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남효선_동해연안의 문화여행]울진 사월은 돌미역 세상
- 남효선
- 산천은 봄을 여느라 바쁘고, 사람들은 살림살이 준비로 분주하고 -
"울진 사월은 돌미역 세상"
"울진미역 없으면 안동사람들 산모 미역국도 못끓였지"
온 산천이 봄을 열고 맞이하느라 분주합니다. 산천은 봄을 알리느라 분주하고, 사람들은 새봄을 맞아 한해의 살림살이를 준비하느라 분주합니다. 산으로 오르는 길섶에는 봄풀이 앞 다투어 연록의 생명을 피워내고, 얼음장 밑으로 숨죽여 흐르던 개울물은 겨울의 흔적을 말끔히 씻으며 생명의 노래를 부릅니다. 계곡의 끝자락에는 자주색 노루귀가 '노루 귀'처럼 앙증맞은 꽃잎을 열어 봄 내음을 뿌리고, 산천은 참꽃과 돌복상꽃이 뿌리는 다홍빛 향내로 가득합니다.
삼라만상이 봄의 향기를 풀풀 날리며 기지개를 펴는 동안, 사람들은 뭍과 바다에서 싱싱한 노동을 풀어놓습니다. 봄바람에 묻혀 잘 삭은 거름냄새가 코끝을 간질입니다. 농군은 보드라운 논흙을 밟으며 논둑 바르기를 서둘러 마친 뒤 못자리판을 만들고, 아낙들은 봄을 몰고 흐르는 개울에서 봄나물을 씻습니다. 마을 어귀에는 산수유가 노란 꽃망울을 달고 있고 길섶에는 큰개불알꽃과 하얀 민들레가 다다귀처럼 무리지어 연보랏빛 봄 세상을 열었습니다.
4월의 울진은 '미역세상'입니다. 겨우내 그물코를 손질하던 어부들은 새벽을 가르며 잘 자란 미역을 뜯기 위해 부산합니다. 울진사람들에게 미역은 생명을 유지해준 소중한 먹을거리이자 환금작물이었습니다. 40~60년대 먹을거리가 턱없이 부족했던 보릿고개 시절, 미역은 울진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준 유일한 생명초였습니다. '미역이 없었더라면 울진사람 모두 다 죽었지'라는 향언이 지금도 전승되고 있듯이, 미역은 울진사람들의 생존을 지켜준 버팀목이었던 셈이지요.
돌미역(자연산 미역)은 바다 속 1.5~20m 내외의 바위군락에서 자랍니다. 이를 '미역짬'이라 부르지요. 미역짬은 뭍에서는 논밭이 농민의 생명줄이듯 어민들의 삶을 담보하는 텃밭이기도 합니다. 미역짬의 관리와 미역채취는 마을 공유자산인 까닭에 마을자치조직인 '대동추'나 '어촌계'에서 공동경영과 공동분배 규정에 따라 철저하게 관리합니다.
울진 연안의 해촌에서는 매년 마을별로 6월경이면 '대동추'(마을 공동자치조직)나 '어촌계'모임을 열고 '미역짬'을 분배합니다. 미역짬 분배는 마을별 짬의 숫자에 따라 어촌계원들을 고르게 나누고 '송치'라고 부르는 표식을 ‘뽑기’형식으로 정합니다. 공정성을 기하기 위함입니다. 어민들은 자신들을 살려 준 미역에 대해 각별한 정성을 쏟아왔습니다. 울진 해촌에는 지금도 '짬고사'라는 독특한 제의가 치러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미역이 잘 생장하기를 기원하는 고사입니다.
해촌의 아낙들은 10월경이면 '미역 짬' 별로 '기세닦기(미역바위닦기)'에 나섭니다. 미역바위에 붙어 있는 온갖 이물질을 제 몸을 씻는 것처럼 잘 닦아내야 미역포자가 제대로 뿌리를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역이 포자를 내리는 짬(미역바위)을 잘 닦아낸 뒤, 보름달이 뜨는 날을 잡아 짬고사를 지냅니다. 짬고사는 미역짬별로 이뤄지며, 이 때 어촌계원들 중 '자식을 쑥쑥 잘 낳은' 시어머니와 며느리를 선정하여 짬고사를 치룹니다. 선정된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몸을 정갈하게 닦은 뒤, 보름달이 환한 밤에 할당된 미역짬으로 나아가, 집에서 정성껏 빚은 막걸리에 좁쌀을 섞어 미역바위에 뿌리며 '영개(비는 행위)'를 드렸습니다. 미역씨앗이 바위에 잘 붙어 미역풍년이 들기를 비는 것입니다.
울진사람들은 또 매년 입동을 전후해 '짬매기'를 했습니다. 짬매기는 미역포자의 발아를 돕기 위해 돌미역이 무리지어 자라는 수중의 바위군락을 닦는 일입니다. 짬매기는 '기세닦기'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해촌 주민들은 10월부터 11월 중순까지 어촌계별로 품앗이를 이뤄 '낫대'와 '씰개'를 들고 정성들여 미역바위를 닦았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이미 우리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친환경적 생업기술을 체득해 온 셈입니다.
미역농사는 바람이 결정...음력 이월초하루에 영등고사
'짬고사' '기세닦기' 등 전통 어로관행 현재도 전승
미역의 생장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바람'과 '해류'입니다. 바람은 해류의 방향과 바닷물의 온도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요인입니다. 울진지방이 자연산 미역의 보고로 자리잡은 까닭은 특히 바람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울진 돌미역이 한창 출하되는 시기는 3월에서 5월 사이로, 이 무렵 태백산맥을 넘어 동해로 불어오는 '높새바람'(푄현상)은 때깔 좋은 미역을 건조시키는 데 필수적인 조건인 셈이지요. 때문에 울진의 사람들은 음력 이월 초하룻날에 '바람을 관장하는 신'인 '영등고사'를 지내고 보름동안 풍물을 치고 별신굿을 벌이며 노동축제를 벌였습니다.
