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커스
- [이선아_바람 따라 구름 따라]영주 무섬마을
- 이선아
"돌아가려고." 순간 초침이 멈췄다. 수화기 넘어 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이유가 뭐니" 멈칫 거리며 내가 물었을 때, 김은 대답 대신, 낮고 긴 한숨을 토했다. 약속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지만 김과의 통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어쩌면 김의 마음을 더 들여다 볼 수 있었겠지만 나는 매정하게 시간이 없다고 잘라버렸다. 할랑하게 숨쉬기도 힘든 곳에서 화려하게 쌓아 올린 이력을 버리고, 시간이 쉬어가는 곳으로 돌아가겠다는 김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섬으로 떠나던 날 아침, 난 착잡하던 김의 목소리를 명치끝에 매달았다.
오래 비가 내리지 않은 탓에 대지는 바스락거렸다. 무섬마을 앞엔 마을을 둘러싼 모래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발을 떼자마자 뿌옇고 누런 먼지가 풀풀 날렸다. "여름엔 물이 여기까지 찼었는데..." 일행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물결 모양의 띠들만 지난 여름의 강물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몸을 드러내고 있는 모래들은 고왔다. 발을 옮기는 대로 모래의 속살이 패였다.
강을 가로 질러 놓인 외나무다리는 긴 곡선을 그리며 놓여 있었다. 길이가 150미터는 되어보였다. 높이가 60센티미터 정도이고, 폭이 30센티미터 밖에 되지 않았다. 양팔을 벌려 균형을 잡아보았다. 한 발을 앞으로 내놓기가 무섭게 허리를 펴고, 정면을 응시하지 않으면 얼음이 언 내성천으로 빠져버릴 것 같았다. 곡예를 타듯 아슬아슬 했다. 걸을 때마다 신음 소리가 터졌다.
미끄러지면 끝이야. 정신 차려, 최면을 걸듯 주문을 걸었지만, 나무의 어딘가가 부식돼 있는 건 아닌지. 꼭 맞지 않은 신발 속의 발이 제멋대로 놀아나다가 넘어질 수도 있겠구나, 갑자기 바람이라도 불어 눈을 뜰 수 없으면 어쩌나, 어쨌거나 이곳엔 불러도 대답 없는 "엄마야"만 있을 뿐이다.
나의 불온한 상상은 끝날 줄 몰랐다. 결국 나는 마주 오는 사람을 피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비껴다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창백한 겨울 햇살이 물속에서 부서져 일렁거렸다. 김은 오래 객지를 떠돌았다. 세간을 조금씩 불리며, 조금 더 큰 도시로 옮겨 다녔다. 겨울에 얼음이 얼면 썰매를 타고, 여름에 발가벗고 물장구를 치는 일이 싫어서 아득바득 공부하더니. 뭐에 서운했던 것인지, 명절이 되어도 고향으로 돌아온 일이 없었다. 도시에서 우연히 김을 본 친구들은 말했다. "몰라보겠다."고.
마을은 복원 중이였다. 공사장의 먼지를 까맣게 뒤집어 쓴 고양이들은 담벼락에 앉아 졸고 있거나, 사람을 피해 비닐하우스를 들락거렸다. 참새 떼가 지붕 위로 줄을 지어 날았다. 뻑뻑하고 차가운 공기를 밀어낸 마을이 고즈넉이 앉아 있었다. 몇 해 전부터 시작된 마을의 단장은 아직도 끝을 맺지 못하고 있었다. 새롭게 바뀐 반질거리는 담벼락과 줄지어 나란히 박혀 있는 돌은 정돈 됐지만 정이 가지는 않았다. 마을의 맨 왼쪽에는 박물관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금칠로 번쩍거리는 손잡이에 큰 문고리가 달려 있었고, 곳곳에 CCTV가 설치돼 있었다. 세월의 손때가 사라지고, 익숙한 것들이, 더 익숙한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마음에 들진 않았다.
"공사한다꼬 좀 흉하지..."
모자를 쓰고, 털 조끼와 솜바지를 입은 동네 할머니가 말꼬리를 길게 흘렸다. 손님을 모시기에 미안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낯선 이와 쉽게 눈을 맞추고, 무뚝뚝하게 말을 꺼내고, 무심한 듯 돌아서가지만, 그들은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시골 할머니의 정겨움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추운데 우예...저쪽으로 돌아가면 볼게 더 많아."
