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남효선_동해연안의 문화여행]초매식(初賣式) 의례
- 남효선
초매식(初賣式) 의례
“지발 고기 좀 많이 나서 잘살게 해주소”
죽변수협, 임진년 첫날, 초매식 지내며 풍어 기원
초매식은 '관이 주도하는' 수산물 유통의례
임진년 새 해 첫날, 예년과는 달리 뿌옇게 흐린 날씨에 칼바람마저 불었습니다. 신묘년 마지막 날, 동해안을 제외하고 호남 지방과 충청도 전역에는 구름이 덮이고 흐려 임진년 새해 일출을 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일기예보 탓인지 죽변항을 비롯하여 동해 연안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해맞이 인파로 북적였습니다.
임진년, 새해 첫 해가 떠오르기 전 새벽 7시, 여명이 채 밝기 전에 죽변항으로 갔습니다. 임진년 풍어를 기원하는 ‘초매식’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올 첫 해는 7시38분경에 떠오를 것이라고 기상청이 예고한터라 풍어를 바라는 초매식과 새해 첫 일출도 함께 볼 수 있는 일거양득의 기회였습니다.
죽변항에 있는 위판장에는 수협 관계자와 어민들이 초매식을 하기 위해 고사상 앞에 무리지어 빙 둘러 서 있었습니다. 한해의 풍어를 기원하는 첫 의례를 치르는 어민들의 얼굴에서는 사뭇 긴장감이 묻어나옵니다. 고사 상에는 잘 생긴 문어와 울진대게, 대구, 방어, 가자미 등 죽변 앞바다에서 많이 잡히는 고급 어종과 붉은 시루떡이 시루 채 놓였습니다. 고사상에 빼놓을 수 없는 잘생긴 돼지머리도 있습니다. 물론 과일과 술도 진설됐습니다. 검푸른 바다가 희뿌옇게 열리는 새벽 7시 경, 초매식에 참석할 어민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습니다. 모두 죽변항에서 평생을 보낸 어부들입니다.
초매식은 말 그대로 ‘그해 첫날에 잡은 고기를 처음 경매에 붙이는 의식’입니다. 초매식은 죽변수협 조합장의 초헌(初獻)으로 시작됐습니다. 동해 연안 죽변 지방에는 풍어를 기원하는 의례가 다양하게 전승됩니다. 동해안 별신굿과 영등제, 뱃고사, 초매식 등이 그것입니다. 이 중 별신굿과 영등은 죽변 지방을 비롯한 동해 연안의 대표적인 민속이자 바다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풍어제의(豊漁祭儀)입니다. 또한 집단제의로 행해지기 때문에 축제이기도 합니다.
이들 제의의 주체는 어부들입니다. 제의의 양상은 지역별로 조금씩 다르지만 별신제의 경우, 무격(巫覡)에 의해 주도되는 오신(娛神)굿의 형태를 띱니다. 바다를 관장한다고 여기는 ‘바다의 신’인 용을 즐겁게 하여 풍어를 기원하는 어민들의 소망이 담긴 엄숙한 제의이자 축제인 것입니다.
별신과 영등, 뱃고사가 일차적 생산담당자인 어민들이 주도하는 것이라면 초매식은 ‘관이 주도하는 의례’입니다. 특히 초매식은 수산물의 유통을 책임지는 수협과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중매인’들이 주도하여 치르는 ‘수산물 유통의례’입니다. 물론 한해의 풍어를 기원한다는 점은 같습니다.
초매식의 절차는 유교와 민간의 제의가 혼합된 형태입니다. 초헌, 아헌, 종헌이 선정되고 상차림 또한 유교식 진설에 따른다는 점에서는 유교적 제의에 가깝지만, 상 위에 돼지머리가 오른다는 점에서는 다분히 무속적이기 때문입니다.
