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만동_영화이야기]엽문(葉問)
• 김만동 2009-05-11

나는 요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영화관에 가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사는 이곳 안동에도 대형 상영관이 들어서 있고, 새로 유명짜한 영화관이 더 들어선다는 소문까지 있지만, 나는 그런 멀티플렉스가 탐탁하지 않다. 영화관이 커진다는 말은 그만큼 자본 논리에 충실하다는 말일 터이고, 불량한 관객들은 더욱 오만해질 것이므로.

몇 번 가본 영화관의 풍경을 조금만 과장해서 적어보자. 젊은이들은 바삭바삭 쉴 새 없이 팝콘을 씹으며 콜라를 마시거나, 영화는 뒷전으로 밀어놓고 연애에 빠져있기 일쑤요, 나이 든 이들은 계모임을 하는지 대여섯씩 모여앉아 한 장면 한 장면마다 킥킥대며 박수치고, 앞자리의 등받이를 툭툭 차는 것은 예사요, 심지어 씩씩하게 휴대전화기를 열고 냅다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를 본다는 건 차라리 고문에 가깝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영화 하면 나는 배우의 이름만을 기억할 뿐이었다. 이소룡, 성룡, 원표, 홍금보, 주윤발, 왕조현, 장국영, 공리, 양조위, 장만옥 같은 걸출한 배우들 말이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인지 중국영화는 감독 이름과 함께 떠오른다. 오우삼의 '영웅본색', 장예모의 '붉은 수수밭', 허우 샤오시엔의 ‘비정성시’, 진목승의 ‘천장지구’, 서극의 '황비홍', 정소동의 ‘동방불패’, 첸카이거의 ‘패왕별희’, 왕가위의 '중경삼림', 이안의 '색, 계'까지가 그렇다. 물론 이연걸, 관지림, 임청하, 금성무, 장쯔이, 유덕화, 오천련, 견자단 같은 뛰어난 배우들이 함께 떠오르긴 한다. 중국영화는 그게 무협이든 멜로든 느와르든, 지나친 클리셰 때문에 선뜻 보기가 쉽지 않았는데도 생각해 보니 살아오는 동안 자연스레 꽤 여러 편을 보아온 것 같다.

새로 본 중국 영화, ｢엽문(葉問)｣의 스토리를 톺아보자. ｢엽문｣은 중국 광동 불산 출신의 무술인 ‘엽문’에 대한 영화이다. 영화의 시작인 1930년대는 그러니까 엽문 40세 전후의 시기이다. 무술의 메카 불산의 무관가. ‘불산의 1인자’ 엽문은 ‘폐문절차’를 신청해온 요 사부, 도장 깨기로 무관 거리를 휘젓던 북방권법의 금산조를 잠재우면서 더욱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자늑자늑 선드러진 몸놀림이 주는 아름다움이라니!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사건이 발생하고 일본군들이 대거 중국을 침략하여 중국인들은 굶주리고 헐벗은 채 길거리에 쓰러진다. 그 사이 목인형을 상대로 고요히 수련하는 엽문의 모습 페이드아웃되면, 이후 화면은 흑백으로 바뀌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천연색은 암울한 중국의 현실처럼 흑백 속에 갇혀 숨죽인다. 1938년 10월, 마침내 불산도 함락되었고 일본군들은 공장과 주택, 설비 등을 마구 파괴했다. 30만 명이었던 인구는 겨우 7만 여명이 살아남았고 도시 전체엔 10여 개의 공장만이 가동되었다. 엽문의 저택도 일본군에게 점유당해 일본군 사령부로 쓰이게 되며, 엽문 일가 세 사람도 생활에 곤란을 겪게 되었다. 양식도 떨어지고 아내 영성이 앓아눕자 엽문은 탄광에 일자리를 얻게 된다.

불산 치안대장이었던 이쇠가 일본군 통역관이 되어 탄광에 나타나, 일본군과 대련해 이기면 쌀을 한 포대 준다며 사람들을 모으고, 뺏긴 우리 쌀을 되찾아올 수 있는 기회라며 그를 따라 나섰던 무치림은 미우라 장군에게 패하여 죽고, 무치림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엽문이 대련에 나가겠다고 따라나선다. 마침 1대 3 대련에서 패한 요 사부가 사토 대령의 권총에 맞아 죽는데, 분노한 엽문이 대련장에 들어가 1대 10으로 싸우겠다고 선언하고, 요 사부의 피가 묻은 쌀 포대 옆에 탄광에서 받은 고구마를 내려놓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가장 인상 깊다. 피 묻은 쌀 포대 옆에 놓인 고구마 말이다. 눈앞에서 목격한 요 사부의 죽음에 대한 분노와 가족에 대한 사랑! 엽문은 열 명의 일본군을 차례차례 쓰러뜨린다. 액션 영화의 거의 모든 대결에서 먼저 공격하는 이는 필시 하수이고, 먼저 움직인 이는 반드시 먼저 눕는다. 중국인으로서의 자존을 함께 드러내 보이는 이 장면에서, 그 손발의 간결쾌속에 감탄을 멈출 수 없다. 그런데 견자단을 돋보이게 찍기 위해 그랬을 것이지만, 일본군 역을 맡은 배역들은 사실 너무 엉성하다. 사이보그 같은 그들의 표정과 동작은 우스꽝스럽기조차 하다.

