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백소애_쑤세미의 골방에서 만화읽기]혁명의 달을 노래하는 만화 <테르미도르>
- 쑤세미
불행한 사람들이야말로 이 대지의 힘이다.
혁명의 달을 노래하는 만화 <테르미도르>
‘테르미도르Thermidor’는 프랑스 혁명력 중의 열월(熱月), 1793년 7월 19일부터 8월 17일까지를 일컫는다. 만화 <테르미도르>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한 ‘팩션’이다. 격동의 세월,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내던져진 주인공 유제니와 알뤼느, 줄르의 이야기다. 역사에 문외한인 내가 <테르미도르>를 통해 프랑스 혁명을 알게 되었다. 거기엔 혁명가 장 폴 마라가 등장하고 그가 간행한 신문 ‘인민의 벗’이 등장하고 로베스 피에르와 당통, 공포정치, 코뮌 결성의 과정이 나온다. 1793년 1월, 음산한 파리의 하늘 아래에서 국왕 루이16세가 단두대에 올라 “국민들이여, 짐은 죄 없이 죽노라”고 외치는 장면까지, 그 어떤 역사 공부보다도 더 몰입해서 읽을 수 있다.
<북해의 별>, <비천무>, <불의 검>, <아라크노아>, <겨울새의 깃털 하나> 등으로 한국 만화계에 큰 획을 그은 작가 김혜린은 ‘순정만화’의 선입견을 깨버린 사람이다. <테르미도르>는 1988년 우리나라 최초의 순정만화잡지 ‘르네상스’에 연재되었던 작품이다. 학창시절 친구들과 ‘르네상스’ ‘윙크’ ‘댕기’ ‘화이트’ ‘하이센스’ ‘보물섬’ ‘아이큐 점프’ 등의 만화잡지를 돌려보곤 했었다. 다음 회가 궁금해 잡지가 나올 시점이 되면 앞 다퉈 서점으로 뛰어갔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부터 비닐 랩핑이 되어 구입하지 않고선 더 이상 보기가 힘들어져 만화잡지를 산 친구들 주변을 배회하며 순번을 정해 읽곤 했었다. 김혜린, 신일숙, 황미나, 강경옥은 우리 학창시절이 아름다웠던 이유 중 하나였다. 그중 수묵화를 연상케하는 동양적인 그림체와 철학적이고 깊이 있는 작품을 선보인 작가는 단연 김혜린이었다. 책을 덮고도 한참을 잠들지 못했고 스산한 마음이 들곤 했다. 그렇게 만화와 함께 십대를 보냈다.
김혜린은 핍박받고 고통스러운 민중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과 우정, 또 삶의 본질을 이야기 하는 작가, 정직하다 못해 우직스러운 주인공과 강인한 여성상을 통해 불안한 청춘과 삶의 철학을 그려내는 작가다. <테르미도르>는 작품 곳곳에 시인보다 더 아름다운 시를 담아내 한국만화계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다시 쓰는 프랑스 혁명사’이다. 자유, 평등, 박애의 삼색기가 휘날리게 되기까지 피를 흘린 주변부 사람들의 이야기는 학원물 일색이던 순정만화계의 신선한 충격이었다. 역사, 무협, SF를 그려내도 종국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천착하는 모습을 놓치지 않는 그녀의 모든 작품은 소장가치가 충분하다.
남프랑스 툴롱에서 미친 어머니와 함께 사는 사생아 유제니는 수도원에서 잡역부를 하며 살고 있는 어두운 아이다. 유제니는 어느날 귀족가의 정원에서 레몬을 훔치다 인부들에게 몰매를 맞는다. 그곳에서 귀족인 줄르와 알뤼느를 만나게 된다.
1789년 성인이 된 줄르와 알뤼느. 혁명의 기운을 느낀 줄르는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이 새로운 세상을 위해 싸우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자 파리로 갈 것을 결심한다. 국왕폐하를 모독한 반역자이자 폭도들을 감싸는 그가 이해가 되지 않는 알뤼느. 그들은 장래를 약속하게 되지만 붉은 스카프라 불리는 혁명가로 성장한 엘(유제니)의 주도로 알뤼느의 집이 습격을 당하면서 그들은 생사를 모른 채 헤어지게 된다.
불행한 과거를 극복하고자 불합리한 세상에 반(反)해 혁명에 뛰어든 유제니와 합리적인 사고의 칼럼가 줄르, 마음속의 열정과 세상에 대한 적극성으로 주위를 빛나게 하는 알뤼느는 서로 같은 ‘종족’이지만 애증으로 얽히게 된다. 알뤼느와 유제니가 사랑하게 되면서, 또 혁명이 가속화되면서 불행은 증폭되어 간다.
서로가 죽이고 죽고, 단두대에 차례로 올라가는 사람들 틈에서 유제니는 절규한다. ‘혁명이여! 날 버리지 말아다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던가. 내가 너를 얼마나 상처 입혔던가. 네가 나를 얼마나 상처 입혔던가. 그럼에도- 우린 아직도 얼마나 사랑하는가. 혁명 만세’
시국비판칼럼을 쓴 시인은 단두대로 올라가면서 펜은 잠자고 있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 그에게 ‘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묻는 젊은이. 이제 겨우 절망에 대해 노래하는 법을 느끼기 시작한 혁명시인은 반혁명죄로 사형된다. 격동의 세월, 치열한 투쟁 속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목소리를 높이다가 낮추고 다시 높이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은 우리네 역사와 닮아있다. 서로 할퀸 상처가 너무 깊어 반목하고 경계한다.
