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상학_안동이 건네준 시와 말]봉정사 영산암
• 안상학 2009-07-10

 봉정사 영산암

응진전 외벽
인욕바라밀 수행하는 벽화 속의 용
인간들에게 잡혀
동아줄에 수염 묶인 채 끌려가는 용
갖은 고통과 모멸 속에서도 인내하며
귀여운 짓하는 개처럼 귀를 붙이고 착한 눈을 굴리며
반쯤 헤벌린 입에 불길은 어디 가고 침까지 헤헤 흘리며
철없는 애완견처럼 서푼어치도 안 되는 인간에게 질질 끌려가는
민화 같은 응진전 벽화 속의 용
신통방통 여의주 세상 모든 탐진치를 여의는 데 쓰고
오직 인욕만 뜻대로 할 수 있다는 듯
질질 끌려가는 용의 꿈이 고작 인간으로 환생하는 것이라니

전생이 용이었다는 석가모니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할 때 내렸다는 꽃비
그 이름을 딴 우화루 아래를 지나
영산암 응진전 앞에 서면 간 밤 비가 내렸던가
만발한 나무백일홍 아래 용을 닮은 솔가지에도
스님의 발자국에도 낙화 다시 붉게 피어 있다

시작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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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 영산암(鳳停寺 靈山庵)은 내가 좋아하는 공간 중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든다. 건축가들이 꼽은 우리나라 10대 건축물에도 꼽힌다. 안동을 찾는 내 손님들을 이 공간에 데려가면 거의 홀딱 반한다. 비나 눈이 내리면 까무러친다. 그 즉시 그들은 영산암 전도사가 된다. 

영산암으로 들어가려면 우화루 아래를 지나야 한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서면서부터 마주치는 계단을 오르면서부터 심상치가 않다. 경내는 은근히  ‘여기는 그대가 방금 떠나온 세상과는 다른 곳’이라는 듯 말을 걸어온다. 아늑한 안뜰과 자연 그대로의 높낮이를 한껏 활용한 배치는 자연에 가까운 아름답다. 송암당 앞 바위와 그 위에 앉은 반송의 품격은 백미다. 집을 짓기 벌써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위압적이지 않는 건축물도 둘레둘레 앉아 저마다 자유롭다. 고승들이 둘러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느낌이다. 그 안에 들면 나도 그들처럼 조용하게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다. 관심당(觀心堂) 앞 툇마루가 제격이다.

어느 해던가. 아침부터 내린 비가 그친 여름 한낮이었을 것이다. 송암당 앞 반송 곁에 선 배롱나무 꽃이 마당에 점점이 흩어져 있다. 곁에 선 반송은 마치 자기가 피운 꽃인 양 붉은 꽃잎을 받아 이고 있다. 인욕바라밀을 수행하는 불자의 천진한 표정만 같아서 정겹다. 응진전 옆 벽화 속에서 천진하게 인욕을 감수하며 끌려가는 용의 모습과도 닮았다.  

봉정사와 영산암은 한 인물의 인연이 아프게 남아 있다. 일본에서 소설가로 문명을 날린 다치하라 세이슈(立原正秋)는 봉정사 승려를 지낸 김경문의 아들이다. 본명은 김윤규(金胤奎. 1926~1980)다. 성공한 일본 소설가로 살면서 평생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겼다. 그는 평생 어떤 욕됨을 참아내며 살았을까. 11살까지 살았던 그의 고향은 소설 <겨울의 추억>에 묘사되어 있다.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설법을 할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고 한다. 우화루(雨花樓) 지나 응진전 벽화 앞에 서면 나는 또한 어떤 욕됨을 견디며 살고 있는지, 아니, 인욕바라밀을 수행하는 용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화 날 때마다 떠올리고 싶은 용의 눈알을 또한 떠올리며 이 시를 썼다.  

글쓴이 : 안상학

1962년 경북 안동 출생.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1987年 11月의 新川」당선. 시집으로는 『그대 무사한가』(1991), 『안동소주』(1999), 『오래된 엽서』(2003), 『아배 생각』(2008) 등이 있다. 현재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