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임은혜_연극으로 만나는 세상]연극은 놀이다
- 임은혜
연극은 놀이다
한 해 농사의 시작을 앞두고 풍요와 생명력을 기원하는 정월대보름날, 우리 마을은 매년 마을 총회를 열어 반장 선출도 하고, 마을 행사를 맡아 볼 유사를 정하기도 하며 한 해 농사를 위해 어떻게 협력할 것인가를 의논한다. 그리고 보름달이 뜰 무렵에 저녁 식사를 함께 한 후 각 방에서 아주머니들은 텔레비전 드라마에, 아저씨들은 고스톱에 열을 올리시다가 술과 흥이 좀 무르익으면 노래방 기계를 틀어서 가무를 즐기시는 게 제 작년까지의 정월대보름이었다.
예부터 달은 생명력의 원천으로서 농작물의 탄생과 성장을 주관하는 신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정월 보름날은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고 마을 공동체의 신명나는 놀이와 함께 생기를 흠뻑 담아내는 날이었다. 오곡밥 먹기, 더위팔기, 다리 밟기, 복토 훔치기, 쥐불놀이, 나무조롱. 조리밥, 마당찧기, 내농작(內農作), 모기팔기. 노래기 쫓기, 부럼 깨물기, 농점(農占), 용알 뜨기, 대추나무시집보내기, 복쌈, 소밥주기, 마을보기, 개보름쇠기, 귀밝이술, 콩볶기, 약밥, 보름나물 먹기 등등, 정월대보름에 행해졌던 놀이와 음식들이다. 여느 때보다 다채롭던 놀이들이 어디로 갔을까.
▲ 쥐불놀이를 준비하고 있는 아이들
농사가 주업인 마을 사람들이 정월대보름을 생기 없이 보내는 게 안타까웠다. 환한 달빛과 불타오르는 달집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삶과 노동을 준비했던 정월대보름을 되찾을 순 없을까 하는 바람으로 작년에 이어 올해도 정월 대보름 놀이를 준비했다.
학교 운동장에 달집을 쌓아올렸다. 마을 가구 수 만큼 솟대를 깎아서 ‘대보름 기운 받아 올해도 풍년입니다’라고 적은 한지를 매달았다. 그리고 길놀이를 하면서 집집마다 놓아드렸다. 우리 마을에 세 명밖에 안되는 아이들을 불러 모아 깡통을 뚫어서 쥐불놀이 하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단 한 번도 쥐불놀이를 해 본적이 없다는 시골 아이들. 이젠 도시나 시골이나 아이들에게 놀이하는 법을 자상하게 알려주는 마을 문화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한가롭고 드넓은 시골 들판에서 자치기, 구슬치기, 연날리기를 하는 아이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어른에서 아이로 전해지는 놀이가 없다보니 어른들과 아이들 간에 유대감이 거의 없다.
동쪽 산등성이로 보름달이 수줍게 떠오른다. 우리는 풍물을 울리며 마을을 돌기 시작했다. 아이들도 열심히 쥐불을 돌리며 뒤따랐다. 마을 회관에 모이신 아저씨들이 악기를 보자마자 흥이 나셨던지 악기를 받아들고 몸을 흔들어대시며 풍물을 울리신다. 독특한 삼채 가락이 나온다. 아무데서나 들을 수 없는 송생리 후평마을 닭집 아저씨만의 삼채가락. 아저씨들의 풍물 장단을 따라 달집이 있는 운동장으로 갔다. 커다랗게 떠오른 보름달을 바라보며 아주머니들도 손뼉을 치고 어깨춤을 추면서 길놀이 간다.
▲ 달집을 태우며 춤추고 있는 마을 사람들
달집에 불을 붙였다. 둥글게 타오른 달집 연기 속에서 보름달이 모락모락, 막 태어난 아이처럼 웃고 있다. 풍물 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마을 사람들이 불을 돌면서 춤을 춘다. 누구에게 보여주는 춤도, 누가 시켜서도 아닌 자발적이고 흥겨운 춤들이다. 평소에 무뚝뚝하고 수줍음 많던 어르신들이 온몸을 흔드시면서 신명에 사로잡혀 몸을 놀리신다. 각각 제 앞에 각자의 신을 모시고 기원을 하듯 놀이 속의 제의, 제의 같은 놀이에 흠뻑 빠져 춤을 추신다. 이토록 환희에 차고 자유로운 몸짓, 그 자체로 기쁨이고 즐거움인 놀이를 그동안 왜 잊고 살아오셨을까. 30년 만에 보름 놀이를 해본다는 마을 어르신이 쓸쓸하게 말씀하신다.