제자를 받지 않던 엽문은 주청천의 공장 사람들을 금산조의 도끼파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공장에서 쿵푸를 가르치고 공장 사람들은 영춘권 수련을 시작한다. 가르치고 수련하고 일하는 생활이 날구장창 이어진다. 한편 엽문을 찾느라 혈안이 된 일본군 사령부의 사토 대령은 이쇠의 뒤를 밟아 엽문을 찾아내고 영성의 미모에 흑심을 품지만, 총을 쓸 새도 없이 엽문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이쇠는 엽문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고 사령부에서 돌아가서는 사토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한다.

주청천의 면화공장에 금산조의 도끼파가 들이닥치지만 그 동안 영춘권을 수련하며 단결한 공장 사람들은 엽문과 함께 이들을 물리친다. 금산조가 일본군 사령부에 엽문의 소재를 일러바치고, 미우라는 직접 일본군을 인솔해 공장에 들이닥쳐 엽문이 소재를 추궁하자 보다 못한 엽문이 자신을 드러낸다. 마우라는 엽문에게 너는 솜씨가 뛰어나 죽기에 아까운 남자이므로 기회를 주겠다며, 일본천황에게 충성을 바쳐 일본군에게 무술을 가르치라고 회유한다. 당연히 엽문은 미우라의 제의를 거절하지만 이쇠의 거짓 통역으로 미우라와의 무술대결이 이루어진다. 공정한 경기를 강조했지만, 사토는 미우라 몰래 감방으로 엽문을 찾아와 미우라를 이기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한다. 견자단의 헛헛한 웃음과 초월한 표정은 그의 내밀한 연기를 잘 보여준다.

중국 무술에는 유가의 철학이 포함되어 있어 인(仁)으로 자신을 미루어 다른 사람을 헤아리는 바, 일본인들로서는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도리라는 엽문의 내레이션은 수긍할 만하다.
드디어 두 사람의 대결이 시작되고, 엽문의 열쌘 손놀림과 정확한 눈, 가벼운 발놀림에 미우라는 엉망이 되도록 두들겨 맞고 주저앉는다. 일방적인 승리다. 만세 부르며 환호하는 사람들 사이, 사토가 쏜 총에 엽문이 쓰러지고, 이를 말리던 이쇠가 실랑이 끝에 사토를 쏘아 죽인다. 중앙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누운 엽문 주위로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카메라가 천천히 하늘을 향하면 이후 이야기의 숱한 사진들 위에 자막으로 올라간다.

부상당한 엽문은 친우 주청천의 도움으로 가족과 함께 불산을 떠나 1949년 영춘권 종사가 되었고, 1967년 영춘 체육회를 창립하여 동문을 모아 힘써 ‘영춘권’을 널리 선전하였으며, 영춘권은 지금까지 발전하여 세계에서 유명한 권술이 되었는데, 제자들의 수가 이미 200만을 넘었으며, 그 중에는 이소룡도 포함되어 있다는 내용이다.

영화는 끝났다. 영화 ｢엽문｣은 액션을 과장하지 않는다. 중국 영화 특유의 와이어 액션이나 화려한 앵글은 자제되고 소곳한 화면, 듬쑥한 배우들의 연기에 기대어 사실성을 강조한다. 영화 ｢엽문｣은 엽문의 영화다. 무술의 대가에다가 더욱 근사한 인간성까지 지닌 멋진 사내 말이다. 또한 영화 ｢엽문｣은 견자단의 영화다. 실존 고수의 무예와 품성을 그처럼 잘 살려낼 배우가 또 있을까? 실제 엽문과 견자단이 연기한 엽문의 실루엣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겸손하면서도 굳센 한 인간의 매력에 흠뻑 빠진 시간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미국 영화 ‘람보’나 ‘인디팬던스데이’를 보고나서 그랬듯이 영 가든하지가 않은 것은 왜일까?

글쓴이 : 김만동

안동 경덕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