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최혜란_자연의 길에서 사람의 삶을 찾다]하회마을에서 병산서원 가는 길
- 최혜란
하회마을에서 병산서원 가는 길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걷기’, ‘순례길’을 검색해보면 100권이 넘는 책 목록이 한꺼번에 뜬다. 국내에서 명성이 자자한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을 제외하고도 우이령길, 평창 마을길, 서울 성곽길을 비롯해 각 지방자치단체마다 ‘길’만들기가 유행이다.
언젠가부터 취미를 적는 난에 ‘걷기’라고 적게 되었다. 살아가는 동안 기회가 주어진다면 많은 곳을 내 두 발로 디뎌보고 싶다는 소망을 품은 지 오래이다. 2006년 국내의 한 여행가가 무려 850km에 이른다는 스페인의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를 다녀와 한 신문에 연재하다가 책을 냈다. 잠들기 전 그 책을 읽을 때 마다, 한 줄 한 줄 함께 걷는 마음이었으며, 틈나는 대로 작가의 홈페이지와 그 길을 다녀왔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찾아 읽었다. 아주 아주 먼 훗날이 기록된 내 인생의 달력을 가끔 들춰보며 어느 시점에 내게 그런 시간을 선물할까 계획을 세워보곤 했다. 나도 언젠가 저 길을 걸으리라는 바람을 마음속에 품고.
하지만 10년 동안 열심히 일한 내게 스스로 안식년을 주었을 때 나는 선뜻 그 길 위에 오르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유명한 길을 찾아 걷는다는 것에 대한 의미가 내 마음에서 차츰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10년 만에 고향 안동에 다시 돌아와 시간 날 때마다 찾아다닌 곳에는 그 어느 곳보다 고요하고 아름다우며, 무엇보다 선조들의 발자취와 마음의 표현이 어려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 땅의 길을, 가능하다면 고을고을 모든 곳을 이 두발로 찾아다녀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이왕이면 부족한 솜씨지만 기록으로도 남겨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첫 장소로 하회마을에서 병산서원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11월 마지막 주말 아침 6시 30분. 영하의 날씨에 차가 꽁꽁 얼어있다. 이른 아침 하회마을을 둘러보고 병산서원까지 걷겠다고 마음먹은 날이다. 차 유리의 성에가 걷히길 기다리는 동안 시린 손을 비비며 부산을 떤다. 아직 밖은 어둠 속에 잠겨있다.
7시쯤 풍산 읍내를 벗어나 소산마을을 지날 무렵 서리 내린 들판 저 편에 보이는 화산 위로 해가 떠오른다. 들판에 내린 서리를 보는 것도 아주 오랜만이지만 해 뜨는 것을 보는 일은 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가 찬 공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셔터를 연신 누른다. 온 몸에 찬 공기가 느껴지지만 싫지가 않다.
하회마을에 도착해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고 병산서원으로 가는 길로 들어서 공터에 차를 세운다. 본격적으로 길을 걷기 전, 끓여 온 커피를 마시며 차 안에서 언 몸을 녹인다. 장갑에 모자까지 채비를 단단히 하고 카메라를 챙겨들고 유교문화길이라고 표시된 병산서원으로 가는 이정표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나지막한 오르막길의 좁은 시멘트 포장길로 이어지던 길은 다시 흙길로 이어진다. 차 한 대가 간신히 다닐 수 있을 만한 폭의 도로는 걷다보니 점점 좁은 오솔길로 바뀌었다. 그 길 오른편으로 보이는 화산이 아침 안개에 둘러싸여 신비롭고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병산서원 3km, 큰고개당 4.1km라는 이정표가 나오고 한동안 흙길이 이어진다. 그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다보니 저 멀리 흐르는 낙동강이 보인다. 이윽고 고개 마루에 올라서자 눈앞에 감탄이 저절로 나오는 멋진 풍경이 나타난다. 굽이도는 낙동강과 눈앞에 병풍처럼 펼쳐진 산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그 성정을 웅혼하게 드러낸다. 멀리 바라보이는 산허리에는 병산으로 가는 길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몸과 마음이 탁 트일 것 같은 신선한 아침 기운을 온 몸으로 느낀다.
