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만동_영화이야기]I'm Not There
• 김만동 2009-07-13

이 영화는 밥 딜런의 전기 영화이다. 그런데도 밥 딜런은 물론, 밥 딜런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조차 나오지 않는다. 대신 쥬드 퀸(전향한 록커), 아르뛰르 랭보(시인), 잭 콜린스(포크 가수), 패스터 존(예언자), 빌리 더 키드(무법자), 우디 거스리(사기꾼), 로비 클락(대중스타), 이렇게 일곱 명의 캐릭터가 등장한다.

이 일곱 개의 이미지는 토드 헤인즈(Todd Haynes) 감독이 만들어놓은 스펙트럼을 통과하여 스크린에서 밥 딜런으로 되비치게 되는데, 감독은 ‘밥 딜런의 음악과 삶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자막으로 마치 허구를 이야기한다는 듯 딴청을 피운다. 무려 쉰 곡에 가까운 밥 딜런의 곡들을 영화 속 장면과 기막히게 맞물려 놓고도 말이다.

그런데 이 일곱 캐릭터 중에서 쥬드 퀸이 거침없고 분방하며 자기중심적인 밥 딜런의 한 단면이라면, 잭 콜린스, 패스터 존은 그의 음악적 변천과 종교적 개종의 또 다른 면을, 로비 클락은 인기인의 사랑과 사생활을 각각 보여준다. 앞의 네 캐릭터가 밥 딜런의 드러난 이미지를 보여주는 가상 인물이라면 뒤의 세 캐릭터는 그의 드러나지 않은 내면을 형상화하는 실존 인물들이다.

저 프랑스의 천재 시인 아르뛰르 랭보는 밥 딜런의 정서적 자아에 영향을 끼쳤고, 미국 개척시대의 무법자 빌리 더 키드는 밥 딜런이 음악을 맡았던 영화 ｢관계의 종말 Pat Garrett and Billy the Kid｣의 주인공이며, 포크송의 아버지로 불리는 우디 거스리는 초창기 그의 음악적 자아를 눈뜨게 한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을 각기 시인, 무법자, 사기꾼이라고 정의하는데, 사실 언뜻 고개가 끄덕여지지는 않는다. 그에게는 시인의 직관과, 무법자의 독선과, 사기꾼의 위장이 공존해 있다는 것일까?

영화가 어려워 보이는 건 “혼돈은 나의 친구다.Chaos is a friend of mine.”라는 밥 딜런의 유명한 발언과 겹친다. 토드 헤인즈의 시각 속에는 ‘대상을 철저히 분해하여 여러 측면을 동시에 묘사함으로써 사실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는 큐비즘(Cubism)과 ‘인간의 상상에 자유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저 쉬르레알리즘(surrealisme)의 눈길이 녹아있다.

영화의 오프닝은 공연장에서 열광하는 팬들의 함성에 이어, 바퀴침대 위에 누워있는 쥬드 퀸의 주검으로 열린다. I he, I'm her, not here, I'm not there, 차례차례 흑백으로 깜박이며 타이틀이 뜨면 저 멀리 오토바이 한 대가 화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사라진다. 영화의 끝 부분에서 똑 같은 장면이 배치되어 수미쌍관을 이루는데, 이때는 사고의 굉음이 희미하게 들린다. 오토바이 사고이후 대중이 기억하고 열망하던 밥 딜런은 죽었다는 선언이 아닐까?

시인이고, 예언자이며, 무법자요, 사기꾼인 스타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영화는 아르뛰르 랭보가 몇 줄의 시구로 말문을 열면 노래가 울려 퍼지고, 7개의 캐릭터가 번갈아가며 화면을 주도한다. 내레이션이 화면과 실제와 노래 가사를 얽고, 필요에 따라 인터뷰 장면이나 다큐 화면이 끼어들기도 하는데, 수시로 흑백과 컬러를 넘나든다. 그러는 사이사이 밥 딜런의 음악 인생 속 유명한 에피소드와 중의적이며 해학적인 메시지들이 숨은그림찾기처럼 배치된다.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전기기타를 들고 나와 포크 팬들을 경악케 한 장면, 불의의 오토바이사고 장면, 포크의 대부 피트 시거의 도끼 사건과 영국 투어 당시 관객석에서 ‘유다같은 녀석’이라고 야유를 퍼붓는 장면, 비틀즈로 추정되는 인물들, 알약과 기괴한 몽환, 거대한 거미와 달, 리들 카운티 마을의 목을 맨 채플린이나, 느닷없이 등장하는 기린, 미국의 여러 시대, 다양한 인물들로 분장한 단역배우들, 광고풍선처럼 공중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쥬드 퀸의 모형, 나팔을 부는 가브리엘 대천사, 머리에 불을 붙인 여자 등등 이루 다 거들비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이런 순간적인 장면들도 그의 수많은 노래 가사들 속에 축적된 함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제 배우들 이야기를 해 보자. 화려한 캐스팅만큼이나 이들의 연기는 훌륭하다. 더 이상은 사족이 되겠지만 몇 마디만 덧붙여 보자.

이밖에도 짱짱한 캐스팅이 줄대 이어진다. ｢파 프롬 헤븐Far From Heaven ｣(2002)의 여주인공 줄리안 무어가 연기한 앨리스 파비안은 그냥 봐도 조앤 바에즈다. 파비안은 침착하며 부드러운 태도로 잭을 증언한다. ｢'프리휠링 밥 딜런The Freewheelin' Bob Dylan｣ 앨범 자켓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연인 수즈 로토로와 첫 아내 세라 로운즈의 모습이 뒤섞인 듯한 클레어 를 연기하는 샬롯 갱스부르, 언제 보아도 그녀는 매력적이다. 그리고 목소리만으로 영화에 깊이를 더하는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아, 그리고 무엇보다 귀에 익은 그의 노래들. 노래의 소나기는 지나간 나의 한 시절까지도 날라 와 추억으로 흠뻑 적셔준다. 밥 딜런은 물론이요, 수많은 뮤지션들이 펼치는 음악 릴레이에 귀치레 한번 황홀하였다. 앤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직전까지 울려 퍼지던 ｢미스터 탬버린 맨Mr. Tambourine Man｣의 하모니카 연주는 아직도 귀에 가득하다.

영화가 끝났다. 온통 밥 딜런이 들뭇하지만 밥 딜런은 없다. ‘어쨌든 너희들이 짐작하는 거기에 나는 없어.’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글쓴이 : 김만동

안동 경덕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