직접 느끼고 그것을 치열한 정신으로 건져 올린 것이 그의 시이다. 퇴계의 시는 곧 퇴계의 자연체험 텍스트인 것이다. 기대승과 인간의 감정을 둘러싸고 8년 동안이나 논변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머리를 싸매고 독해했다고 해서, 그들이 말하는 인간 감정의 진수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시를 보면 자연을 대하고 느낀 한 인간의 진솔한 감정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죽어있는 이치인 문자 텍스트보다 살아 있는 감정의 텍스트로서 그의 시가 가진 설득력은 그래서 더 크고 새롭다.
퇴계가 귀향한 후 활동근거지로 삼은 도산서당은 그의 시 정신과 깊은 연관이 있다. 왜냐하면 자연 속에 침잠하여 자연과 교감하면서 인간의 길을 모색한 체험의 노래가 그의 시라면, 자연에 침잠하고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삶의 터전이 도산서당이었기 때문이다. 도산서당은 그의 시가 탄생되는 출입구이자, 그의 시 정신이 온축된 공간적 상징이기도 하다. 그의 귀향은 번잡한 중앙정계에서 벗어나 전원으로의 도피가 아니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딱딱한 유교경전에서 벗어나 생명이 흐르고 감정이 꿈틀대는 자연과 인간이 직접 대화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눈 무엇보다도 자연에 머무는 삶이 전제되어야 한다. 더구나 자연과 소통하고 자신을 관조하고자 한다면, 감각의 문을 활짝 열고 사고와 언어의 틀에서 벗어나 마음을 자유롭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뜻을 이루기 위해 퇴계가 마련한 삶터가 도산서당이었던 것이다. 도산서당에서 생성된 그의 시는 감정을 들뜨게 하지도 않고, 세상살이에서 얻은 감정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욕심도 없다. 그의 시 정신은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진솔한 인간이 되려했던 것으로, 그것은 마치 추위를 한껏 머금었다가 다시 생명을 키워내는 꼿꼿한 매화의 향기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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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산서당 현판 |
▲ 암서헌 현판
▲ 완락재 현판 |
나는 퇴계의 시 정신이 ‘陶山書堂’에 참 잘 선언되었다고 본다. 그림글자로 표현된 도산의 ‘山’字는 바로 그의 삶이 직접 체험하는 자연을 말한다. 그러므로 ‘陶山書堂’의 중간 두 글자 ‘山書’는 ‘산이라는 책’ 곧 ‘자연의 텍스트’이다. 퇴계는 귀향활동을 통해 자연의 텍스트를 새롭게 다시 읽을 수 있었고, 마침내 유교경전의 관념적 질서를 살아 숨 쉬는 혈맥의 생동감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퇴계의 이런 의지는 도산서당의 마루에 있는 ‘암서헌(巖栖軒)’이라는 현판과, 1칸짜리 방에 있는 ‘완락재(玩樂齋)’의 현판의 명칭에도 그대로 담겨있다. 이 세 명칭을 합해 읽어보면, “나는 자연에 깃들어 살면서(巖栖) 자연의 텍스트(山書)를 읽고 느끼며 그 즐거움을 한껏 누리겠다(玩樂)”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의미에서 퇴계의 시가 탄생한 터전이기도 했던 도산서당은 퇴계가 자연에 침잠하여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곳이었으며, 그가 늘 꿈꾸던 삶이 마침내 성취된 그의 최후 안식처였다. 퇴계가 떠도는 삶을 정리한 후 편히 머물렀던 작은 거처 도산서당은, 그야말로 퇴계의 ‘정자(머무르는 작은 공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도산서당은 교학의 공간인 동시에 자연과 교감하는 시작(詩作)의 정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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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풍정 |
▲ 광풍정 현판 |
안동의 정자 문화가 퇴계를 정점으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것은 휴식과 교류를 위한 일시적 풍류 공간이었던 이제까지의 정자가, 일정한 거처에 안착하며 자연을 음미하는 체류형 정자로 바뀌면서 정자에 ‘머문다’는 새로운 기능이 부가되었기 때문이다. 이 변화는 한 마디로 말하면 거주지에 가까운 ‘체류형 정자’의 등장인데,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지는 시기는 퇴계학파의 형성 이후다. 그렇다면 어째서 안동의 정자는 퇴계학파가 형성되면서 체류형 정자로 바뀌게 될까? 지금까지는 퇴계학파가 경북 북부지방 일원에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것과 연관이 있다고만 해석했다. 퇴계학파의 본격적 확산은 퇴계의 1대 제자인 월천 조목ㆍ학봉 김성일ㆍ서애 류성룡 등이 자기의 세거지에서 퇴계의 학통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면서 시작되었다. 월천은 퇴계의 고향 예안에서 퇴계학을 계승했고, 학봉과 서애는 각각 안동부의 동쪽과 서쪽인 내앞마을과 하회마을을 재 확산의 구심점으로 하여 퇴계학을 계승적으로 발전시켰다. 퇴계학의 분파적 확산은 종택과 서원을 통해 혈연적, 학통적 내부의 결속성을 강화하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경북 북부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나간 퇴계학파는 퇴계학 고유의 정체성을 공유하기 위해서 분파 간의 연대가 필요했다. 분파간의 균열을 무마하고 퇴계학 고유의 가치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자유로운 교류의 공간 역할이 바로 안동 정자의 독특한 기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체류형 정자가 등장하여 분파의 전개로 나타난 차별성을 넘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연결고리 역할을 한 것이다. 광범위하고 멀리 흩어져 있어 원거리를 내왕해야했던 분파의 유학자들을 위해 체류형 정자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는 논리다. 그러나 체류형 정자가 등장한 배경은 이것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체류형 정자의 등장이 정자 기능의 실질적 변화에서 비롯되었음을 눈여겨봐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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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도문 현판 |
