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황구하_시로 거니는 상주]누에의 꿈
- 황구하
장맛비가 며칠 오락가락하더니 기어이 오늘밤은 천둥번개까지 동원한 거센 빗줄기가 마구 퍼붓고 있습니다. 컴퓨터 글 작업을 잠시 멈추고 거실에 나와 앉아 시끄러운 맘을 달래봅니다. 다른 등을 모두 재우고 거실 한쪽 작은 등 하나만 깨웠습니다. 한지공예를 하는 친구가 만들어 준 누에고치 모양의 등이지요. 이 등을 켜면 저는 5령의 잠을 자는 누에가 된 것처럼 수굿해집니다. 그리고 그 고요함 속에 무한한 변신이 콩닥콩닥 진행되는 야릇한 흥분에 휩싸이기도 한답니다.
며칠 전에 보았던 누에들이 생각납니다. 제가 근무하는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앞마당에서였지요. 점심을 먹으러 나가다가 전시부스에 걸려 바람결에 살랑이는 황금빛 명주 수의를 보았습니다. 마치 커다란 나비가 잠시 숨을 고르며 파르르 날개를 떠는 것처럼 눈부셨지요. 저절로 발길이 끌려 가보니 뽀얀 젖빛 누에들이 뽕잎을 갉아먹으며 꼬물꼬물 인사하고 있었습니다. 농잠인의 행사가 열리고 있었는데 명주 옷감뿐만 아니라 누에와 관련된 상품(식품, 건강보조식품, 비누, 종이 등)과 뽕잎 ․ 뽕나무열매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더군요. 그러고 보니 누에가 인간에게 선사하는 것이 참으로 엄청납니다.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3천여 년 전 기자조선 때부터 뽕밭을 일구어 누에를 치고 비단을 짰다고 합니다. 그 후 삼한과 고려를 거치는 동안 역대 왕들이 장려하고 발전시켰다고 하는데요. 조선시대 태종11년에는 후비친잠법(后妃親蠶法)을 제정하여 왕후로 하여금 궁중에서 누에를 치게 하고, 세조1년에는 종상법(種桑法)을 제정 공포하여 뽕나무를 대호(大戶) 300그루, 중호(中戶) 200그루, 소호(小戶) 100그루, 빈호(貧戶) 50그루씩을 심게 하였다고 합니다. 잘못 가꿔 뽕나무를 죽게 한 농가는 벌을 주기까지 하였다네요.
▲ 경북 상주시 은척면 두곡리 뽕나무
경북대학교 상주캠퍼스의 전신인 상주농잠학교는 1921년에 설립되었는데 ‘농잠’으로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학교였습니다. 또 경북 상주시 은척면 두곡리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뽕나무가 있답니다. 약 350년 수령의 이 뽕나무는 경상북도 지방문화재기념물 제1호로 높이 약 12미터, 가슴둘레 2.7미터, 수형전체의 지름이 20미터가 넘는 아주 큰 나무입니다. 인조(1623~1649) 때에 국가적으로 뽕나무 재배를 권장하였다고 하는데 이 나무도 그때 심어진 걸로 추측합니다. 고려말기 “뽕나무를 빈아(豳雅)에 기록한 것은 의상(衣裳)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桑記豳雅, 衣裳之本也).”라는 이색(李穡)의「육익정기(六益亭記)」내용으로 보아 상주는 그 전부터 뽕나무를 숭상하고 재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에고치의 본고장이라 자랑하는 상주의 오랜 양잠역사와 전통을 입증해 주는 셈이지요.
풀과 나무 향기에 휩싸여 바람 내음까지 고소해지면 얼굴이 발개집니다 살금살금 소리 죽이며 호젓한 산길 어느 풀섶 속 맨살로 눕고 싶었습니다 귀를 열어 살뜰히 당신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시냇가 하얗게 빨아 말리던 광목 홑청 사이로 절렁절렁 눈물이 흐르면 오래된 나무에 숨어버린 햇살도 부를 수 있었을까요 가만히 눈을 감고 구불구불 걸어온 길 펴놓으면 온몸 솟구쳐 오르던 실핏줄 천천히 따라 흐르고 수백 년 울음 건너온 꽃잎에 달빛만 서성일 뿐 다시 산과 들은 잠에 들었습니다 (……) 젖멍울처럼 싸르르 기억이 빠져 나갈 때 비로소 세상을 젓는 당신의 여린 손……조심조심 날아가세요 ― 황구하, 「잠(蠶)」전문
당신이 그러셨지요. 사람이 가장 이쁘게 보일 때는 무언가에 몰입해서 일할 때라고요. 저는 누에에게서 몰입해서 일하는 사람의 뜨거움을 봅니다. 그리고 곧 인간의 자아성장과 연결 지어집니다.
