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이효걸_안동의 정자 기행]기록으로 살펴본 안동의 정자 개관 1
- 이효걸
기록으로 살펴본 안동의 정자 개관 1
안동의 역사문화유산 가운데 크게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정자다. 도산서원이나 하회마을이 너무 잘 알려져 있어 안동의 다른 문화유산을 눈여겨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안동은 전국에서 정자가 가장 많은 곳이다.『한국민족대백과사전』의 ‘누정’이라는 항목을 보면, 조선 중종 때 완성된『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국의 누정 885채가 소개된다. 이 가운데 경상도가 263채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전라도 170채, 평안도 100채, 충청도 80채의 순이다. 또 1995∼1997년 사이에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조사한『문화유적총람』에 의하면, 전국의 누정 609채 가운데 경북이 173채로 압도적으로 많다. 이어서 경남이 98채, 전남이 83채, 강원도가 50채의 순서다.『문화유적총람』은 전국에 걸쳐 누정이 10채 이상인 16개 지역을 따로 표시하여 비교하고 있는데, 안동이 41채로 단연 으뜸이고 그 다음 서울의 종로가 32채다. 종로가 과거에 조선의 권력이 집중된 경복궁 바로 인근지역으로 조선 최고의 문화를 꽃피웠던 명문세가가 살았던 곳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지방인 안동에서 서울 중심지에 버금가는 지방문화를 독자적으로 키웠음을 알 수 있다.
16개 지역 가운데 안동 다음으로 영주가 22채, 경주 21채, 강화 20채, 거창 19채, 정읍 18채, 봉화 16채의 순이다. 안동의 41채 누정 수는 서울 43채, 경기 45채, 충북 38채, 충남 19채, 전북 13채와 비교하면 한 지역임에도 일개 도(道) 전체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많다. 안동(1위)·영주(2위)·봉화(7위)는 전국에서 누정의 수가 세 번째로 많은 전라남도 전체와 비슷할 정도로 누정문화가 발달한 지역이다. 이 세 곳은 현재 행정단위는 별개지만, 과거 조선시대의 문화권 단위로 보면 혈연·학연으로 얽힌 문화적 동질성이 매우 높아 단일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남아있는 안동의 누정은 영호루·청원루와 같이 누(樓)뿐만 아니라, 귀래정·삼귀정·군자정·백운정·만휴정·고산정·광풍정·낙암정·침류정·탁청정·상봉정·반구정·북정·체화정·침락정·읍청정·만우정·읍취정·동호정·약계정·취규정·파산정 등과 같은 정(亭), 석문정사·겸암정사·빈연정사·원지정사·옥연정사·월란정사 등의 정사(精舍), 애일당·함벽당·연허헌·명옥대·제월대처럼 당(堂)이나 헌(軒) 혹은 대(臺)로 표현되는 것까지 모두를 포함한다. 이처럼 명칭은 각각 다르지만 모두 누정(樓亭)이라고 하는 까닭은 누정에는 다양한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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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산정 |
▲ 고산정 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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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정 |
▲ 북정 현판 |
루(樓)와 정자(亭子) 등을 모두 누정이라 부르게 된 것은, 두 건물의 기능이 ‘경관을 조망하는 일시적 공간’이라는 공통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누는 기둥을 높이고 벽체를 없애 멀리 경관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든 2층 이상의 건물 형태를 말한다. 경관을 멀리 볼 수 있다는 것은 같아도 그 살핌이 경계·정찰일 수도 있고, 경계심 없이 느긋하게 경관을 감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각(樓閣)이 대개 관(官)에서 조영되고 성벽의 문에 세워진 문루(門樓)가 다수인 것은 정찰이나 방어적 경계의 기능이 많았음을 뜻한다.
그러나 평상시 문루는 신분이 높은 자에게는 경관감상이라는 유흥을 즐길 수 있는 역할이 더 많았을 것이다. 경회루를 비롯한 궁궐 안의 많은 누각이나 안동의 관풍루(觀風樓; 안동부 객사 옆에 있었음)가 아예 경계·정찰의 기능보다 유흥·휴식·회합의 공간으로 따로 조영된 사실로 볼 때, 상당히 일찍부터 누각의 기능이 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공간의 폐쇄성을 엄격하게 지켜야하는 궁궐의 경우는 유흥과 휴식을 위한 누각을 만들기 위해 주변 경관까지 인공적으로 조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방관청의 경우는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유흥·회합을 위한 누각을 관아 인근에 있는 빼어난 경관지역에 조영하기도 한다. 소위 영남의 3대 누각에 속하는 진주의 촉석루와 밀양의 영남루, 그리고 안동의 영호루가 그러하다.