유교문화길을 조성하며 다져놓은 비교적 넓은 길을 걷다가, 산자락을 휘감는 오솔길을 걷다가, 잎이 달리면 있는 그대로도 절경인 풍경을 오히려 가릴법한 외래종 단풍나무 식재작업이 한창인 것을 비난하기도 했다가, 그 시린 겨울 기운에도 윤기가 나는 푸른 잎을 지닌 몇몇 나무를 보며 감탄하다가, 짧은 노래를 읊조리기도 하며 병산에 도착하니 화악서당이 나를 반긴다. 서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제법 규모가 크고 단아한 느낌이 드는 서당이다. 학교를 지어 후학을 양성하고 싶어 했던 선조의 유언을 후손들이 받들어 지은 서원이라고 한다. 서당 안을 볼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담 너머로 보는데 만족하고 발길을 병산서원으로 돌린다.
병산서원은 잘 알려진 것처럼 고려시대 때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이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을 1572년(선조5)에 서애 류성룡 선생이 지금 자리로 옮겨 짓고 직접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선생의 문집을 비롯해 각종 문헌들이 소장되어 있다. 1607년 선생이 돌아가신 뒤 제자들과 유림이 뜻을 모아 1613년(광해군 5년)에 사당(존덕사)을 창건하고 위패를 모시고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며 지금까지도 매년 3월과 9월 중정(中丁：두 번째 丁日)에 향사를 올린다.
9시가 채 안된 시간이라 서원의 문은 닫혀있었다. 너무 일찍 와서 오늘 서원 안에는 못 들어가 보고 그냥 돌아가야 하나 싶어 서운한 마음이 드는 찰나,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문이 열린다. 어느 책에도 소개된 적이 있는 서원 관리인이시다.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아침 일찍 문을 열어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니 어디서 왔느냐, 언제 출발해서 벌써 여기에 도착했느냐며 물어보는 말씀이 더 많으시다.
여러 번 병산서원을 찾았지만 오늘 아침처럼 아무도 없을 때 조용히 둘러볼 기회는 한 번도 없었기에 일찍 문을 열어 주신 분께 일일이 대답하기보다 어서 빨리 고요한 이 공간을 둘러보고 싶은 욕심이 더 크다. 그러나 이른 아침 서원의 고요함은 채 5분도 안되어 깨진다.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안으로 들어온다. 오늘같이 추운 날 이 시간에 병산서원을 찾는 이가 없을 거라는 착각과 기대가 보기 좋게 빗나간다.
그래도 지금껏 찾았던 시간 중 가장 이른 시간의 병산서원을 열심히 사진으로 담는다. 오늘은 복례문 앞에 줄 지어 서있는 배롱나무보다는 서리를 덮어쓴 땅위에 납작하게 붙어있는 이름 모를 풀에 더 마음이 가서 그 풀이 밟히지 않도록 조심하며 걷는다. 온 몸에 덮어쓴 서리마저 돋보이게 하는 생명의 위대함이 느껴진다.
좀 떨어져서 아침 햇살에 더욱더 기둥을 밝게 드러낸 만대루를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환해진다. 드리운 나무 기둥의 그림자에서조차 빛이 느껴진다. 서원 뒤로 화산 2.1km라는 푯말을 보며 올라갔다 올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다음에 다시 찾기로 하고 오던 길을 되짚어 하회마을로 돌아온다. 갔던 길을 다시 걸어도 역시 그 밝은 기운과 아름다운 풍광이 주는 기쁨은 여전하다. 병산서원으로 향할 때는 하회마을을 등지고 걸었지만, 돌아오는 길은 너른 들을 앞에 품고 하회마을을 바라보니 관광객들로 북적대는 박제된 하회마을이 아니다. 농터를 곁에 두고 군불 연기를 피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기가 만드는 살아있는 마을 하회를 새삼스럽게 느낀다.
- 글쓴이 : 최혜란
- 살아가는 동안 지구별의 곳곳을 눈으로 보고 두 발로 디뎌보고 싶은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