▲ 전교당으로 오르는 계단 |
퇴계의 시는 자연에 침잠하여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인간의 길을 찾아가는 자기성찰의 노래라고 했다. 또 도산서당은 퇴계가 그의 시 정신을 구현하며 ‘머물러 완상하는 삶터’였던 새로운 형태의 정자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퇴계에게 도산서당이라는 정자는 삶의 본류에서 일시적으로 일탈하는 공간이 아니라, 편안히 머물며 자기성찰의 삶으로 회귀할 수 있는 삶의 본류에 자리 잡은 진정한 공간이다. 그렇다면 이제 정자는 일상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보조공간이 아니라, 떠도는 삶에서 참된 삶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진도(眞道)의 문’이 된다. 퇴계의 시 정신이 의도하는 바와 같이, 참된 삶은 자신의 이념을 쫓아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터에서 자신과 주변을 성찰하고 자신의 참다운 삶을 찾는 데 있다. 삶터에 체류하고 자기 자신에게 체류하는 것이 참된 삶이다. 떠도는 삶을 편히 머무는 일상적 삶으로 바꾸는 것이 퇴계 성리학의 진수이고 그의 시 정신이었던 것이다. 퇴계학파의 후계자들은 이러한 퇴계학의 근본정신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 도산서당이라는 새로운 의미의 정자를 본받아 자신의 삶터에도 자기 삶을 정화하는 수행공간으로 체류형 정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퇴계 이후의 안동의 정자는 기존의 ‘일시적 휴식과 교류를 위한 풍류형 정자’에서 인간다운 삶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위한 ‘자기성찰의 체류형 정자’로 변모했다. 안동의 체류형 정자의 등장은 광범위한 지역 간의 교류를 위한 기능적 필요 때문이기도 했지만, 퇴계학의 정신을 구현하는 ‘삶터의 진도문’을 만들고자 했던 퇴계 후인들의 열정 때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변모는 퇴계 이전에 있었던 안동지역 정자의 제영시(題詠詩)와, 퇴계 이후의 안동 정자의 제영시에서 드러난 차이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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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자정 |
▲ 군자정 현판 |
결론적으로 안동의 체류형 정자는 퇴계 성리학의 지역화 혹은 생활화의 명백한 증거이다. 특히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엽까지 퇴계의 1대 제자들이 조영한 일련의 정자들은 안동의 정자문화 제4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앞서 말한 풍류형 정자들과 대비되는 자기성찰을 위한 체류형 정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김성일의 석문정사나 류운룡ㆍ류성룡 형제의 겸암정사ㆍ빈연정사ㆍ원지정사ㆍ옥연정사 등 ‘정사(精舍)’라는 이름의 새로운 형태의 정자들은, 물론 경관이 좋은 곳에 위치한다. 그렇지만 정사형 정자를 조영한 근본목적이 자기성찰과 학문에 있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다만 이때 조영된 정사형 정자는 세거지 가까이 자리 잡고 있었으나 생활근거지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점은, 안동정자의 전형인 거주지 밀착형 정자로 바뀌는 과도적 단계로 보인다. 이것은 도산서당의 경우처럼 일단 세거지에서 벗어나는 것이 전제된 별도의 자연친화적인 공간으로서 체류형 정자를 선호했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세거지에서 떨어진 체류형 정자는 수기(修己)공부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그 정자가 교류나 교육의 기능까지 떠맡기 위해서는 숙식이 해결되지 않으면 안됐다. 도산서당은 높은 명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초기 목적과는 달리 다양한 기능을 하게 되었지만 지원체계를 마련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퇴계에게 미치지 못하는 명망도와 임진왜란 후의 악화된 재정형편으로 말미암아 정사형 정자와 같은 세거지와 떨어진 개인수양의 체류형 정자를 조영하기란 쉽지 않았다. 따라서 17세기 중엽 이후 퇴계의 재전(再傳)제자(퇴계 제자의 제자)들이 조영한 정자는 안동 정자문화의 제5기에 해당하며, 거주지 밀착의 체류형 정자로 나타난다. 김성일의 제자인 경당 장흥효의 ‘광풍정’이 여기 해당되나, 이후부터는 거주지 밀착형 정자는 다시 세거지 일체형 정자가 되는데, 예컨대 종택의 사랑채가 정자의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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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휴정 |
▲ 체화정 |
18세기 후반 이후에 조영되는 제6기에 해당하는 안동의 정자는 세거지 밀착형 혹은 세거지 체형에서 다시 밖으로 분리되는 경향을 보이면서 안동의 정자는 형태와 기능면에서 다양하게 분화된다. 이와 같이 조선 후반기의 정자형태의 변화와 발전은 대동보의 유행으로 조상을 선양하는 풍조와 함께 여러 가지 형태로 조영되는데, 일부 남아있는 기록을 근거로 풍류형 정자의 경관지에 안동의 특징적인 정자 형태인 체류형 정자를 중건하는 바람에 안동 지역의 정자가 마치 과거부터 체류형 정자였던 것처럼 착각하기 쉬운 것이다.
- 글쓴이 : 이효걸
- 국립안동대학교 한국문화산업전문대학원장 저서로는『중국의 종교와 철학』(2007, 방송통신대학출판부),『인물로 보는 한국의 불교사상』(2004, 예문서원),『천등산 봉정사』(1999, 지식산업사),『논쟁으로 본 불교철학』(1998, 예문서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