누에는 오직 뽕잎만 먹고 약 40일을 한살이로 하여 완전 탈바꿈을 합니다. 알-애벌레-번데기-나방의 과정을 지나며 계속 성장하는 것이지요. 누에가 뽕잎만 먹고사는 것은 몰입과 집중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에 몰입해서 최고의 집중력을 가질 때 저는 무엇을 하든지 신나고 즐겁습니다. 현실을 주도적으로 바꾸고 삶을 한 단계 끌어올려 줄 수 있는 가능성은 바로 거기에서 열리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일에 대한 몰입, 글쓰기나 공부, 일이나 운동 모두 이런 몰입과 집중력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즐거움을 누리고, 끊임없이 누에의 잠 같은 노력의 과정을 거치지요. 그래서 누에의 한살이처럼 자신도 알-애벌레-번데기-나방의 순환을 통해서 거듭거듭 성장하는 것이고요.
▲ 뽕잎을 갉아먹는 누에
누에는 영물(靈物)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어른들은 어디 초상집에라도 다녀오면 먼저 목욕부터 말끔히 한 다음 잠실에 들어갔고, 큰소리를 내거나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했지요. 어쩌다 제가 뽕잎을 가져다주게 되면 엄마가 미리 제 손을 씻길 정도였으니 누에는 집안의 큰 어른 이상이었습니다.
마침표 같은 까만 누에알에서 나온 개미누에에게 어린 뽕잎을 잘게 썰어 먹이는 것으로부터 여름 누에치기가 시작됩니다. 누에가 점점 자라남에 따라 뽕잎의 크기도 점점 커지게 되지요. 뽕잎을 가지째로 잘라 가져다주어도 될 만큼 누에가 크면 눈 깜짝할 사이 뽕잎은 잎맥만 남아 마치 저녁 어스름 산에서 내려다보는 아청빛 마을길을 그려놓은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지요.
손등에 올려놓으면 꼬물꼬물 손등을 간질이며 기어가는 누에 참 이뻤지요. 그러다 찔끔 물리기도 했고요. 어른들한테 꾸지람을 들으면서도 누에가 사그락사그락 뽕잎을 갉아먹는 소리 좋아 일부러 귀 기울여 듣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층층 선반에 가득 채워진 싸리잠박에서 수천수만의 누에가 한꺼번에 뽕잎을 갉아먹는 소리는 지금 저 밖에 한바탕 퍼붓는 빗소리만큼이나 소란스러웠지요. 그래도 누에가 전해주는 모든 것이 마냥 고맙고 신기한 시절이었습니다.
