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임은혜_연극으로 만나는 세상]느리고 깊게, 연극으로 일구는 문화
- 임은혜
밭일과 연극
봄이 성큼 다가온 땅, 이곳 송생리의 사람들도 올해의 농사를 시작하고 있다. 사과나무 껍질을 긁어주고 가지치기도 하고, 비닐하우스에는 벼와 고추 모종과 함께 온갖 채소 모종들이 오종종하게 들어앉아 있다. 되도록이면 먹거리를 사지 않고 자급자족하려고 하는 나무닭움직임연구소의 사람들도 작업장 주변에 있는 노는 땅을 일구기로 했다. 삽으로 흙을 뒤집고 호미로 굳은 흙덩이를 두드려 부드럽게 다진다. 지난 해 동안 쌓아두었던 음식물 찌꺼기들을 퇴비와 섞어서 밭에 뿌리고 흙과 골고루 섞은 뒤 두둑을 만들었다.
기계를 이용해서 일찌감치 다져놓은 마을 어르신들의 밭은 참빗으로 곱게 빗어놓은 머리카락처럼 고르고 단정한데, 우리가 일군 밭은 울퉁불퉁하고 투박하다. 농기계를 쓰면 반나절 이면 끝날 일을 아침마다 서너 시간씩 틈틈이 일하다보니 일주일이나 걸린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요즘 같은 스피드시대에 왜 그렇게 더디고 비효율적으로 사느냐고 핀잔을 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손으로 흙을 만지는 이 더딘 작업은, 내겐 결코 속도와 양으로 따질 수 없는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이다.
특히 오랫동안 경작되지 않던 황무지를 갈아엎다보면 간혹 지렁이를 발견할 때가 있다. 나는 지렁이가 마치 가난하지만 상업주의와 타협하지 않고 자신만의 연극세계를 관철하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배우를 만난 것처럼 사랑스럽다. 아직 싹이 트지 않은 민들레 뿌리, 잠자고 있는 풍뎅이, 이름 모를 굼벵이, 지나온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낙엽, 거대한 나무뿌리에 휘감겨 있는 돌멩이, 몸통이 사라진 산비둘기의 한쪽 날개.... 매일 아침 흙에서 나오는 사물들을 보고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무수한 생명, 죽음과 재생의 반복이라는 순환의 질서. 이것은 인류의 신화와 제의 그리고 연극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와 상징으로 변주되어왔으며 지금도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인 것이다.
연극〈체게바라〉, 대지의 여신 '파차마마'를 만난 게릴라 (2007년. 나무닭움직임연구소 제작)
현대인들은 속도와 효율성을 중시하는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느리지만 천천히 그리고 깊숙이 스며드는 계절의 변화와 자연의 리듬을 감지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빠르게 접속하고 쉽게 복제할 수 있는 문화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연극보다 영화를, 도서관이나 박물관보다 포털사이트의 지식 창을 더 즐겨 찾는다. 한번 클릭하면, 또 인터넷 주문만 하면 내 앞에 바로 서비스가 제공되는 세상인데 어떻게 흙 속에 담겨있는 정신적인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으며, 느리기 짝이 없고 복제할 수 없는 연극과 깊이 있는 교감을 할 수 있겠는가.
장소익 1인극 〈지나가리라〉 (2005년. 나무닭움직임연구소 제작)
그렇다, 연극은 느리다. 연극은 기계로 대체할 수도 없고, 복제할 수 없는 인간의 몸으로 직접 소통해야만 하는 운명을 가졌기 때문이다. 연극배우는 자신의 몸을 끊임없이 훈련해야 하고, 극작가는 배우가 지닌 몸의 움직임을 그려내며, 연출가는 배우의 몸을 무대 또는 환경에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를 연구한다. 몸을 일구고, 몸으로 꽃을 피우고, 몸과 몸이 만나 공명하는 영적인 체험으로서의 연극, 이것은 속도와 효율이 아닌 느림과 깊이로 마주하는 밭일과 같지 않을까?
공연예술놀이터로 지역문화 일구기
문화(文化: culture)의 어원은 라틴어의 cultura에서 파생한 말로, 본래의 뜻은 경작(耕作)이었다. 나무닭 사람들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문화의 밭을 풍요롭게 경작하고 싶어 한다. 연극이 지역 주민들에게 물,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존재하게 하고, 지역공동체가 만들어내는 건강한 문화가 청정하게 지켜지는 보호구역을 일구려고 하는데, 그것의 터 닦기가 바로 ‘공연예술놀이터’인 것이다.
공연예술놀이터는 4년 전에 나무닭움직임연구소와 성공회대학교의 동아시아연구소가 서울 구로지역에서 시작한 사업이다. 당시 구로지역은 문화적으로 소외되어있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가정이 많았고, 지역 청소년들 스스로 구로동에 살고 있다는 것을 숨길 정도로 지역에 대한 불만이 심화되고 있었다. 마침 구로지역에 나무닭움직임연구소와 성공회 대학교가 있었고 몇몇 예술인들도 살고 있었다. 우리는 마을사람들과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공연예술을 할 수 있으며,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나아가 마을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 속에서 그 마을의 독자적인 문화예술이 꽃피울 수 있게 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 사업을 시작했다.