수협직원과, 중매인들과, 선주들과, 어민들이 차례로 재배를 한 뒤, 마지막으로 죽변수협장이 수협의 소지와, 중매인, 어민들의 소지를 올리며 풍어를 기원했습니다. 소지가 불꽃을 달고 연처럼 하늘로 오르자 어민들은 “소지가 잘 오른다”며 박수를 쳤습니다. 수협 직원이 고사상에 오른 제물을 골고루 한 조각씩 떼 내어 참종이에 담아 바다에 던졌습니다. 바다를 관장하는 용신에게 바치는 유식의례입니다.
최근 ‘초매식이 일제강점기에 관의 주도로 처음 시행된 권위주의적 잔존물’이라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차츰 사라지는 추세입니다만, 매년 새해 첫날이면 어민들이 모여 풍어를 기원하고, 한해의 경매를 처음 시작하는 의미를 담은 의식이라는 점에서 어민들에게는 매우 각별한 의례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어민들 언 가슴 데우는 화톳불 위로 첫 해 “둥실”
잘생긴 대게 뭍으로 풀어놓는 어부의 얼굴에 웃음 “가득”
초매식 첫 경매가 순조로워야 풍어가 든다고 어부들은 믿고 있습니다. 이날 초매식 첫 경매에는 울진대게와 복어와 대구와 오징어가 올랐습니다. 모두 죽변항을 살찌우고 어부들이 생계를 꾸릴 수 있게 해주는 주요 어종들입니다.
초매식 의례가 끝나고 임병옥 죽변수협장이 첫 경매를 알리는 종을 세 번 쳤습니다. 그러자 중매인들이 앞 다투어 경매장으로 달려왔습니다. 울진대게는 20만원에 낙찰됐고, 복어는 30만원에 낙찰됐습니다. 죽변수협의 경매방식은 매우 독특합니다. ‘후다(덮개라는 뜻의 일본어)’라고 부르는 손바닥 크기의 얇은 나무판에 백묵으로 단가를 써넣어 경매인만 볼 수 있도록 건넵니다. 그러면 경매인은 이 중에 가장 높은 단가를 써 넣은 중매인에게 낙찰하는 방식입니다. 최고가 입찰제인 셈이지요. 울진대게 다섯 마리가 20만원에 낙찰되자,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12월부터 이듬 해 5월까지 죽변항은 대게 철입니다. 매일 아침 7~8시경, 죽변항에 오면 살아 꿈틀거리는 ‘울진 박달게’의 위용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날 초매식 경매에서 대게가 고가로 낙찰되자 어부들은 올해도 대풍이 들 것이라는 기대로 한껏 기분이 고조되었습니다. 초매식과 경매를 무사히 치룬 어부들은 ‘화톳불을 지펴’놓고 위판장에 빙 둘러 앉아 음복을 나누었습니다. 어부들이 음복을 나누는 사이, 밤새 그물을 건진 자망 어선 한 척이 새벽을 헤치며 미끄러지듯이 죽변항으로 들어왔습니다. 살아 꿈틀거리는 잘 생긴 대게가 가득 실려 있었습니다. 살아 꿈틀거리는 대게를 뭍으로 풀어놓는 어부의 골 패인 얼굴에 웃음이 가득합니다.
수협 중개인이 경매인을 부르는 작은 종을 흔들었습니다. 그러자 음복을 서로 나누던 중매인들이 첫 경매에 참여하기 위해 일제히 종소리 곁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죽변항을 지키는 어민들이 ‘후다’를 건네는 힘찬 손길 위로, 어민들의 가슴을 덥혀주는 화톳불 위로 임진년 둥근 해가 죽변항의 새벽을 밀며 둥실 떠올랐습니다.
- 글쓴이 : 남효선
-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안동대학교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공부하였다. 1989년 문학사상의 시 부문에서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하였다. 한국작가회의, 경북작가회의, 안동참꽃문학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둘게삼』이 있다. 현재 시민사회신문의 전국본부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