“젊은이들이 마을에 살아야 이렇게 노는 게지 늙은이들이 뭘 할 수 있겠어...”
마을과 더불어 연극을 하겠다고 시골로 내려온 지 3년째 접어든다. 연극을 한 마디로 뭐라고 할 수 있겠냐고 물으면 ‘놀이’라는 말이 먼저 떠올린다. 연극을 한다는 것은 논다는 것이다. 땅바닥에 사각형을 그려놓으면 집이 되고, 순이는 엄마가 되고 철수는 아빠가 되는 아이들의 소꿉놀이에서, 우는 아기를 어르면서 온몸으로 호랑이 흉내를 내가며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의 몸짓에서, 액을 막아내고 풍요와 건강을 기원하는 탈놀이에서, 대나무를 휘어서 꽂아 놓고 저승과 이승을 오가면서 죽은 넋을 달래고 신을 놀린다는 무당의 푸닥거리에서 연극을 볼 수 있다. 관객과 배우가 분리되어 ‘보여주기’하거나 ‘인체하는’ 연극이 아니라 행위를 하는 자와 보는 자가 서로 교감하고 그 순간을 공명하는 집단 놀이인 것이다.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와 놀고, 동식물과 놀고, 산자와 죽은 자가 놀고, 신(神)도 모셔와 노는 것이다.
오래전 마을 굿과 더불어 있던 우리네 연극은 놀이이자 제의 행위였다. 길놀이, 탈놀이, 각 절기의 민속놀이들과 함께 이루어졌던 행위는 마을 공동체의 집단적 소망을 방출하는 통로였다. 사람들은 이 놀이와 제의 행위를 통해 빈궁한 현실을 넘어 설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고, 그들을 억압하는 지배층을 비꼬면서 흐드러지게 웃을 수 있었다. 엄숙하게 그저 무대만 바라만 보는 게 아니라 언제든지 판에 끼어들어 함께 춤추고 놀 수 있는 마당이 연극이었다. 무질서와 부조리함이 허용되었던 놀이, 공동체의 유토피아를 담아내는 놀이, 신성한 우주적 질서와 맞닿아있는 제의의 행위가 있었을 뿐이지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그럴싸한 무대에서 ‘연기’하는 연극은 애당초 없었다. 온갖 수식과 치장으로 요란한 연극들, 관객들은 딱딱한 객석에 앉아서 입만 벌리고 있고 배우들끼리만 춤추고 놀고 있는 뮤지컬들... 놀이라는 근원에서 떨어져나간 연극은 죽어가고 있다.
▲ 관객과 함께 배를 끌고 가는 놀이(연극 ‘체 게바라’ 칠레 공연)
정월 대보름 놀이의 마지막 순서로 풍등을 올렸다. 작년보다 잘 띄워지지 않아서 조바심을 갖고 풍등을 붙들고 있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풍등에 만 원 짜리 한 장을 꽂으며 기도를 하신다. 더욱더 풍등을 잘 띄워야한다는 사명감에 얼굴에 뜨거운 파라핀 방울을 맞아가면서 풍등이 바람을 타고 날아오를 때까지 꼭 잡고 있었다. 빨간 풍등이 달을 마주보고 떠오르는 순간, 정적이 흘렀다. 보름달을 마주보며 까마득히 날아오르는 풍등은 태고의 신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했다. 생명을 이끌어가는 신성한 힘을 느끼고 있는 듯, 마을 사람들 모두 숨 죽이고 있었다. 암스트롱이 보았던 달이 아니라 옥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는 달을 상상하는 사람들, 정월 대보름달의 생명력을 느끼며 간절히 소망을 띄워 올리는 사람들,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춤을 추며 달 놀이 하는 사람들... 그들의 본질적이고 정열적인 행위에 연극이 있는 것이다.
- 글쓴이 : 임은혜
- 극작가, '나무닭움직임연구소'는 청송군 청송읍 송생리에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