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안상학_안동이 건네준 시와 말]오래된 사랑
- 안상학
臨淸古塔
너무 오래 이곳에 머물렀다.
나에게 돌을 던지던 여인도 죽고
탑돌이 하던 푸른 옷자락의 여인도 죽고
그 아들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도 죽었는데 나는
여기서 너무 오래 우두커니 서 있었다.
기찻길로 자꾸 몸이 기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는
무언가 잊은 듯하다 그 아들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그 어머니, 돌멩이 하나까지
잊어버린 듯하다. 기찻길 너머 회나무
아스팔트 한 가운데 살아남아
해마다 금줄에 다시 묶여 어쩌지 못한다.
그나 나나 너무 오래 서 있어서 이젠
그 무언가를 잊어버린 듯하다. 잊은 듯하다.
시작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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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는 오래된 것이 슬프게 보일 때가 있다. 가끔은 오래 남아 있는 것일수록 외롭게 보일 때가 있다. 신세동 7층 전탑 근처를 얼쩡대다 보면 그런 감회에 사로잡힌다. 절이 무너질 때 같이 무너지지 못하고, 마을 사람들이 뿔뿔이 떠날 때 뿌리 뽑혀 같이 떠나가지 못한 탑과 나무의 대칭이 외롭다. 본디의 모습이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그저 형태로만 가까스로 남아서 까마득한 옛날을 짐작케 할 뿐이다.
안동팔경의 하나인 임청고탑이라는 하드웨어는 있지만 그를 밑받침해주는 소프트웨어는 파괴된 지 오래다. 임청각헌 군자정 앞에는 중앙선 철로가 놓이면서 혈이 끊어졌고 댐이 가로막히면서 물의 흐름도 끊겨버렸다. 뽕나무밭이 있던 곳은 고가도로가 놓이면서 옛 정취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퇴락해가는 아흔 아홉 칸 고성 이씨 종택과 녹빛을 뒤집어 쓴 전탑에 얽힌 전설도 이젠 기차소리와 안개에 가려 가까스로 세월의 무상함을 일러주고 있을 뿐이다. 중앙선 철로를 옮긴다고 해도 이젠 때늦은 이야기가 된 것 같다.
- 글쓴이 : 안상학
- 1962년 경북 안동 출생.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1987年 11月의 新川」당선. 시집으로는 『그대 무사한가』(1991), 『안동소주』(1999), 『오래된 엽서』(2003), 『아배 생각』(2008) 등이 있다. 현재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