▲ 영호루 전경
▲ 영호루 현판
경계·시찰을 위한 관아의 누각이 점차 유흥·휴식·회합의 공간기능으로 바뀌자, 민간 차원에서도 그런 기능을 할 수 있는 소규모 공간을 조영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조선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들기 시작한 15세기 중엽 무렵에는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과 경제력 여력은 물론, 詩·書·畵라는 재능까지 겸비한 지식인들이 정자(亭子)를 조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안동의 정자 가운데 김영수(1446∼1502)가 조영한 풍산의 삼귀정, 배환(1378∼1448)이 남후 단호리 낙동강 절벽에 조영한 낙암정, 김계행(1431∼1517)이 길안 묵계에 조영한 만휴정, 이화(1421∼1488)가 풍산에 조영한 침류정은 모두 중앙관료로 활동하다가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안동의 초기 정자이다.
그런데 안동의 초기 정자들 가운데『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것은 삼귀정(三龜亭)이 유일하다. 삼귀정과 함께 기록된 것은 16세기 초에 조영된 귀래정뿐이며, 오히려 관아에서 지은 것으로 보이는 누정인 모은루(慕恩樓)·망호루(望湖樓)와 영춘정(迎春亭)·영은정(迎恩亭)의 기록이 보인다. 1608년에 완성된『영가지』3권「누정」항목에는 앞에 나온 누정과, 진남문루(鎭南門樓)·임청각(臨淸閣)·반구정(伴鷗亭)·침벽루(枕碧樓) 외에도 35채의 정자 이름이 더 나타난다. 안동의 초기 정자 가운데 15세기에 조영된 것으로 알려진 낙암정과 만휴정은,『신증동국여지승람』은 물론이고『영가지』에도 그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영시기에 대해 의문점이 없지 않다. 아마 초기에는 자주 내왕하고 머물렀던 초옥 같은 작은 규모였으나 뒷날 후손이 그 뜻을 기려 정자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안동의 누정에 관한 이 두 기록은 15세기 중반에 조영되기 시작한 누정이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유흥·휴식·회합이 목적인 누정으로 점차 그 기능이 바뀌고 있음을 알려 준다. 이러한 기능의 누정은 지방관청이나 민간을 막론하고 매우 활발하게 조영되었다. 당시 안동 지역은 지식인들이 빈번한 교류를 통해 서서히 독자적 지방문화를 구축하고 있었음을 누정의 조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특히 두 기록에는 안동의 누정 가운데 ‘영호루’와 ‘관풍루’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데, 누정의 유래와 명사들의 누정방문 시(詩)인 누정제영(樓亭題詠)뿐만 아니라, 민간에서 조영한 정자인 ‘삼귀정’과 ‘귀래정’의 누정제영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관루(官樓)로서는 영호루(映湖樓), 민간 조영의 정자로서는 삼귀정과 귀래정이 안동의 누정을 이해하는 첫 걸음임을 시사한다.
영호루와 관풍루, 삼귀정과 귀래정에 편액(혹은 기록)으로 남아있는 명사들의 누정 시(詩)는, 누정이 겉보기로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즐기는 일시적인 인문학적 놀이공간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 속에 감추어진 것은 상시적인 ‘지적 교류를 통한 가치관의 연대(連帶) 혹은 결속’이다. 누정의 편액으로 남아있는 제영 시를 두고 혹자는 시적 표현을 통한 ‘동시대의 문학적 교류집단’을 의미하는 시단(詩壇)의 형성으로 보고 있다. 그렇지만 누정의 제영 시는 차운(次韻)의 형식으로 누대에 걸쳐 지속된 것으로 볼 때, 동시대적 교류보다 가치관의 통시적 계승이라는 역할이 더 컸다.
▲ 삼귀정
▲ 삼귀정 현판
그렇기 때문에 사설(私設) 정자는 재력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조영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회적 지위는 물론이고 지적, 문학적 역량과 함께 광범위한 교류를 통해 지역 지식인들과의 묵시적 공감대를 얻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러한 사실은 누정이 여력 있는 지식들의 단순한 ‘유흥상경(遊興賞景; 경관을 즐기며 교유하는 놀이)’의 공간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혈연이나 학연의 고리가 없어도 상호교류를 원할 때, 풍취 있는 경관을 함께 즐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정자에 초대하거나 스스로 방문 의사를 피력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누정의 중요한 기능이 자연스러운 인적 교류의 매개체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608년에 출간된『영가지』의 누정에 검제 학봉종택 앞에 있었던 ‘압각정(鴨脚亭)이 나온다. 이 마을에는 오리발처럼 벌어진 큰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압각정이라는 정자는 건물이 있었던 게 아니라 마을사람들이 모여 정담을 나누던 큰 은행나무를 가리켰던 것이다. 검제마을에 살았던 권예의 후손인 권태시(1635-1719)가 쓴「압각정기」에도 같은 기록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모여 함께 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 은행나무 자체를 ‘정자’로 본다는 것은, 정자의 기능이 경관감상에 있다기보다 사람들과의 교류에 있었음을 잘 나타내준다.