이월 초하루의 '날씨가 흐리고 비가 내려야' 미역풍년이 든다고 믿었습니다. 이월 영등은 해촌에서는 설 명절 다음으로 큰 명절이자 공동축제였습니다. 울진의 최북단에 자리 잡고 있는 자그마한 해촌인 고포(姑浦)마을에서 생산되는 '고포미역(고포 돌곽)'은, 동국여지승람이나 조선왕조실록에도 자주 등장할 만큼 맛이 뛰어난 것으로 이름난 '조선의 특산물이자 울진의 명품'입니다. 3월 말에서 4월 초순, 높새바람이 불어오는 보름동안 고포마을을 비롯하여 울진연안 해촌은 싱싱한 돌미역 내음이 온 마을을 휘감고 돕니다.
동이 트기 무섭게 어부들은 '떼배'를 띄우고 해녀를 동원하여 돌미역을 채취합니다. 아이들이나 노인들은 '틀개'(3m 크기의 장대에 갈고리를 단 긴 장대)를 들고 파도에 떼밀려오는 '돌미역'을 건지러 불가(백사장)로 나갑니다. 파도에 밀려오는 돌미역을 건져 가계에 보태기 위해서입니다. 파도에 쓸리는 미역 한 올도 소홀히 하지 않고 소중하게 갈무리했습니다. 고포미역이 생산되는 4월 무렵, 고포마을이나, 나실마을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으며, 미역의 향긋한 냄새를 뿌리는 '미역 천지'가 됩니다.
미역채취는 잠녀(潛女, 해녀)들의 몫입니다. 고포마을에서는 주로 죽변 봉수동(봉께)에 뿌리를 내린 해녀들을 동원합니다. 고포마을 어촌계와 해녀들 간에는 엄격한 계약관계가 성립됩니다. 해녀들이 아침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채취한 미역량을 기준으로 '해녀가 3할, 어촌계가 7할을 갖는 방식'입니다. 해녀들은 연신 미역짬으로 자맥질하고 어촌계원들은 해녀들이 채취한 돌미역을 '떼베'로 나르며, 아낙들은 싱싱한 돌미역을 '미역발'에 널어서 말립니다.
태백을 넘어 동해로 치닫는 놉새 바람은 잘 자란 미역을 사흘이면 윤기로 반짝거리는 '울진 고포돌미역(돌곽)'으로 탄생시킵니다. 이렇게 탄생한 울진산 미역, 특히 울진 북면 고포리와 나실마을에서 생산되는 '고포미역'은 스무 올을 기준으로 한 단에 13만원을 호가하는, 최고의 명품으로 주부들의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특히 고포미역은 다른 지역에서 생산되는 미역보다 '온의 길이가 긴' '장곽(長藿)'이어서 더욱 더 인기가 높습니다.
'소금과 미역, 간고등어 길, 십이령길'을 따라 영남내륙으로
갯마을과 산중마을을 이은 '선질꾼' …. 내성행상불망비로 남아
이렇게 탄생한 고포미역은 인근에 자리한 '흥부장'을 거쳐 '선질꾼(바지게꾼, 지게를 진 채로 앉아서 쉬는 부보상)'들의 지게에 얹혀 안동이나, 영주, 봉화로 유통되었습니다.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봉화, 안동 등 영남내륙 지방은 울진에서 넘어가는 돌미역이 없었으면 '산모 산후조리를 위한 미역국'이나 '돌잔치'도 못 치룰 만큼 울진 산 돌미역은 요긴한 의례음식이었습니다. 특히 현재의 북면 부구2리에 자리 잡았던 '흥부장'과 울진군 소재지인 울진읍장은 '어물, 소금시장'과 '소(牛)시장'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전통사회에서 소금의 중요성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했거니와, 울진지방에서는 미역, 간고등어 등 해산물과 소금의 유통을 담당한 특수상인 집단인 이른바 바지게꾼이 조직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이들은 '바지게'라는 '지게다리가 없는' 특수한 운반용구를 제작하여 사용하고, '계(契)'를 구성하고 '규정'을 만들어 상행위에서 벌어지는 부도덕한 행위를 규제하는 등, 조직적이고 집단화된 상단(商團)을 형성해 활발한 상행위를 펼쳐왔습니다.
이들이 영남내륙으로 이동하던 상로(商路)인 '십이령바지게' 초입인 울진군 북면 두천리에는 이들 조직의 상태를 엿볼 수 있는 유적인 '울진 내성 행상불망비'가 남아있으며, 이 비석은 지난 96년도에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제130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습니다. 최근 산림청과 울진군은 갯마을인 울진과 산중마을인 영남 내륙을 잇던 '소금과 미역 그리고 간고등어의 길'인 십이령길을 생태관광도로로 복원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해 울진 연안의 어장에서 생산된 미역은 1만5천809단에 이르며, 이를 무게로 환산하면 72톤가량 입니다. 돈으로 환산하면 13억 4천여만 원에 달합니다. 해마다 3~5월경이면 고포 바다는 울진에서 생산된 돌미역을 구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울진군에서는 '울진 고포미역'을 특산품으로 지정해, 생산기반조성에서부터 포장, 유통에 이르기까지 예산지원과 함께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답니다.
- 글쓴이 : 남효선
-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안동대학교 대학원에서 민속학을 공부하였다. 1989년 문학사상의 시 부문에서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하였다. 한국작가회의, 경북작가회의, 안동참꽃문학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둘게삼』이 있다. 현재 시민사회신문의 전국본부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