말을 받아 들고, 마을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 보았다. 생활의 흔적이 보였다. 회색빛 가스통, 시커먼 전기계량기. 흰 페인트가 벗겨진 우체통, 깍듯하게 세워진 문패들, 잘 쓸려진 마을길, 사람이 떠나고, 화물차가 오가는 곳에 주민들의 일상이 마을을 데우고 있었다.
"좀 들어가 보실려나? 우리 집이야."
체구는 작지만 눈빛이 맑은 할머니였다.
"그래도 되요?"
끼익하고 대문이 열렸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외양간이 보였다. 여물통이 놓여 있고, 소는 보이지 않았고, 문틈으로 새어든 햇볕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팔고 없어." 할머니의 가늘고 여윈 목소리가 흔들렸다. 주인과 함께 나이를 먹어갔을 소의 워낭소리가 희미하게 퍼졌다. 곁에는 반질하게 닦은 가마솥이 보였고, 군불을 때던 아궁이의 모습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부뚜막 위의 하얀 사기그릇들은 부뚜막 위에서 사이가 좋았다. 마당을 중심으로 집이 앉아 있었다. 마당 뒤로 호박씨를 말리고 있는 넓은 툇마루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루의 선반위로 나란하게 정리된 작은 소반들이 주인의 인심을 짐작케 했다.
하얀 옥수수가 꾸덕꾸덕 말라가고 있었고, 무청이 머리를 늘어뜨리고 걸려 있었다. 왼편으로 보이는 부엌엔 큰 가마솥이 두 개와 운두가 낮고 중배가 부른 독들이 놓여 있고 시멘트가 깔린 바닥은 비질이 되어 깨끗했다. 뒤꼍에 안채에서 멀찌감치 물러서 있는 화장실과 빨랫줄에 매달린 주인의 넉넉한 통치마가 바람을 타고 있었다. 집의 곳곳에 한문으로 된 좋은 글귀들이 붙어있었다. 오래 보고 있자니. 할머니가 "아들이 썼어."라며 손으로 글을 훔쳤다.
낮은 담 사이로 이웃의 얼굴이 보였다. "손님 왔는가?" 숯돌을 든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보고 웃었다. "예. 설에 아들네 오는 갑지" 숯돌만 보고도 할머니는 알아차렸다. 부모의 마음은 부모만이 알 수 있다. 할아버지의 집은 전형적인 까치구멍집이였는데, 지붕에 작게 구멍이 뚫려 있었다. 까치구멍집은 경북 북부지역과 강원도에서 볼 수 있는 집이라 했다. 겹집 모양으로 ㅁ자형이었으며 대문만 닫으면 비바람과 외부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다.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고, 집안에서 모든 생활을 할 수 있는 곳, 집을 기능으로만 정의한다면, 완벽한 곳이었다.
늙은 호박과 짚으로 묶어 매달아 놓은 메주, 차곡차곡 재 놓은 땔감, 손잡이가 반질반질한 호미, 그리고 섬돌에 놓인 털신 한 켤레. 언젠가 동구 밖에서 술래잡기를 하던 열 살의 김이 발이 시리다며 집으로 들어가 할아버지의 털신을 신고 나왔었다. 털신은 김이 신기에는 너무 컸다. 김은 신을 끌고 다니다가 그날 내내 술래를 했었다. 털신에 추억이 고였다.
보이지 않는 것들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은 마음을 움직이는 어떤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정은 받아 줄 상대가 있어야만 뿌리를 내리는 것이어서, 어느 곳에는 넘치고, 또 어느 곳에는 부족하여 어떤 식으로든 그것을 만나게 되면 행운이라 할 수 있다. 태초에 그것을 맛 볼 수 있었던 이들은 그것이 없는 곳에서도 살 수 있다. 자신들 안에 새겨져 있는 그것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낡아버린 그것을 가지고 계속 살아갈 수는 없다. 힘을 잃은 그것은 스스로 깨어나 어느 날 문득 주인의 마음을 움켜쥐고, 자신이 생겨났던 곳으로 데려다 놓는다. 사립이 열리고 무섬의 까치가 울었다. 명치의 김이 사라졌다.
- 글쓴이 : 이선아
- 1977년생, 숭실대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글 쓰고 책 읽기를 매우 좋아하며, 영화관에 혼자 가는 것을 즐긴다. 글 쓰는 직업을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있다. 현재 안동 MBC에서 구성 작가로 일하고 있다.