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소리가 들려 새벽에 잠에서 깨어났다. 가만히 귀기울여보니 정원에 심어놓은 나뭇잎을 두드리는 빗소리다. 마치 종이 위에 모래를 뿌리는 것처럼 조용히 들린다. 이제 드디어 봄이 왔구나 생각하니 방안의 찬기운도 많이 누그러진 것 같다. “이제 곧 나무에 싹이 트겠군.” 이런 생각을 잠시 하다가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다.

얼마나 잠에 빠져있었을까. 눈을 다시 떠보니 방 안에 따스한 빛이 가득하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아직 비가 내리고 있다. 그 비에 젖은 나뭇잎들이 반짝거린다. 잎 끝에는 빛의 물방울이 맺혀있다. 나무의 밑둥치 부근에는 물웅덩이가 생겨 나무가 거꾸로 반영되고 있다. 보이지는 않지만 짹짹거리는 참새소리가 마치 물웅덩이 속에서 피어오르는 것 같다.

갑자기 빗속을 걷고 싶어져서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선다. 우산에 똑똑 떨어지는 빗소리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분 좋다. 나는 뜰로 나와 집 주위에 있는 밭 사이를 빠져나와 천천히 걷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목초지의 풀이 파도가 일렁이는 듯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냉이의 앙증맞은 흰 꽃이 마치 물보라처럼 보인다. 눈에 띄게 나무가 줄어든 밀감 밭 군데군데보이는 고목(枯木)이 기둥이 부러진 난파선 같다. 이 모든 것이 엷게 끼어있는 안개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 나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몽환적 기분이 되었다.

‘ㄱ’자로 구부러진 모퉁이를 막 돌았을 때였다. 눈앞에 붉은 색 덩어리가 떨어져있다. 걸음을 멈춰보니 동백꽃이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다. 노란 암꽃술이 선명하다. 위를 올려다보다보니 화려한 꽃잎이 비에 젖어 더욱 아름답다. 막 떨어진 동백꽃을 한 송이 주워들었을 때 꽈릉 천둥이 울렸다. 봄의 우레다. 봄비는 새싹의 잠을 깨운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봄날의 우레는 죽은 말도 소생시킨다고 한다.

모든 생명이 활력을 되찾는 봄. 인간의 몸 안에도 생기로 가득한 힘이 넘치는 계절이기도 하다. 다만 인간의 생기에 비해 자연의 생기가 더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인간이 갑자기 우울해지거나 돌출행동을 하는 것이 봄의 신비로운 힘 때문일까. 이런 상태를 “정신이 이상해진다.”고 말한다. 즉 자연의 생기를 대하면 인간이 이상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역시 자연의 생물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넘치는 생명에 기뻐해야할 봄인데 왠지 우울해져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춘수(春愁)’라고 표현한다. 춘수란 봄이 오면 괜스레 마음이 설레거나 마음을 둘이 곳 없는 것처럼 느끼는 뒤숭숭한 시름을 말한다. 말할 수 있으니 좋다고 해야 하나. 이런 일 저런 일을 곰곰이 생각하는 것도 봄에 찾아오는 시름이 어느새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기 때문일까.

뇌리에 공자의 『논어』한 구절이 스쳐지나갔다.
哀而不傷. 슬픔으로 인해 아파하지 마라.
‘어떤 슬픈 일이 있더라도 마음만은 상하지 않게’ 라는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다.

哀而不傷. 이 봄, 마음속에 꼭 간직하고 싶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