▲ 경상북도 잠사곤충사업장 잠령탑
경북대학교 상주캠퍼스에 잠령비(蠶靈碑)가 있고, 경상북도 잠사곤충사업장(경북 상주시 복룡동) 뜰에도 누에의 영혼을 기리는 잠령탑(蠶靈塔)이 있습니다. 이 탑 기단은 제주도 바닷돌로 쌓고, 그 위에 검은 돌로 비신을 우뚝 세웠습니다. 전면에 ‘잠령(蠶靈)’이라는 두 글자가 깊은 음각으로 하얗게 새겨져있지요. 잠종장이 대구에 있을 때 1930년 신천동에 세웠던 것을 1962년 상주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잠령비와 잠령탑이 거느린 기품과 정신이 특별한 감흥으로 다가오는데요. 매년 5월초, 아기누에가 부화할 때 처음 뽕잎을 주는 날에 올리는 제사 잠령제(蠶靈祭)는 가슴을 더욱 뭉클하게 합니다. 잠령제는 누에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면서 인간을 위해 한 생애를 온전히 다 바친 누에의 영혼을 달래주는 의식이지요. 어른들이 들려주던 누에의 애절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옛날에 잠녀(蠶女)라는 여자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이웃동네에서 그의 아버지를 납치해 갔다. 망나니 아들을 장가보내려는 행세께나 하는 집안의 강권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녀의 어머니가 잠녀의 아버지를 구해오는 사람에게 잠녀를 시집보내겠다고 말했지만 후환이 두려워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잠녀의 집에 있던 말이 쏜살같이 달려 나가 잠녀의 아버지를 잔등에 태우고 돌아왔다. 그러나 사람과 짐승이 짝을 지을 수는 없는 일, 고마운 마음에 기름진 먹이를 마련해주었지만 말은 먹지 않고 계속 울부짖었다. 이래저래 달래 보아도 말은 더욱 날뛰며 행패를 부렸다. 잠녀의 아버지는 할 수 없이 활을 쏘아 그 말을 죽였다. 그리고 말의 가죽을 벗겨서 마당에 널어 말렸다. 그런데 잠녀가 그 곁을 지날 때 말가죽이 잽싸게 잠녀를 둘둘 싸가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얼마 후 잠녀는 끔찍하게도 누에가 되어 뽕나무 위에서 뽕잎만 갉아먹고 있었다. 다섯 잠을 자고난 후 잠녀는 실을 뽑아 하얀 집을 짓고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한 애타는 한을 품은 채 겨울을 났다. 나방으로의 부활을 꿈꾸며.
당신도 잘 아시지만 상주는 ‘삼백(三白)의 고장’입니다. 삼백은 쌀, 곶감, 누에고치로 모두가 흰색을 띠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요. 상주 함창은 신라시대부터 누에고치 명주 산지로 이름난 곳이었답니다. 1970년대만 해도 전국 제1의 누에고치 생산지였는데 지금은 양잠농가가 많이 줄었습니다. 한때는 들녘을 온통 차지했을 뽕나무밭도 마찬가지고요. 더구나 오늘날에는 화려한 견직물에 밀려 명주의 수요가 줄어들어 간신히 그 명맥만을 이어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지요.
▲ 누에고치 등
그날 연구소 앞마당 전시부스를 돌아 나오는데 분홍색, 주홍색, 하늘색, 보라색 누에들이 꼬물거리는 게 보였습니다. 누에하면 으레 뽀얀 젖빛을 떠올리던 저는 혹시 몇 년 전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칼라병아리 사건처럼 누에들을 염색시킨 것은 아닌가 하여 순간 엄청 놀랐지요.
칼라누에들은 뽕잎 대신 색색의 인공사료를 먹고 있었습니다. 알에서 깬 후 5령기부터 색을 들인 인공사료를 함께 주면 애벌레는 자기 피부색과 같은 고치 속에서 2주일을 지내다 나방으로 변신한 뒤, 색깔 있는 알을 낳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색깔’은 부모 대에서 끝나고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은 다시 평범한 애벌레라고 하네요. 색을 입은 누에들은 몸만 알록달록한 게 아니라 몸 색깔과 같은 고치를 뽑아낸다고 합니다. 이제 인공염색을 하지 않은 천연색 비단실을 뽑아낼 날도 머지않은 것 같습니다. 그때는 함창 명주의 화려한 옛 시대가 전통 누에치기의 명맥과 함께 색색 아름답게 부활하길 꿈꾸어봅니다.
새벽입니다. 요란하던 빗소리 잦아들고 이제는 누에 한 마리 느긋하게 뽕잎을 갉아먹듯 사그락사그락 고요하고 맑은 소리가 납니다. 글 작업을 마저 마치고, 컴퓨터를 끕니다. 희미하게 살아있던 거실 누에 등을 내리니 불빛이 파르르 떨다가 이내 잠이 듭니다. 저도 이만 잠을 자야겠습니다. (♣)
- 글쓴이 : 황구하
- 충남 금산에서 태어났다. 영남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동양철학 전공)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2004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 『물에 뜬 달』이 있으며 현재 반년간지 『시에티카』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