1530년에 완성된『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안동의 누정이 9채에 불과하던 것이 1608년에 출간된『영가지』에는 무려 45채로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이것은 16세기 후반부에 퇴계학파가 형성된 것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퇴계학파의 형성 이전인 16세기 전반부에 조영된 누정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귀래정, 애일당, 임청각, 반구정, 선유정 정도다. 그러므로 이 다섯 채가 안동의 누정 역사의 제2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귀래정, 임청각, 반구정은 모두 고성이씨의 안동 입향과 정착과정에서 조영된 것으로, 안동의 정자에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해주었다. 퇴계의 동향선배로서 강호시단의 비조(鼻祖)라고 할 수 있는 농암 이현보의 애일당과, 퇴계와 동갑내기로 의성김씨 내앞파의 기틀을 다진 청계 김진의 선유정 또한 안동의 활발한 누정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안동의 정자문화를 독특하게 만든 것은 안동의 누정문화 제3기에 해당하는 16세기 후반부에 조영된 일군의 정자들이다.
학봉·서애 등 퇴계의 1대 제자들이 안동의 여러 거점으로 흩어져 혈연·학연을 통해 퇴계학파를 분산적으로 발전시켜가면서 누정의 조영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명망 있는 퇴계의 제자들은 자신의 세거지에 퇴계학통의 계승을 표방하면서 종택·사당을 통해 혈연적 연대성을 강화하고, 서원을 통해 학연을 확장시키며 분파의 거점을 구축해나갔다. 이와 같이 퇴계학파가 각개약진하면서 분파 내부를 결속·강화하는 한편, 외부와 종적·횡적 연대를 자연스럽게 꾀하기 위해 누정의 조영이 필요했을 것이다. 퇴계학파의 분파적 발전과정은 퇴계학파의 권역을 경북 북부지역 전역으로 점차 외연을 넓히고 동시에 확장된 지역 간의 교류와 유대를 위해 여러 곳에 지역적 교류공간인 정자의 필요성도 증대했던 것이다. 퇴계학파의 광범위한 권역 간의 자유롭고도 빈번한 교류를 위해서는 엄정한 교육이나 제사보다는 정자에 모여 자연경관을 함께 즐기면서 시 모임(詩會)과 같은 여유로운 지적 교류가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안동의 누정문화가 갖는 모습에는 이런 배경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동의 누정문화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안동의 정자가 ‘체류형 정자’라는 점이다. 누정이라는 건물의 형태적 특징은 벽채를 없애버리고 기둥만 남겨 외부를 조망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따라서 누정은 숙식을 할 수 있는 방 중심의 거주형 건물이 아니라, 별도로 마련된 마루 중심의 일시적 휴식공간이다. 그러나 안동의 정자는 마루 중심의 정자가 아니라 거주할 수 있는 방을 결합시켜 거의 모든 정자를 체류형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물론 안동 이외의 지역에서도 마루 중심의 정자에 방을 결합시킨 예는 적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안동처럼 성리학이 지방에 뿌리내린 다음에 나타난 것으로, 안동의 체류형 정자의 조영 배경과 대체로 비슷하다. 다만 안동의 누정문화에는 이러한 특징이 보편적이며 일관된다는 점과, 이런 특징을 선도적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과 다르다.
그렇다면 안동의 누정문화는 왜 이러한 특징을 보일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그것은 경북 전역으로 확장한 퇴계학파의 분파적 발전과 깊은 관련이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대를 이어 지속적으로 발전한 퇴계의 후인 학자들이 넓은 지역에 크고 작은 거점들을 여러 곳 마련한 다음에 퇴계학파끼리 빈번한 교류를 위해 정자를 조영했다면, 광범위한 지역 간에 교류하기 위해 왕래하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고, 동시에 심도 있는 퇴계학적 가치관의 공유에도 일정한 시간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지적 교류는 단순히 자연경관에 대한 시적 감흥의 교유에 그치지 않고, 시를 통해 퇴계학의 심오한 가치관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시 한수로 흥취를 나누는 것뿐만 아니라, 때론 며칠을 한 곳에 함께 머물면서 지적 교류를 통해 삶의 태도를 공유하고자 했던 것이다.
- 글쓴이 : 이효걸
- 국립안동대학교 한국문화산업전문대학원장 저서로는『중국의 종교와 철학』(2007, 방송통신대학출판부),『인물로 보는 한국의 불교사상』(2004, 예문서원),『천등산 봉정사』(1999, 지식산업사),『논쟁으로 본 불교철학』(1998, 예문서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