평생을 가난하고 불행하고 고단하게 살아온 붉은 스카프의 혁명가 엘 아니 유제니에게도 ‘반혁명’의 죄목이 가까이 오게 된다. 알뤼느는 이젠 행복하게 살아도 되지 않느냐고 함께 도망가자고 호소한다. 그는 그렇게 하자고 한다. 그리고 지친 모습으로 물을 부탁한다. 알뤼느가 잠시 물을 뜨러 간 사이 그는 사라진다. -이대로 너의 따뜻한 손을 잡고 싶다. 행복해질 수도 있겠지. 아마도 우리 둘은.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아! 불행한 사람들이야말로 이 대지의 힘인 것이다.- 알뤼느는 오열한다.
그리하여 꽃들은 가고 태양은 계속 뜨겁고 핏빛의 꽃잎들이 눈물처럼 후둑후둑 지는 소리를 든던 유제니는 사생아인 자신을 거둬주었던 수도원의 비쇼 신부의 무덤을 찾아간다. 그는 패배했기 때문에 돌아온 게 아니라고 읊조린다. 이기기 위해 떠난 게 아닌 것처럼. 일련의 무리들은 그 앞에 총부리를 겨눈다. 죽고 죽이는 것에 진력이 난 이 젊은이는 묘석 속에 눕지도 하늘 속에서 쉬지도 않을 것이라 다짐한다. 그저 땅위에서, 그녀 알뤼느의 손수건을 한손에 꼭 쥐고 자신의 피가 언젠가는 바랠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제니의 마지막은 처절하다 못해 아름다웠다. 날아오는 총알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열월(熱月)의 태양빛을 마신다.
<테르미도르>는 프랑스 혁명의 역사를 진중하게 그리면서 순정만화 특유의 ‘사랑’이야기를 놓치지 않은 ‘웰메이드’만화다.
거칠고 야성적인 남자 주인공의 우수에 찬 눈빛, 똑똑하고 거침없는 여주인공, 요즘 드라마의 코드인 자상하고 온화한 서브 남자 주인공이 등장해 탄탄한 스토리와 캐릭터의 조화를 보여준 작품이다. 부산에 거주하고 있는 만화가 김혜린의 작업 모습이 언젠가 TV에 방영된 적이 있는데, 작품을 끝낸 후 그녀의 문하생들이 서울 가는 고속버스 편으로 작품을 보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펜으로 선을 입힌 뒤 지우개질을 하던 아날로그시대 만화가들의 작품이 더욱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그건 풋내기 아이돌에 지쳐 ‘나는 가수다’의 울림통을 전해 듣고 싶은 많은 사람들의 기분일지도 모른다. 부디 그녀가, 지금은 폐간된 ‘화이트’에 연재하다 중단된, 일제강점기의 불안한 청춘들의 이야기를 그린 <광야>의 뒷얘기를 애가 타게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죽음으로서 삶을 얘기하는 유제니의 잔상이 지워지지 않는 와중에 길모퉁이에서 장 폴 마라와 첫 대면하던 장면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파리로 입성한 유제니가 어느 골목길에서 한눈을 팔고 가다 혁명가 마라와 부딪치게 된다. 자신의 우상을 만나 쑥스러운 유제니가 고개를 숙이자 마라는 이렇게 말을 한다. “젊은 놈이 눈을 감고 걸으면 나라가 망해, 이 친구야!”
김혜린/ 테르미도르(Thermidor)/ 전3권/ 1998년 복간/ 도서출판 대원
- 글쓴이 : 백소애
- 강원도 태백 출생. 아이큐는 낮지만 머리가 좋다고 굳게 믿고 있음. 변덕이 심하고 우유부단하나 따뜻한 품성을 지니고 있다. 조카들에게 헌신적이며 인간성 또한 좋다.....고 믿고 있다. 학생 때 교무실에서 밀대자루로 바닥 밀면서 은밀히 훔쳐본 생활기록부에는 ‘예의 바르나 산만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한참을 갸우뚱 하다가 담임이 수학선생님이었기에 그냥 이해하기로 함. 다소 후진 취향을 지니고 있으나 남에게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고 쓸데없는 걱정과 호기심이 많음. 같은 계획을 몇 년째 하고 있으며 역시나 올해도 다이어트와 앞머리 기르기에 도전할 생각이며 과메기에 없어서는 안 될 다시마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 웹툰도 괜찮지만 만화책은 역시 종이책으로 보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아날로그 건어물녀. 좋아하는 것은 무한도전, 오뎅으로 만든 떡볶이, 삼겹살에 매실소주, 비오는 날, 생활의 달인,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괴짜가족 류의 저질유머. 비 오는 날 무한도전 틀어놓고 배 깔고 누워 만화책 보면서 빈둥거리며 사는 것이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