공연예술놀이터에서 불포이를 돌리는 소년(좌), 장다리를 타고 공연하는 아이들(우)
우리는 어른보다 '어린이'와 '청소년'에 주목했다. 특히 차별과 소외에 직면하고 있는 아이들을 중심에 놓고 시작했는데 단순히 예술적 재능을 일깨우겠다는 차원이 아니었다.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지역의 문제점을 온 몸으로 감지하고 있는 이 아이들이 곧, 지역의 공동체 문화를 건강하게 바꾸고자 하는 강한 의지와 자생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름도 ‘우둥불 공연예술놀이터’라고 지었다.
'우둥불'은 우리의 선조들이 마을공동체의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 둘러앉아 회의를 할 때 가운데 피워놓았던 불을 의미한다. 공연예술놀이터의 아이들이 공연기능을 익히고 유희의 시간을 보내는 것만이 아니라, 공동체를 생각하고 건강한 문화를 생산하는 문화의 주체가 되길 바라며 성공회대학교의 동아시아연구소장인 백원담 교수가 붙인 이름이다.
'우둥불 공연예술놀이터'는 매년마다 참가하려는 청소년들로 넘쳐난다. 지역과 단절되어있던 대학 캠퍼스가 활짝 열렸고, 오랫동안 문화예술에 목말라했던 지역주민들에게 사랑받는 사업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아이들은 서로 가르쳐주고 배우는 놀이 공동체를 스스로 만들어냈다. 이것은 지역공동체를 일구는 문화교육의 대안모델이 되어, 구로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도 확산되는 성과를 가져왔다.
청송으로 작업장을 옮긴 후 나무닭움직임연구소는 '청송 공연예술놀이터'를 열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스물 네 명의 아이들이 참가하고 있다. 아이들은 11월까지 실팽이 돌리기, 장다리, 탈놀이, 그림자극을 익히게 된다. 그리고 11월 마지막 주에는 그동안 익힌 기술로 하나의 연극작품을 만들고 발표회를 할 계획이며, 또 10월에 있을 청송 문화 사과축제에 참여하여 지역축제를 보다 생기 있고 재미있게 만들 것이다.
청송공연예술놀이터에서 실팽이(디아볼로)를 익히는 아이들
이와 비슷한 프로그램의 공연예술놀이터를 영양군의 세 개의 공부방 아이들과도 진행하고 있다. 영양 아이들은 5월에 있을 산나물축제에서 퍼레이드를 할 계획이다. 장다리를 타고, 포이를 돌리고, 탈을 쓰고 큰 인형을 들고 마을을 돌아다니고 축제장을 누비고 다닐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아이들의 정성어린 거리공연이 이 지역에서 벌어지는 축제의 시간과 공간을 아름답게 채워줄 것을 소망하면서 말이다.
많은 이들이 전국에서 앞을 다투어 열리는 축제들의 문제점들을 말한다. 돈벌이와 전시행정,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판치는 축제장, 대중가수나 대도시에서 활동하는 엔터테인먼트들이 고액의 공연료를 받아 챙기고 떠나버리는 축제, 지역민들은 소외되고 방송국이 대행해주는 축제, 관광과 상업적인 행사로 전락해버린 축제에서 우리는 더 이상 마을 공동체의 소망과 제의(祭儀)라는 성스러운 행위를 찾아볼 수가 없다. 축제가 끝난 자리에는 관광객들이 버린 쓰레기들과 급조된 조형물들의 흉물스런 잔해들로 가득하다.
축제를 통해 마을이 생기를 얻거나 문화적으로 축적되는 것도 없고, 남아있는 지역민들은 문화적으로 소외됨을 다시 실감하면서 허탈해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축제란 말인가? 축제는 지역공동체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생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역의 풀뿌리 공동체를 외면한 채, 하루 잠깐 찾아왔다가 썰물처럼 금방 사라져버리는 관광객들만 짝사랑하는 축제는 살아남을 수 없다. 공연예술놀이터는 축제의 근본, 신성한 제의와 공동체의 신명을 되찾기 위해 풀뿌리 문화를 키워내는 사업이다.
이 공연예술놀이터에서 아이들의 닫혀있는 몸, 기계화되어가는 몸이 인간과 동고동락하는 몸, 인류를 향한 우정을 지닌 몸, 우주적으로 소통하는 몸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그리하여 그 몸들로부터 지역의 문화와 축제의 근본이 회복되는 미래를 꿈꾼다. 아이들은 정말 쑥쑥 자란다. 앞으로 꾸준히 이 새싹들에게 충분한 양의 물과 양분을 공급해준다면, 10년 뒤에는 지역 공동체의 신명으로 만들어지는 축제, 지역에서 문화예술을 꽃피우고 있는 문화일꾼들을 만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지 않을까. 그런 날이 오길 간절히 바란다.
- 글쓴이 : 임은혜
- 극작가, '나무닭움직임연구소'는 청송군 청송읍 송생리에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